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가득 채운 삶(3)
황궁은 모든 것이 권력에서 나온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황제와 얼마나 가까운가.
모든 권력은 결국 용혈에서 시작된다.
황제의 아들들은 적통이든 아니든 모두 같은 황자라 불리지만 황위를 다투다 죽는 경우가 많았고, 황위를 다툴 수 없는 딸들은 황녀와 공주, 군주, 옹주까지 명칭부터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황녀와 공주는 황실에서 내려진 내탕금과 궁인의 수, 노비와 곡출을 얻을 수 있는 땅 그리고 매주 받는 사소한 식자재의 질까지 달랐다. 군주와 옹주는 그들과도 비교가 불가했다.
그런 면에서 한연화는 완벽했다.
평화로운 제국.
성군으로 추앙받는 황제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 황녀.
심지어 그 어느 때보다 황권이 든든한 곳에서 완전하게 자리를 잡은 황태자와 동복의 어린 동생.
한연화는 마치 오로지 사랑만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그런 한연화가 좌절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이 아름다운 모후가 아닌 사나운 부황을 닮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아기인 줄 알았는데, 양주의 한 살배기 종질에게 오라비의 품을 빼앗겼을 때.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이럴 수가……!”
“황녀 마마!”
아이를 보고 휘청거리며 물러서는 한연화를 보며 경 상궁이 얼른 그녀를 붙잡았다.
“유, 유모 짱궁.”
“예, 마마.”
“쟤, 쟤는 왜 오라버니 닮았어?”
“네?”
“히잉, 힝. 째는 오라삐 닮아써-! 끄아아아아아앙!”
결국 이제까지 좌절했던 모든 순간들처럼 한연화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흐웅…….”
한연화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던지 침상의 아기가 잠에서 깰 듯 칭얼거리며 눈을 떴다.
뽀얀 얼굴에 오뚝한 코와 앙증맞은 입술.
미간을 찡그리며 살짝 뜬 눈은, 커다란 반달 같은 눈 속에 세상에서 가장 맑은 검은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랬다.
석 달 전 미인 사마령이 출산한 아들은 황태자인 진화를 쏙 빼닮았다.
* * *
“뱃놀이, 뱃놀이하자!”
“싫-어.”
“왜에에?”
“너랑은 안 할 거야. 베에! 명아, 가자!”
“…….”
예닐곱 살쯤 되었을 법한 어린 소녀가 네댓 살쯤 된 여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역시나 네댓 살쯤 되었을 법한 남자아이가 혼자 남아서 울상이 되었다.
송아지처럼 크고 어여쁜 눈이 촉촉하게 젖어 가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궁인들이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소녀의 입술이 고집스러운 팔자로 변했다.
“흥, 너는 혼자 놀아라!”
약을 올리는 듯한 소녀의 모습에 남자아이의 입술도 앵두를 문 듯 불퉁 튀어나왔다.
“시러. 명이 내 동생이야!”
남자아이가 소녀에게 발끈하듯 여아의 남은 손을 붙잡았다.
소녀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한태화, 너, 그 손 안 놔?”
“안 놔! 한연화는 심술쟁이야!”
“뭐? 이게 고모한테!”
“나눈 세손이다!”
그랬다.
소녀는 세상에 좌절했던 세 살 때부터 꾸준히 비뚤어진 한연화였고, 그녀에게 반항하는 남자아이는 진화를 쏙 빼닮은 아들이자 제국의 황세손인 한태화였다.
그리고 고집스러운 두 아이에게 양팔을 잡힌 아이는 한태명, 나하연의 딸이었다.
“명이 너 이리 와!”
“안 돼, 명이는 내 동생이야! 나랑 놀 꾸야!”
한태명은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한연화와 한태화 사이에서 느긋한 얼굴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연화가 서운한 얼굴로 한태명을 보았다.
“명이 너 이럴 거야?”
사실 한연화와 한태화의 힘의 차이는 너무 명확했다.
황제의 천력을 빼닮은 한연화가 진화의 미모만 빼닮은 한태화에게 힘으로 밀릴 리 없지 않은가.
