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2. 나도 건물주다 - 3 >
“······.”
약속 장소는 그때 그 찻집이었다. 강미래는 이번에도 여전히 가면을 벗고 그를 맞이했고, 그랬기에 유일한이 내민 스태프를 마주하고 변화하는 그녀의 표정도 생생히 구경할 수 있었다.
“유일한 씨?”
“네.”
“대체······ 아니.”
강미래는 스태프를 두 손에서 놓지 못해 만지작거리다가는 이내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를 마주보았다. 가면으로 콧등부터 이마까지를 가리고 있는 유일한이었으나 그의 눈만은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다.
“정말 이번 의뢰를 받고 만든 물건인가요?”
“네. 강미래 씨가 원하는 옵션은 모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데요.”
“모두 들어갔죠. 모두······ 조금, 많이 지나치게.”
강미래는 한숨을 내쉬며 자기 머리를 감쌌다.
“이런 아티팩트를 만들어내는 장인과 연결이 있단 말인가요? 제 막연한 상상 따위보다 훨씬 대단한 분이네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해요.”
강미래가 아주 살짝,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유일한이 완벽 이상의 아티팩트를 가져와준 것에 대해 고마운 심정과 함께 약간의 질투심, 약간의 열등감, 조금 많은 호승심, 그리고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그 긴 세월 누구도 녹일 수 없었던 여제의 표정이 허무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제 능력이 아니라 장인의 능력이니, 제가 대단할 건 없는데요.”
“이 정도 되는 아티팩트를 만들어낼 장인과 연을 맺고 계시는 시점에서 이미 터무니없이 대단합니다. 당신 자신이 다룰 무기도 아니고, 타인이 가지게 될 무기의 의뢰까지 받을 정도이니까요. 당신은 정말······ 정말.”
강미래가 눈을 감았다. 울컥하는 심정을 참기 위해 무던 애를 쓰더니, 곧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에 성공했는지 제법 침착해져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맹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선, 유일한 씨가 하고 계실지도 모르는 착각을 수정해야겠어요.”
“착각?”
“당신은 이 무기의 가격이 어느 정도이리라 생각하시나요?”
“한 200······ 400억?”
200억이라고 말하려다 말고 강미래의 눈썹이 꿈틀거리기에 잽싸게 두 배로 가격을 뻥튀기한 유일한이었으나, 강미래는 얼음가면을 뒤집어 쓴 것 같이 굳은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지난 십 년간, 74억의 지구인은 제각기 다른 이세계로 흩어져 무수한 일을 겪었고, 개중 일부는 정말 대단한 운으로 굉장한 아티팩트를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 이 스태프를 뛰어넘는 아티팩트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지구인들의 능력이 대단치 못해서일까요?”
“······혹시 이 정도 수준의 아티팩트가 이세계에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없지는 않겠지요. 수십 개는 있겠지요.”
그 많은 세상에 걸쳐 수십 개. 그것이 지구인의 손에 들어올 리가 없다. 지금 강미래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건의 가격이 어떻게 정해질까요.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정해지겠지요?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이 스태프의 가격은 얼마일까요?”
“제 맘대로겠네요.”
“맞아요.”
여제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스태프를 유일한 쪽으로 밀어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몸짓이었다.
“그러니 저는 이것을 살 수 없습니다. 제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렸네요.”
“흠.”
조금 정도는 약아빠져도 될 텐데, 하고 유일한은 생각했다.
유일한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다. 자신의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도 알고, 이 아티팩트가 어마어마한 능력을 품고 있다는 것도 안다. 강미래가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이 정도 물건을 턱턱 구매할 재력은 없을 터이다.
하지만 그가 강미래에게 무구를 판매하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돈은 그래봐야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보상에 불과하다. 눈 한 번 감고 받아들여도 될 텐데 강미래는 실로 엄격했다.
타인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한, 부정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강철 같은 여자. 남녀 문제를 떠나 인간으로서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천억이면 어때요.”
“그 정도로는 턱도 없습니다.”
“천억에 드리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거절합니다.”
강미래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녀의 불쾌한 표정을 보고 유일한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아까 제 능력에 대한 얘기를 하셨는데요.”
“그랬습니다. 그것과 이 무기에 무슨 상관이 있죠?”
“제가 대단한 장인과 인맥이 있는 것이 능력이라면, 강미래 씨가 제게 이 무기를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게 된 것도 강미래 씨의 능력이 아닌가요?”
“그게 어째서 제 능력이죠?”
