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가득 채운 삶(1)
건희전.
진화가 집무실에서 문서들을 보기 시작했다.
진화는 요즘 대사농이 보는 제국의 세곡 출납 문서 또한 눈에 익히기 시작했다.
스승인 조위례가 시킨 일이기 때문이다.
“제국이 자손만대로 이어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위엄을 유지하고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에 바탕이 되는 것이 이 금력, 그중에서도 세곡입니다. 황제가 군대를 유지하고 곁에 사람들을 부리려면 결국 돈이 들지요. 백성들이 들고일어나지 않고 그들의 자리에서 힘든 삶을 견딜 만큼 삶을 유지시켜 주는 것도 돈입니다. 황궁으로 돈을 모으는 법과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도록 돈을 푸는 법, 이 두 가지만 알아도 망군 소리는 듣지 않을 것입니다.”
쉬운 것을 어렵게 가르치는 스승, 있는 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스승, 어려운 것도 쉽게 가르치는 스승이 있다면, 승상 조위례는 단연코 세 번째였다.
진화는 사사롭게는 외조부인 조위례 덕분에 빠르게 황궁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숙제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전에는 글씨를 수정한다는 이유로 중서령 사마윤의 상소를 보게 했지. 보기 드문 명필이라 하여 그때는 그런 줄 알았지만…… 이번에는 또 공교롭게도 대사농 정조인의 일이란 말이지.”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전하.”
“말 그대로 공교롭구나. 모두 간택전에 여식이나 집안의 사람을 보내 놓은 이들이니.”
“아! 중서령 사마윤과 대사농 정조인이 사돈지간이니, 사마가의 장녀는 외가로 대사농 가문을 두었군요.”
“하후대장군부나 북위대장군은 이미 겪어 보았고, 나하연이나 무림의 세가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진화는 승장 조위례가 단지 제국의 공적인 일뿐 아니라 후궁 간택전에 있어서도 뭔가 의도가 있을 거라는 데 책상 위의 문서 전부를 걸 수도 있었다.
모후인 조정화만 하더라도 왕비를 거쳐 황후에 올라서는 데에 말들이 많았다.
정비이긴 했으나 아들을 잃어버렸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정화에게는 지극한 황제의 총애가 있었지만 그건 황후의 자리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고금의 역사를 보아도 황제의 총애를 받는 여인과 황후가 서로 다른 것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화가 원귀빈과 허미인을 모두 물리치고 황후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남조씨 일가라는, 제국을 복구하는 데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을 감당할 수 있는 중원 최고의 거부가 배경에 있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황실의 사돈을 택하는 일에 정치가 빠질 수 없지. 최종 간택 전에 안목을 기르라는 뜻인가.’
진화는 조위례의 의도를 추측하며 곰곰이 생각을 이어 갔다.
그런 진화의 모습이 좀 심각해 보였던가.
“참! 일전에 간택전의 일이 어찌 처결되었는지 알아보라 하셨지 않습니까.”
동 태감이 진화의 눈치를 보다 슬쩍 화제를 돌렸다.
마침 그 일이라면 진화도 궁금하던 차였다.
“그 일은 어찌 처결되었는가?”
“안 경의는 간택전 궁인을 모함하고 윗전에 거짓을 고한 죄로 태형을 맞고 곧장 출궁당했습니다. 또한 그 집안은 사사롭게 궁인을 사고 궁 안의 소식을 주고받은 죄로 아비인 안몽이 삭탈관직당했으며 황도의 가산을 몰수하였다 합니다.”
“그래.”
동 태감이 전해 준 소식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이곤 더는 묻지 않았다.
애초에 간택전의 일에 의견을 보태거나 황후의 처결을 어찌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일의 결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모후께서 자비롭게 처결하셨구나.”
“아…… 예. 그렇지요.”
진화의 말에 동 태감의 답이 조금 늦었다.
물론 황후에게 거짓을 고한 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한 죄였지만, 연약한 여인에게 태형은 장독이 올라 죽거나 근육이 터져 앉은뱅이가 될 수 있는 엄한 벌이었다.
다만 현경의 고수인 진화에겐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연약한 세계의 일이었으니.
