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황태자 한진화(5)
진화는 간택전으로 간 황후가 찾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움직였다.
‘나 소저!’
진화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것은 ‘나 소저도 또 누군가를 물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남궁구는 나 소저를 두고 남궁진혜와 비슷하다고 했지만, 진화가 보기에 둘은 많이 달랐다.
남궁진혜는 아버지 남궁경이나 제왕검을 닮아 단순한 듯하지만 앞뒤 잴 것 다 재고 움직이는 편이었다. 이제까지 남궁진혜가 친 사고들을 보면 규모가 워낙 커서 놀랍기는 하지만, 모두 남궁진혜의 힘이나 남궁세가의 힘으로 쉽게 수습될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하연은 달랐다.
패황권문의 힘이 남궁세가에 미치지 않는 것을 다 떠나서 나하연은 그런 것을 계산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목적에 따라서는 그 과정에 있는 장애물이나 위험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를 따라 이 궁까지 들어왔지! 평생 무공만 익힌 사람이 어떻게 간택전을 통과하겠다고…… 쯧.’
나하연은 재간택과 삼간택에 있을 학문이나 교양, 궁의 여성들에게 강조되는 어려운 재주와 예법을 익히고 통과해야 한다는 건 전혀 생각지도 않고 왔을 것이 뻔했다.
“저, 전하, 조금만 처, 천천히! 전하-!”
동 태감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진화의 걸음은 빨라지기만 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간택전 앞에 도착했다.
“독은 없었다. 나 채녀는 이에 관해 할 말이 있는가.”
“예, 황후 폐하. 저는 처음부터 독이니 뭐니 한 적이 없습니다.”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진화가 걸음을 멈추었다.
“전하!”
“쉿!”
진화는 저를 부르는 동 태감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안에서 들리는 말에 찬찬히 귀를 기울였다.
“저는 그저 안 경의가 제 찻잔에 흰 가루를 넣었다고 했을 뿐, 안 경의가 그것을 향 가루라 한다면, 그것을 왜 제 찻잔에 넣었는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하, 하오나 황후 폐하, 제가 흰 가루를 넣었다는 것 또한 나 채녀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 뒤로도 나하연과 억울한 듯 울먹이는 목소리, 그리고 어머니인 황후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뒤는 들을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허, 저 채녀가 함정에 빠진 듯합니다. 안 경의가 사가에 손을 써서 흰 가루를 구해 오면 큰일이 아닙니까. 몰래 도울까요?”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황후의 처결을 듣고 동 태감이 슬쩍 물었다.
걸핏하면 건희전 지붕을 타 넘던 나하연을 진화의 반려로 환영하는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심성이 고약하지 않은, 더군다나 진화를 따르는 수하였던 나하연이 애송이 계집의 함정에 빠지도록 두는 것도 영 아니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는 동 태감의 은밀한 속삭임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을 거다.”
황후 또한 모두 알고 있었다.
“모후께서는 저들의 말을 다 들으신 뒤 나를 부르시고 안 경의의 사가에 연통을 보낸다고 하셨지만, 내가 이곳에 불려온 것은 그보다 전이었다. 그러니 안 경의의 사가에도 말이 있기 전에 벌써 사람을 보내 놓으셨을 거다.”
“아…… 역시, 우리 황후 마마시지요!”
진화의 말에 동 태감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크게 감탄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말했다.
“암요, 뉘 앞이라고 감히 속일 수 있을까. 허미인이나 원귀빈 때도 굳건하셨던 우리 마마 앞에서 감히 저런 짓거리라니! 대소 신료들조차 입을 잘못 놀리면 우리 마마께서 못 배워 먹은 여식을 후궁전에 처박아 말려 죽일……!”
“…….”
“흠흠. 노비가 말이 길었습니다.”
물끄러미 저를 향하는 진화의 순수하고 무서운 눈망울에, 하마터면 비밀까지 털어놓을 뻔한 동 태감이 얼른 입을 닫았다.
진화는 뒷이야기가 몹시 궁금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나 채녀의 무고함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간단한 일이니까.”
동 태감의 물음에 진화가 가볍게 답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궁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 납시옵니다!”
진화의 허락을 받은 궁녀의 목소리가 간택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진화의 등장으로 간택전이 술렁거렸다.
창신궁이나 장추궁 궁인이 아니고서야 다른 궁인들은 평소 황태자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거나 아예 그림자도 보기 힘들었으니. 간택전의 여인들뿐만 아니라 간택전에 있는 궁인들마저 황태자의 등장에 들뜬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평신하라.”
진화의 명에 궁인들과 간택전 여인들이 엎드린 몸을 바로 했다.
“아…….”
어딘가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나왔다.
정 상궁이 엄하게 눈을 부라렸으나 구체적으로 누가 낸 소리인지는 찾지 못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든 여인들이 진화를 보고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황후와 진화는 주렴 속에 있는데 말이다.