“강미래 씨는 레벨이 낮았던 때에도 충분히 섀도우 레오파드에게 치명타를 줄 만큼 강력한 마법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의 무기를 의뢰받을 생각을 했던 것도 그 광경을 보고, 당신이라면 충분히 더 좋은 무기를 다룰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 무기를 얻게 된 셈 아닐까요?”
유일한의 이어지는 말에 비로소 강미래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자신 못지않게 유일한 역시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열등감이 사그라진 탓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새침한 표정으로 유일한에게 따졌다.
“조금 억지 같은데요. 혹시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제게 꼭 이 무기를 팔아야만 하는 사정이라도 있습니까?”
요게 안 통하네.
유일한은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된 이상 그의 속내를 조금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강미래 씨가 더 빨리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어째서?”
“지금 지구인들이 너무 약해서요. 이대로 세계가 멸망할까봐.”
“······.”
강미래는 말을 잃고 말았다. 터무니없이 오만한 그 말에 뭐라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구쳤지만 섀도우 레오파드와의 전투 당시 유일한이 보여주었던 그 믿기지 않는 힘을 생각하면 절로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지구 상태가 심상치 않은 건 아시죠? 지구가 빠르게 바뀌는 것만도 짜증나 죽겠는데. 외부 요인까지 끼어들고 있어요. 믿을 건 지구인뿐인데 다들 약해빠졌고. 그런데 강미래 씨는 무기 문제만 해결되면 충분히 강해질 것 같거든요. 그래서 강미래 씨한테 연락한 겁니다.”
“푸후.”
강미래가 기묘한 숨을 토해냈다. 파문이라도 수련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유일한의 착각이었다. 다음 순간 강미래가 크게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푸, 푸후후후.”
“괜찮아요?”
“푸후흐흐후후후후!”
괜찮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여자가 미친 것인가, 이대로 놔두고 도망가야 하나 온갖 생각을 하던 찰나 강미래가 신기하게도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곤 스태프 위에 손을 얹어 다시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알았어요. 천억에 살게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존심을 꺾고, 순순히 호의를 받겠습니다.”
“정말이죠?”
“단. 이거 하난 기억해두세요.”
강미래가 스태프를 수습하며 눈에서 뇌전을 튀겨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어, 유일한은 가까스로 그녀가 화를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필코 당신보다 강해질 거예요. 반드시 당신보다 더, 훨씬 더 강해져서, 다신 저한테 그런 소리 못 하게 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당신이 필사적으로 절 따라잡아야 할 겁니다. 알아들으셨어요?”
“네, 뭐 상관없어요.”
강미래에겐 일생일대의 선언인 모양이었지만, 유일한은 그녀의 발언에 환영을 하다못해 양손 양발 다 들어 만세라도 해줄 수 있었다. 강미래가 강해져서 유일한에게 귀찮은 일 없이 지구가 안전해진다면 얼마나 편할까!
유일한과 강미래는 추구하는 바가 애초에 달랐다. 한 사람은 펄펄 끓어올라도 다른 한 사람은 바닥이 드러난 김치찌개가 담긴 냄비처럼 차갑고 싸늘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처음으로, 유일한은 강미래를 자극하는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유일한은 이 사실은 몰랐지만, 그저 거래가 성사된 것이 기쁜 마음에 밝게 웃었다.
그리고 크로스백에서 로브를 꺼내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면 이제 로브도 한 번 보실래요? 이건 다행히도 유니크에서 멈췄거든요.”
“······.”
강미래는 호기롭게 선언한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 있다가 얌전히 한 손을 뻗어 유일한이 꺼내든 로브의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곤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한데 친구 좀 불러도 될까요. 제가 돈이 좀 부족해서.”
“부르세요.”
유일한이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부른다는 친구가 누군지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불과 10분 만에 나타난 것이 바로 나유나였다.
“어째서!”
“아, 일한이다아!”
“친근하게 부르지 마시라고요.”
유일한은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나유나에게 질색하며 대꾸했다. 나유나와 강미래 사이에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돈을 빌린다고 부르는 친구가 그녀였을 줄이야!
유일한이 암담해져 있는 사이 강미래는 유일한에게 접촉하려는 나유나를 사정없이 끌어당겨 자신의 곁에 앉혔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 나유나.”
“그런데 미래야아, 내가 말했을 땐 유일한 씨 모른다고 했잖아.”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거짓마알. 혹시 둘이 사귀어? 그럼 안 되는데.”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강미래가 말을 반복하며 한 손에 뇌전을 만들어내자 나유나가 헤헤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강미래는 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고, 나유나는 단번에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는 스스로도 스태프와 로브의 능력을 확인했다.