사소한 은원으로 생사를 오가는 무림에서 살아온 진화의 입장에선 나하연과 원한을 쌓고도 죽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히 관대한 처분이었다.
“안 경의의 출궁 후 곧바로 초간택이 있었사온데, 나 채녀는 무사히 초간택을 통과하였다 하옵니다!”
초간택을 지켜보고 왔던 동 태감이 무척이나 기쁜 듯 말했다.
진화는 무척 의아한 얼굴로 동 태감을 보았다.
“나 소저의 초간택 통과에 동 태감이 왜 이렇게 기뻐하는가? 분명 나 소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든 건가?”
진화는 농담을 섞어 물은 것이었지만 동 태감의 반응이 이전과 달랐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답을 피한 것이다.
“흠흠, 그런 건 아닙니다. 후궁전에 드실 분과 미운 정이라니, 감히 어찌 그러겠습니다. 흠!”
후궁전에 드실 분이라니…… 역시 수상했다.
동 태감의 입꼬리가 실룩이는 모습에 진화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아, 아이고. 우리 전하 열심히 숙제하시려면 차라도 내와야겠습니다!”
동 태감이 진화에게 추궁을 당할세라 자리를 피했다.
* * *
초간택이 있던 날.
간택전에 있는 정 상궁의 집무실은 초간택을 위한 심사장으로 만들어졌다.
아침부터 아름답게 꾸민 여인들이 간택전 앞마당에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정 상궁이 이름을 부르면 셋씩 안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앞마당에 늘어선 여인들의 표정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다른 때였다면 긴장하면서도 기대와 설렘으로 빛났을 텐데, 이번 간택전의 여인들은 잔뜩 얼어붙어 있거나 어쩐지 결연한 얼굴들이었다.
얼마 전 안명환이 바로 이곳, 간태전 앞마당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태형을 맞고 쫓겨났기 때문이다.
같은 처지의 누군가가 죽을 정도로 얻어맞고 거적에 싸여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 여인들은 황궁의 무서움을 실감하게 된 듯했다.
그날 이후 간택전 여인들은 살얼음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러워졌다.
날 선 말을 주고받거나 뒤에서 수군거리던 일이 잦아든 동시에 은밀하게 눈치를 살피는 일이 늘었다.
한 발만 삐끗하면 쫓겨나거나 죽어서 나가야 한다는 황궁 살이.
이제 초간택이 지나고 나면 그 황궁살이를 하게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정해질 것이었다.
“황후 폐하 납시오!”
내관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초간택의 심사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인 조정화와 황실에 남아 있는 어른이라 할 수 있는 호양공주, 효안종사정부인 화안공주였다.
호양공주가 정 상궁의 집무실을 둘러보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초간택전이라지만 심사장이 영…….”
“일부러 주렴을 거두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며칠 전에 소란이 있어 간택전 궁인들이 위축되어 있을 듯해서요.”
정 상궁과 궁인들이 허리를 굽히기 전 황후가 웃으며 호양공주를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애초에 궁인들의 트집을 잡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던 듯, 호양공주가 황후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하여튼 황후마마는 너무 자애롭다니까요. 이런 때는 좀 불편하게 둬도 돼요. 그래야 황실 어려운 것도 알고 그러죠.”
“호호호, 그건 호양공주의 말이 맞습니다. 더군다나 얼마 전 발칙한 궁인 하나가 사달을 일으켰다 들었습니다. 간택전 생활이 엄격해지면서 오히려 들어오는 궁인들은 점점 더 편해진 모양입니다. 갈수록 주제를 모르는 이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
자애롭게 웃는 듯하던 화안공주가 눈빛을 날카롭게 벼르고 심사장 밖에 늘어선 여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심사장에 온 첫걸음부터 까다롭게 구는 모양새가, 호양공주와 화안공주는 초간택 심사 전에 자애로운 황후를 대신하여 엄격해지기로 약속이라도 한 모양새였다.
“간택전이 힘들었긴 황후마마 때가 제일이었죠. 그때는 아침에 눈을 뜨면 시체가 나오는…… 흠흠. 아무튼, 간택전 규율이 엄해져서 그 정도로 간 큰 이들은 없다니까 그건 다행이지 뭐예요.”