황후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진화를 맞았다.
“곤란한 일이 있어 부득이 태자를 찾았습니다.”
“아니옵니다. 사정은 밖에서 대충 들었사온데, 그런 일이라면 해결이 몹시 간단합니다.”
“호오, 그래요? 그럼 태자에게 부탁 좀 하겠습니다.”
짐짓 놀란 듯하던 황후가 곧바로 허락했다.
황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진화가 앞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진화의 손에서 순식간에 무언가가 주렴을 뚫고 날아갔다.
휘이이익-!
탓.
돌이 잡히는 듯 딱딱한 소리가 났다.
“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지 못한 여인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왔다.
그리고 나하연이 손바닥을 펼쳐 보려는 순간.
진화가 나하연에게 물었다.
“거기에 적힌 글자가 무엇이더냐?”
“결(結)입니다.”
진화의 물음에 나하연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대충 예상을 하고 있던 황후조차 놀란 눈으로 나하연을 보았다.
“손을 펼쳐 확인시켜 주거라.”
“예.”
진화의 명에 나하연이 진 상궁에게 손을 펼쳐 안에 든 종이와 글자를 보여 주었다.
“겨, 결 자가 맞사옵니다!”
진 상궁이 놀란 목소리로 황후와 모두에게 확인시켰다.
“와아…….”
간택전이 또 한 번 술렁였다.
나하연이 진화를 모시던 무림인이라는 건 모두 알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확인을 하는 것은 또 달랐던 것이다.
물론 수업 시간에 나하연이 이상한 묘기를 부리던 것과도 달랐다.
모두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감탄을 하는데 오로지 한 사람, 안명환만이 식은땀을 흘리며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때, 진화의 목소리가 무심하게 울렸다.
“무림인의 안력은 가진 바 경지에 따라 다르나, 제가 아는 나 채녀의 경우에는 범인의 손안에서 흰 가루가 떨어지는 것 정도는 이 글자보다 쉽게 보았을 겁니다. 굳이 제가 아는 그녀의 성품을 들어 두둔하지 않더라도, 나 채녀의 경지는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진화의 말에 나하연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니,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입꼬리를 끝까지 올리고 웃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뭐든 숨기는 법이 없지.’
나하연의 모습에 진화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황후도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하긴 날아드는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는 안력이라면, 태자의 말처럼 누군가 흰 가루를 떨어뜨리는 건 쉽게 보았겠구나. 또한, 나 채녀가 굳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없는 일을 만들어 이 사달을 만들어 낼 이유도 없지.”
황후가 말끝에 엄한 목소리를 만들며 앞에 있는 안명환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화가 나타나 나하연의 실력을 증언해 준 마당에 점점 궁지에 몰린 것은 안명환이었다.
이제 안명환이 기대할 것은, 집안에서 사 놓은 궁인이 이 소식을 집안에 잘 전달하여 저 또한 이 위기를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안명환의 기대는 곧바로 무너졌다.
“네 사가로 궁인이 가더구나. 내가 ‘두 번째’로 보낸 궁인이 도착하기 전에 말을 전하기 위해. 하얀 가루로 된 향 가루를 찾아서 황궁에서 온 궁녀에게 쥐여 주라고 하는 말을, 내가 ‘먼저’ 보낸 궁인이 들었단다.”
“……!”
“왜 하얀 향 가루를 구해야 하느냐? 네가 먼저 가져간 것을 가져오면 될 것을…….”
“화, 황후 폐하!”
사색이 된 안명환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살기 위해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으나, 황후는 그녀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어째서 그 향 가루는 이름조차 없는 것이냐? 네가 떳떳하다면 왜 내가 궁녀를 보내기 전에 먼저 궁녀를 보낸 것이냐! 함부로 사사로이 황궁의 궁녀를 이용한 것도 모자라, 사가와 작당하여 본 황후를 능멸하려 한 것이냐!”
“화, 황후 폐하!”
“네년, 감히 본 황후의 면전에서 본 후를 능멸하고 살고자 한 것이냐!”
“죽,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황후 폐하! 하, 하오나 추호도 폐하를 능멸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너는 이미 본 후를 속이려 했다. 본 후의 앞에서, 뻔히 눈에 보이는 거짓을 말하고 눈물을 흘려? 뭣 하느냐? 징벌방으로 끌고 가거라!”
“예, 황후 폐하!”
황후는 안명환이 죄를 고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말 외에 다른 것은 들어 주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하게 안명환의 변명을 막고 궁녀들에게 명을 내렸다.
“화, 황후 폐하,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안명환이 울부짖으며 소리를 쳤지만, 곧 궁녀들의 손에 입막음까지 당해 끌려 나갔다.