힘의 대결이 순식간에 한연화에게 기울지 않은 것은 오로지 가운데에서 한태명이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치 노라. 아이 조아-해.”
한태명이 한연화나 한태화보다 어눌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잡아당겼다.
한연화와 한태화가 순식간에 가운데로 끌려와 억지로 얼굴을 마주했다.
“이. 이!”
한태화의 어여쁜 얼굴을 마주한 순간.
결국 한태화에게 화를 내지 못한 한연화가 괜히 한태명에게 골을 내었다.
“명이 너…… 불골편회에서 배신자야!”
“명이 배신자 아니야! 불골편회가 아니라 못땡긴따람회겠지! 명이는 안 못땡겨써!”
“너, 너, 너 지금 고모한테 못생겼다고 했어?”
“안 해써!”
“했잖아!”
“아니야!”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제국의 유일한 적통 황녀와 황세손의 다툼이라, 궁인들이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연화야. 태화. 태명아!”
“아뿌-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한태명이 한연화와 한태화를 제치고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한태화에 비해 말은 느렸지만 신체 능력은 한연화마저도 웃도는 한태명은, 자신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다.
“씨이. 씨잉, 씨…… 끄아아아아아아앙!”
“여, 연화야? 연화야, 왜 그러느냐!”
결국 성질머리가 폭발한 한연화의 울음이 터지고.
한태명을 안은 진화가 당황한 얼굴로 달려왔다.
“흐으으응!”
한연화는 조카들을 제치고 기어이 진화의 품을 차지했다.
금쪽같은 동생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에 놀란 진화가 한태명을 내려놓고 한연화를 안아 올렸기 때문이다.
한태화와 한태명이 섭섭한 얼굴로 진화의 옷자락을 잡았다.
하지만 귀가 울리도록 울어 대는 한연화를 달래느라 진화는 두 아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흐아아아앙! 태화도 오라버니 닮았고 명이도 나 귀비 닮았는데, 나만 뿌항 닮았어! 흐아아아앙!”
이제 다 커서 발음도 제법 정확해졌는데, 부황을 ‘뿌항’이라 하는 것만은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일부러 그러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 황궁에서 한연화에게 그걸 지적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우리 연화가 또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구나. 오라버니가 분명히 우리 연화도 예쁘다고 했는데. 우리 연화는 부황을 닮아도 예쁘게 닮았다고.”
“거짓말이야! 흐응, 태화가 나보고 못생겼다고 했어. 흐아아아앙!”
“응? 태화가?”
한연화의 고자질에 그제야 진화가 제 오른 다리에 붙은 한태화를 내려다보았다.
송아지 같은 눈망울이 진화의 눈과 마주치자, 금세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소자는, 소자는 안 해써요. 우에에에엥!”
“……히잉. 히이이잉!”
“태, 태화야? 태, 태명이 넌 왜?”
한태화가 울음을 터뜨리자, 한태명까지 울음을 터뜨리고.
“크아아아앙!”
세 명의 아이가 진화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리는 통에 당황한 진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화에겐 얼마 전 무찌른 서장의 이민족 정예병 이만 명보다 세 아이들이 더 어려운 모양이었다.
-동 태감, 모후와 태자비, 나 귀비를 모셔 오게. 어서!
다급한 진화가 전음으로 동 태감에게 도움을 구했다.
동 태감이 눈치껏 내관과 궁녀를 보냈지만, 표정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궁인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궁인들은 저 세 아이들이 모후가 온다 해도 진화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걸 확신했다.
오매불망 기다린 황궁의 진짜 보배가 아니던가.
“이런.”
“어, 어쩌죠, 어마마마?”
“역시…… 힘으로 뗄까요?”
“음, 조금 더 두자꾸나. 우리 태자가 저런 표정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니까. 후후후.”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도착한 황후나 사마령, 나하연 중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으니. 나하연 또한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나설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결국 진화는 세 아이들의 팔에 칭칭 감겨 있다가 황제가 찾는다는 명을 듣고 겨우 풀려났다.
“뿌항 나빠!”
“칫.”
“……나 갈래.”
진화가 가고.
세 아이들이 언제 울었냐는 듯 울음을 그치고 투덜대는 모습에, 황후와 사마령, 나하연은 물론 궁인들까지 고개를 저었다.