호양공주가 말을 하다 말고 황후의 눈치를 보았다.
황후가 간택전에 있을 때가 ‘간택 지옥’이라 불릴 때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는 간택전에서 밖의 사가와 연계하여 궁인들을 매수하고 서로를 모함하거나 독을 쓰는 것도 비일비재한 일이라, 재간택 전에 정계 한 일파의 여식들이 모조리 죽어 나간 적도 있었다.
그때 이후로 간택전 규율이 엄격해지면서 밖과 연락을 하지 못하고 매일 소지품을 검사하는 것도 모자라 궁인들이 항시 여인들의 동태를 감시하게 되었다.
모순적이게도 규율이 엄해진 이후로 죽어 나가는 여인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모를 일입니다. 더 발칙한 짓을 하고 싶은데 간택전 규율 때문에 막힌 건지 어떤지. 그런 의미로, 두 분은 오늘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실 겁니까?”
화안공주가 황후와 호양공주에게 물었다.
그러자 황후가 먼저 의례적인 초간택의 기준을 말했다.
“신분이 정확한지 확인하고 가진 재주를 보아야겠죠.”
“에이, 그런 틀에 박힌 걸 묻는 게 아니신데. 궁인으로 부리려면 순종적이고 손재주가 좋은 아이들이 좋을 테고…… 그래도 전 일단 눈 안에 독기가 차 있는 것들은 제외하려고요. 워낙 궁 안에 무서운 일이 많았어서.”
호양공주가 폐서인 허씨와 원씨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화안공주 마마께서는요?”
“저는, 충성심을 봐야겠습니다. 애먼 것들이 욕심만 가득 품고 황실에 들어와 고얀 짓거리를 벌이니, 눈에 욕심이 비치는 이들은 제일 먼저 쳐 내려 합니다.”
“하긴. 초간택은 본래 선발이 아니라 선별하는 것이 목적이니. 안 될 성싶은 것들을 쳐 내는 게 중요하죠.”
화안공주가 눈을 빛내며 하는 말에 호양공주마저 동조했다.
황후도 그들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어쨌든 초간택은 당장 후궁을 뽑는 것이 아니라 궁에 남길 이와 내보낼 이를 결정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간택전 궁인들을 들이라.”
“예, 폐하.”
황후의 말과 함께 초간택이 시작되었다.
* * *
이제까지 많은 이들이 있었다.
미모를 뽐내는 이들, 재주를 뽐내는 이들, 빵빵한 배경을 무기 삼아서 벌써부터 자리에 어울리는 품위를 내비치는 이들까지.
처음부터 궁녀가 되고자 들어온 중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성실하게 황궁에 남기 위해 애를 썼고, 후궁 자리를 노리는 호족 여인들은 그야말로 ‘꽃의 전쟁’이라 할 만큼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제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 간택전은 다른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미묘하군요.”
황후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다른 때였다면 은근히 미모를 뽐내거나 가진 재주들을 보이지 못해 안달이었을 텐데, 이번 간택전은 어째 다들…….”
화안공주가 말끝을 흐렸다.
초간택에서 미모와 재주를 뽐내는 건, 아름다움이나 진짜 재주를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심사장에서 미모란 보기 좋은 아름다움보다는 도톰한 눈 지방이나 복스러운 코, 평탄한 이마 등등 관상적으로 복록이 좋은 곳을 말함이었다. 가진 재주를 선보이는 것 또한, 황실 윗전들에게 영리한 자식을 나을 것이라는 말 대신 교양이나 학식을 뽐내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황실에서 후궁을 뽑는 것은 황실 자손을 번창하게 하려는 이유 때문이니 말이다.
특별하고 특출 난 것을 찾는 게 아니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간택전 여인들은 달랐다.
하나같이 관상학적으로 복록을 타고난 부분을 내비치는 대신 비장한 눈빛으로 심사장으로 들어와, 단아한 표정으로 순후한 성품을 드러내기는커녕 씩씩하게 신체 건강함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다들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에요? 병사나 군인을 뽑는 것도 아니고, 왜 죄다 충성심이 어쩌고저쩌고. 제 어릴 적 먹은 보약은 왜 줄줄이 읊는 거래요? 아까 태반 어쩌고 하는 소리 들었어요? 어휴, 그게 혼인도 안 한 처자 입에서 나올 소리인지 민망해 죽을 뻔했다니까요.”