그리고 눈으로 별빛을 뿜어내며 유일한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외쳤다.
“내 것도 만들어주세요!”
“그러니까 말했잖아. 신석 구해오라고.”
“우우, 알았어. 그 퀘스트 빡센데.”
나유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꼬맹이처럼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민했다. 그리곤 한다는 말이 이것이었다.
“천오백 억에 빌딩 하나 얹으면 그럭저럭 선금 취급은 되지 않을까?”
“어디에 있는 걸로?”
“강남 안전강화구역에 울 할아버지가 아끼는 거 하나 있는데 뽀뽀 한 번 해드리면 주실 거야.”
“아, 그거면 확실히.”
정신이 아득해지는 대화를 나누는 강미래와 나유나의 모습을 보며 유일한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처음부터 자신과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귀환자와 낙오자, 딱 떨어지고 좋지 않은가. 지상최강 다이아몬드 수저에 외모까지 완벽하고 거기에 능력마저 좋다는 사실이 유일한을 분통 터지게 만들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내 꺼랑 하진 오빠 것두 만들어준다고 했죠? 그럼 더 얹어야 하는데.”
“그 정도로 됐어요. 장사하려는 거 아니니까.”
“진짜 잘 사나부다. 난 우리 집이 한국에서 제일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니거든요.”
거래는 깔끔하게 끝났다.
20대 여자 둘의 전화 몇 번으로 천오백 억이 입금된 계좌가 만들어졌고, 그의 소유가 될 건물은 앞으로 차차 인수받기로 했다. 이걸로 끝났으리라 생각했는데 강미래가 뿌듯한 얼굴로 스태프를 끌어안으며 결정타를 날렸다.
“세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쪽에서 알아서 해둘 테니까.”
“······그렇군요.”
레프트 훅 라이트 훅에 스트레이트에 피니시까지 완벽하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빡친다. 그것을 지켜보던 에르타마저 순간적으로 유일한의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길 정도였다.
그러나 유일한은 그냥,
웃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거래가 일단락된 후, 유일한이 자리를 떠나고 나자 큰 방에는 강미래와 나유나만이 남았다. 강미래는 하염없이 스태프를 붙들고 있었고, 나유나는 유일한이 떠나간 자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유나가 물었다.
“일한이 좋아해? 드디어 첫사랑이야?”
“천만에.”
강미래는 즉시 부정했다.
“그 사람은 내 라이벌이야. 언젠가 반드시 뛰어넘고 말겠어.”
“그렇구나아. 하긴,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긴 한데 조금 더 지켜봐야 될 것 같긴 해.”
“······넌 그에게 흥미가 있어?”
“조그음? 할아버지가 말했던 손주사위 조건은 충족하는 것 같아서. 음, 아주 조금이지만!”
“그래.”
강미래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유나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신이 주문한 커피를 호호 불어가며 마시기 시작했지만, 강미래는 도저히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유나는 이전부터 이랬다. 그녀의 심중에 깃든 것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안 돼, 유나야.’
강미래는 생각했다.
딱히 그녀가 나유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유일한을 좋아하다니, 그저 두 번 전투를 같이 하고, 사무적인 관계로 엮었을 뿐인 그에게 감정이 생길 수는 없다고 그녀는 믿었으니까.
하지만 유일한은 강미래가 여태껏 만난 그 누구보다도 재능이 넘치는 남자다. 그 몸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능력을 품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그 앞으로 나아가며,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담담한 태도나 행동거지 전부에 타고난 여유가 묻어난다.
과하지 않은 자신감, 그에 걸맞은 실력, 매력까지. 그렇기에 비로소 강미래가 정복할 가치가 있는 남자다.
‘내게 어울리는 남자야. 어쩌면 내게는 과분한 남자일지도 몰라.’
강미래는 유일한이 얻고 싶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가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사람에게 느낀 소유욕. 피는 못 속인다고 강하진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강하진이나 나유나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 같은 가족관계를 제외한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모두 거래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녀는 유일한을 얻기 위해 자신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정당한 거래가 될 수 있다. 부족하다고 한다면 자신의 가치를 더욱 더 끌어올려서라도 그를 얻을 생각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성장해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받아들이게 만들고 말 것이다.
절대로, 나유나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물론 가장 강한 연적은 나유나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강미래가 알 수는 없었다.
< Chapter 12. 나도 건물주다 -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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