‘이 황궁에 순진한 사람은 황태자 전하밖에 없다는 걸, 오직 전하만 모르시지.’
‘그래서 다행이야.’
“후후후, 오랜만에 좋은 구경 했구나.”
황후의 말에 궁인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진화가 경희전에 있던 아들 한태화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저녁을 먹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던 한태화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태화야, 오늘 있었던 일로 많이 속상한 것이냐?”
“……아닙니다.”
“괜찮다, 말해 보거라.”
한 번도 제 자식을 가진다, 가족을 만든다는 상상을 해 본 적 없는 진화였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자연스럽게 가능해졌다.
처음 하는 아버지 노릇이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은 볼 때마다 신기하고 때때로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길을 헤맨 적도 없었다.
진화에게는 태양처럼 뜨겁게 사랑을 쏟아 주는 남궁경과 하늘처럼 거대하게 품어 주는 황제라는 좋은 아버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황태자로서 막중한 업무로 인해 남궁경처럼 다정한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는 미안함이 있었다.
특히 한태화는 궁 안팎에서 황세손을 향한 부담스러운 관심을 감당해야 하는 동시에, 여자인 한연화와 한태명과 어울리며 때때로 소외감을 느끼는 듯했기에 더 신경이 쓰이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어찌 된 일인지 궁인들에게 물어 두었다.
진화는 한태화가 저를 따돌리려 한 고모 한연화에 대한 섭섭함을 제게나마 풀어 놓길 바랐다.
한태화의 입에서 나온 말도 역시 그러한 것이었다.
“꼬모님이 자꾸 실타 해요.”
“그래, 그렇구나.”
“오늘도 뱃놀이가 실타 하고 명이만 데꼬갔어요.”
“이런. 명이만 데려가다니, 우리 태화가 섭섭했겠구나.”
진화는 한태화의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대꾸를 해 주며 아이에게 자신이 경청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한태화도 제 속에 있던 말을 술술 풀어 내었다.
“고모님은 나만 예쁘대요. 명이도 예쁜데.”
“응?”
“고모님만 할바마마 닮은 건 소자 탓이 아닌데! 소자는 잘못 없어요. 소자는 아바마마 닮아서 좋아요!”
“그, 그러냐?”
진화는 한태화의 말에 제 예상이 조금씩 벗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소자가 매일매일 져요!”
한태화가 정말로 속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는 것이 속상한 것이냐?”
따돌려지는 것이 속상한 것이 아니고? ……하는 말은 생략했다.
진화가 보기에도 그건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소자는 잘못 없는데 계속 져서 속상해요!”
“아까 운 것도 그 때문인 것이냐?”
“소자가 명이 손을 당겼으면 불골편회 이야기 안 했어요.”
“불골편회? ……그래, 그렇구나.”
진화는 점점 더 한태화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진지하게 말하는 한태화의 모습에 그저 맞장구를 치는 것뿐이었다.
“그, 그래서 우리 태화가 속상한 이유는 뭐……였지?”
“소자만 약해요! 고모도 힘이 세고 명이도 힘이 센데! 히잉……!”
다시 생각해도 서러움이 복받치는지, 한태화가 진화의 품에서 칭얼거렸다.
하지만 결국 결론은 힘이 약해서 서럽다는 것이라.
진화는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속상해하는 아이의 등을 조용히 토닥였다.
타고난 천력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있다면…….
“태화야, 무공을 익혀 보겠느냐?”
“무공요?”
진화의 물음에 한태화가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반짝거렸다.
“이번에 남궁세가에 큰할아버지의 생신 잔치를 하는 데에 같이 가자꾸나.”
“남궁! 하면 소자도 양주 할아부지처럼 될 수 있는 거예요?”
“타고난 천력은 어찌할 수 없지만 무공을 수련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 일단 남궁세가에 함께 가서 남궁세가의 무공을 익힐 수 있는지 허락을 구해 보자꾸나.”
“좋아요!”
순식간에 환해진 아들의 얼굴을 보며 진화가 흐뭇하게 웃었다.
해결 방법이 이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들이 남궁세가의 무공을 이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