호양공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한참.
초간택이 막바지에 이르러서였다.
원영농을 시작으로 후궁 자리를 맡아 놓았다는 귀한 여인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자, 황후와 두 공주는 이번 간택전 분위기가 어째서 이렇게 이상했던 건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가 영농이라는 이가 북위대장군부 출신이죠?”
“예. 일전의 사달을 미리 눈치채고 알려 온 이였죠. 위장군의 질녀인 것만 신경을 썼는데, 알고 보니 원치수 장군의 장녀라더군요.”
“사막의 멧돼지 그 인간요?”
황후의 말에 호양공주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사막의 멧돼지’라는 품위 없는 별명에 웃음을 참는 모습이, 화안공주도 그를 모르지 않은 듯했다.
호양공주의 말에 황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위장군이 북위대장군부의 충성을 증명하고 신뢰를 회복하러 보냈다기에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원치수 장군의 딸이라는 말을 들은 황후는 한동안 어이가 없었다.
‘폐하가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 서장의 사막까지 들어갔다는 장군의 딸이라니. 위장군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
위장군도 설마 원영농이 간택전에서 불손한 자를 색출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겠지만 말이다.
“곽진진이었나? 그나마 하남윤의 여식이 교태가 있었죠?”
“어휴, 그러면 뭘 해요? 하남제일미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높아졌던 콧대가 황후 마마를 보고 폭삭 주저앉는 거 보셨잖아요. 황태자 전하를 뵙고는 고개나 제대로 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중간한 미모를 내세울 바에는 없느니만 못하다는 걸 이제 안 모양이에요.”
과연 하남제일미라 불리는 외모가 과연 어중간한 것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지만, 어쨌든 당장 호양공주의 말에 화안공주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화안공주는 호양공주보다 한술 더 떴다.
“하후선은 그렇게 작아서야 황태자 전하를 모실 수나 있겠어요? 애가 애를 낳는 것도 아니고…….”
“그, 그건 그렇죠. 힘……은 세 보였지만 아이를 낳는 건 골격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시작하기 전에는 충성심이 어쩌고 욕심이 어쩌고 하더니, 막상 간택전 내내 여인들의 골반을 뚫어져라 보는 화안공주의 모습에 민망함은 황후와 호양공주의 몫이었다.
“역시 지금까지는 배경이며, 관상이나 품위, 자태가 중서령의 여식인 사마령이 제일 낫지 않았나요?”
“글쎄요. 그 아가씨도 미묘한 부분에서 눈을 빛내는 모습이 영…….”
호양공주의 말에 화안공주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진화의 무공을 “슈슈슉!” 소리 내어 흉내 내던 사마령의 모습을 떠올리며 황후도 말을 아꼈다.
그리고 마지막.
나하연이 들어오면서 황후와 두 공주는 확신했다.
‘너 때문이구나!’
아주 어여쁜 얼굴에 결연한 눈빛, 한눈에 보기에도 다른 여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건강하고 건장해 보이는 나하연의 모습에 호양공주와 화안공주가 눈을 빛냈다.
어느 간택전이든 여인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사는 이들은 꼭 있었으니. 황후와 두 공주는 이제까지 간택전 여인들이 누구를 흉내 내려 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 채녀라고 했나? 이전부터 황태자 전하와 인연이 있었다고?”
“예. 전하와 무학관에서 동고동락한 동기이자 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충직한 수하였습니다!”
“……그래요.”
동고동락, 생사고락.
심지어 제 입으로 충직하단다.
머릿속으로 야릇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언행이라 지적하고 싶었지만 또 틀린 사실은 하나도 없는지라, 결국 호양공주가 말문을 닫고 말았다.
“지난번 사달도 미리 알아차렸다고요?”
“황태자 전하께서 보증해 주신 바대로, 제 안력은 무림인들 중에도 매우 출중한 편입니다.”