“이번 간택전은 참으로…… 볼썽사나운 꼴을 태자에게 보였습니다. 본 후가 태자 보기에 민망합니다.”
“아니옵니다. 그것이 어찌하여 모후의 부끄러움이겠습니까. 오히려 오늘의 처결을 통해 본 모후의 현명함에 탄복했을 따름입니다.”
“후후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태자도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예. 하면 소자는 일정이 있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요.”
소란이 있었지만, 진화는 침착하게 황후의 말에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
간택전을 나서는 길.
“전하, 나 소저에게 아무 일이 없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동 태감은 이상하리만치 말이 없는 진화에게 부러 말을 걸었다.
그러자 진화는 제가 또 혼자 생각이 길어졌음을 알아차렸다.
“모후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를 생각했다. 나를 부르시지 않았어도 해결하실 수 있는 일임에도 굳이 나를 저 자리에 청하신 데에는 바로 이런 소란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고.”
“일부러 소란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요?”
“꽃같이 미소를 짓고 입안의 혀처럼 달콤한 말을 하는 이들은 저 여인들 말고도 앞으로 수없이 많겠지. 하지만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항상 경계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군.”
“아, 그렇군요.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 깊은 뜻으로 전하를 부르시고 전하께서 그 뜻을 모두 알아차리시니,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닙니까.”
“글쎄…….”
“예? 왜 글쎄이옵니까, 전하? 전하, 일부러 빨리 걷지 마십시오!”
진화는 뒤에서 시끄럽게 따라오는 동 태감의 목소리를 들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모후의 분노가 아직 풀어지지 않았으니. 곧 이면 속에 또 다른 이면이 있겠구나. 게다가 나 소저는 이제 좀 화가 난 모양이던데…… 황궁 담은 넘지 말아야 할 텐데.’
진화는 황후가 저를 먼저 보낸 이유를 짐작하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나하연이 황궁 담을 넘는 것도 조금쯤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간택전에 마련된 정 상궁의 집무실.
그곳에서 황후는 여전히 주렴을 내리고 한 궁인과 마주했다.
“안명환과 친하게 지내던 네가, 그녀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미리 알렸다. 내가 이를 어찌 받아들일 듯하더냐?”
“그저 안명환의 움직임이 이상하여 충심으로 윗전에 고한 것뿐이옵니다.”
“네가 그녀를 부추긴 것은 아니고?”
“종고모님의 일로 저희 상주원씨 가문은 충성심을 의심받을 뻔했으니. 이번 간택전에 들어서면서 가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이 황실의 분란을 없애고 가문의 오욕을 치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간택전에서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을 미리 알려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황후의 물음에 원영농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황후는 제 앞에서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답하는 원영농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원 귀빈, 아니 폐서인 원씨와 닮았다.
“……그녀 또한 시작은 충심이었지. 하지만 그녀의 판단이 틀렸고, 방법이 틀렸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망가지고 나서는, 충심마저 비틀렸다.”
황후의 말에 원영농의 눈빛이 흔들렸다.
폐서인 원씨였다면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그런 건 처음부터 모자란 이였기 때문이다.’ 되받아쳤을 것이다.
아직은 어리고 순수하며, 곧은 눈빛을 한 원영농을 보며 황후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황후의 한숨 소리에 원영농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네 멋대로 일을 일으키지 말거라. 내명부는 황제 폐하와 태자가 조용히 쉬다 가실 수 있는 평화로운 물이어야 한다. 물 밑에서 치는 발버둥의 잔상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일은 이미 틀어진 것이니. 너는 네 종고모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각골명심하겠사옵니다, 황후 폐하.”
잔뜩 긴장했던 것이 풀린 원영농은 이제야 군부의 여식답게 단련된 군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그런 원영농의 모습에 슬쩍 입꼬리를 말고는 정 상궁의 집무실을 나갔다.
원영농은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매끄럽게 움직이는 황후의 입꼬리만 보았을 뿐임에도 한참 멍한 얼굴로 그 잔상에 젖어 있었다.
그날 밤.
야심한 어둠을 뚫고 간택전 지붕 위로 바람이 불었다.
쉬이이이익-!
‘여긴가.’
어두운 그림자가 조용히 지붕 기와를 덜어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탁.
깜깜한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안명환은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 헉!”
“쉿.”
안명환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상대가 그녀의 목을 눌렀다.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명환의 아혈을 짚은 나하연이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네가 나한테 나쁜 짓을 한 거잖아, 난 당하고 사는 성미가 아니라서.
나하연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린다는 사실에 놀라는 동시에.
퍼-억.
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안명환의 의식이 끊어졌다.
‘뭐, 뭐야? 기절한 건가? 겨우 이 정도로?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그저 한 대 쥐어박은 것뿐인데.
나하연이 당황한 얼굴로 죽은 듯 기절한 안명환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