확실치 않은 상황에 경솔한 행동은 삼가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었지만, 황태자의 보증이라니.
화안공주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두 공주가 나하연의 앞에서 입을 다물자,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경쟁자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패황권문이라는 배경에다 황태자와의 인연도 밀리는데, 윗전의 환심을 사는 일까지 밀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나하연과 함께 들었던 여인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무가의 여식으로 무공을 익히진 않았으나 무골을 타고났다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저도 충의패를 받은 명가의 여식으로, 비록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위급한 상황에선 전하를 위해 이 한 몸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요.”
여인들의 말에 입을 꾹 닫은 호양공주와 화안공주를 대신하여 황후가 짧게 답했다.
그때, 심사자도 아닌 나하연이 두 여인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일어나지 않을 일을 말씀하시는군요.”
“뭐, 뭐라고요?”
“황태자 전하는 현경의 고수입니다. 무림에서도 천하제일인이라 손에 꼽히는 분 중 하나인데,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지.”
“그래도 도, 독 같은…….”
“만독불침! 그건 황태자 전하께서 약관도 전에 이루셨던 경지입니다.”
“갑자기 날아드는 검이나 화살을…….”
“검과 화살에 강기를 싣지 않는 이상 전하의 피부에 상처도 낼 수 없을 거요.”
나하연이 한숨을 쉬며 두 여인의 반발을 가볍게 물리쳤다.
그러자 황후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하연에게 물었다.
“하면 나 채녀는 황태자 전하를 모심에 있어서 뭘 할 수 있는가?”
“전하의 수하로 있을 적에는 불철주야 경계를 섰고 당연히 지금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숙청단에 있으면서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저만 할 수 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호오, 그게 뭐죠?”
“저는 전하를 웃겨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전하께서는 무학관 시절부터 전하의 미모를 찬양하는 제 언어유희에 곧잘 웃으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전하를 가장 많이 웃겨 드린 이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나하연이 자신감 있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옳거니!”
동궁을 대표하여 초간택을 지켜보고 있던 동 태감이 무릎을 탁! 내리쳤다.
민망해서 웃어넘기는 것도 웃은 것이라면 나하연의 말에는 한 치도 틀린 것이 없었으니.
우리 전하가 웃는 일이라면 뭐든 좋았던 동 태감은 그때부터 재간택, 삼간택까지 나하연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하연의 초간택 또한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
* * *
이후, 재간택과 삼간택이 있기까지 모두 삼 년이 걸렸다.
초간택에서 간택전 여인들 중 삼분지 일을 궁에 남도록 선발했고, 재간택과 삼간택을 거쳐 품계를 받는 다섯 명의 후궁들이 정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던 간택전은 결과마저도 평화로웠으니.
처음부터 후보로 손에 꼽히던 원영농, 곽진진, 하후선, 사마령, 나하연이 각기 재인과 미인의 품계를 받았다.
“어차피 같은 품계인데, 왜 사마령과 나하연은 미인이고 나와 원영농, 곽진진은 재인이지?”
“후후, 솔직한 대답을 듣겠어?”
“아니! 우씨, 답하지 마!”
사마령이 볼을 부풀린 하후선을 귀엽게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원영농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봐야 네 말대로 모두 같은 품계인데, 뭘. 태자비 간택은 언제 할지도 모르고.”
“연화 황녀님이 황태비 간택은 이야기만 나와도 자지러지신다니까.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도 어쩌지 못하시는 분을 누가 막겠어.”
“에-휴.”
나하연은 물론이고 후궁들이 모두 한숨을 쉬었다.
설마 권력을 향한 가장 큰 걸림돌이 황실의 막둥이 황녀가 될 줄은 누구도 상상 못 했던 일이긴 했다.
“그래도 우리에게 좋은 일은 황태자비 간택이 따로 없다는 거야. 우리 중 누구든 먼저 황세손을 낳으면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니까.”
“글쎄.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에-휴.”
“황궁의 담을 넘더라도 황태자 전하의 이목을 속이는 건 쉽지 않다.”
“에? 나 미인,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다 같이 사이좋게 한숨을 쉬던 후궁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나하연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