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5. 너, 나, 남남 - 14 >
드래곤들의 혼란을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끌고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에도 한도는 있는 법. 놈들의 숫자가 제법 줄어든 상황에서 경각심을 갖게 된 드래곤들은 전장에서 한 발 물러서서 상황을 보게 되었고, 정신없이 움직이며 드래곤들을 몰아치는 유일한에게 비로소 하나의 약점이 드러났음을 깨달았다.
기척. 유일한은 자신이 깔아둔 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가장 강한 공격 수단인 은신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일부 드래곤들은 전략을 수정했다. 유일한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마법으로 그를 저격했다. 그때부터 유일한의 몸에 다시금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유일한은 여태까지만도 많이 버텼다고 생각했다. 드래곤들이 그의 생각보다 더 멍청했던 덕분에 본전을 화끈히 뽑았으니까!
그 와중 3차 클래스 용종들은 무식하게도 지면에 다이빙을 해 대지를 뒤집어엎는 식으로 기둥을 뽑아내려 들었지만 유일한은 그런 놈들은 그냥 무시해버렸다. 3차 클래스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기둥과 작살이라면 유일한이 애써서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큭,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데 어째서 저렇게 잘 버티는 것이지!]
[일단 놈을 얼려야, 제길! 어째서 난 불꽃의 힘을 타고났는가!]
때가 왔다. 작살도 쓸 만큼 썼고, 드래곤들이 작살에 붙잡힌 동료들을 버려두고 유일한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이젠 유일한 또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유일한은 판단을 끝낸 즉시 지상을 박차 허공으로 떠올랐다. 지상에 드래곤들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최대한 공중의 드래곤의 숫자를 줄여놓을 셈이었다.
[이젠 무엇이든 알 바 아니다, 뒈져라!]
거기에 아직 멀쩡한 4차 클래스 드래곤 한 마리가 돌격해왔다. 온갖 강화마법과 보조마법으로 떡칠한 채 몸으로 들이받아 오는 드래곤의 위용은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유일한은 슬쩍 뒤를 한 번 확인한 후 인벤토리에서 파일 벙커 하나를 꺼내들고는, 놈이 유일한의 지척에 도달해 입을 쩍 벌린 순간 놈의 혓바닥에 파일 벙커를 조준하며 그대로 쏴버렸다!
[크리티컬 히트!]
[캬아아아아악!]
오직 한 발에만 모든 것을 담아낸 파일 벙커의 위력은 가히 절륜했다. 놈의 방어마법과 강화마법을 모두 뚫어버리고 단숨에 혓바닥과 아래턱을 꿰어버린 것. 유일한이 타이밍 좋게 탄환에 무게전이까지 해주자 드래곤은 알아서 추락했다.
반면 유일한은 허공에서 파일 벙커를 발사한 반동으로 인해 재도약을 할 필요도 없이 반대방향으로 튕겨 나가며 새로운 파일 벙커를 꺼내어 들었다. 어차피 사방에 깔린 것이 드래곤이고 용종이었다.
“흐.”
[공격무기와 추진기관으로 동시에 써먹는군요.]
“흡!”
평범한 인간은, 그리고 전투능력이 뛰어난 인간이라고 해도 대개 여태까지 살아온 환경에 지배되기 마련이다.
갑자기 하늘에 내던져지면 당황할 수밖에 없고, 제대로 된 발판도 없고 집중하기도 힘드니 검을 휘두르든, 총을 쏘든 제대로 된 실력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날개가 달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적과 전투를 벌인다면 크게 당하기 십상인 법.
그러나 유일한은 다레우 대륙에 와서부터 계속해서 공중전을 벌인 끝에, 결국 전후좌우상하를 비롯한 전 방위의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다수의 적들을 상대하는 요령까지 손에 넣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날개도 없으면서, 재도약과 파일 벙커의 반동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다, 붙잡아라!]
[크화아아아아악!]
드래곤 중 일부는 입을 열어 거센 불꽃을 토해내며 유일한을 공격했다. 이쯤되면 그들 역시 유일한이 불꽃에 강하다는 것을 깨달을 법 한데, 그들의 속성부터가 불꽃에 기반하고 있는 만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꽃을 쏘아내고 마는 것이다.
유일한은 세상을 전부 삼킬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 속으로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고통도 하도 많이 겪다 보니 이젠 익숙해진 상황.
그의 눈은 쏟아지는 불꽃 속에서도 예리하게 빛나며 크게 벌린 드래곤의 입천장을 직시하고 있었다.
“흡!”
유일한이 불꽃 속에서 재도약을 했다. 불꽃을 휘감으며 솟구친 유일한은 파일 벙커를 거꾸로 쥐고 드래곤의 입천장에 냅다 꽂아버렸다.
[캬아아아!]
“이것도 먹어라!”
이 좋은 기회에 공격을 한 번만 하고 물러나는 것도 섭섭하다. 유일한은 놈의 뻥 뚫린 입천장과 혓바닥에 수류탄 몇 개 던져주고는 잽싸게 그 안을 뛰쳐나왔다.
[이쪽이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다른 동족이 죽게 된다. 퍼부어라!]
그러나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른 드래곤들이 일제히 마법을 발동시켰다. 이 상황에선 유일한보다 그들의 아군인 드래곤이 더 많은 타격을 입을 텐데, 주위에서 동료들이 하도 죽어가니 두 눈이 돌아간 드래곤들이 어떻게든 유일한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젠 파멸마군이고 자시고 다 상관없다. 놈들에게 있어 유일한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죽여야 할 원수!
놈들이 점점 더 많은 마력을 동원해 끔찍한 마법을 구사하는 것만 봐도 상황은 분명했다. 프렌들리 파이어에 의해 애꿎은 3차 클래스의 용종들만 죽어나갔다.
[유일한, 사방에서 몰려와요!]
“유탄 안 맞게 조심해라.”
방패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만든 것. 그는 원격 수납 기능을 이용해 자신을 완벽히 감싸는 형태로 방패 수백 개를 동시에 불러냈다.
콩 수억 개를 여러 개의 팬으로 번갈아가며 볶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무수하고 다양한 마법이 수백 개의 방패를 동시에 두드리며 유일한의 고막을 테러했다. 직접 맞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만으로 감내해야 했다.
비록 방패들이 허공에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으나, 정확히 마법이 날아드는 순간 불러낸 방패는 훌륭히 자신의 소임을 다 하고 크로스백으로 귀환했다. 물론 수십이 넘는 마법의 피해를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기에 유일한 역시 다급히 치어팩을 꺼내 물어야했지만.
[브레스를 마시고 있습니다. 체력이 빠른 속도로 차오르며 휴식 에너지가 보충됩니다. 마력이 조금씩 회복됩니다. 전투에 쓰이는 모든 감각이 예리해집니다.]
수백 개의 방패가 모두 사라지고 유일한이 뽀송뽀송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내자 드래곤들은 지극히 분노했다.
[이, 괴물 자식 같으니!]
[이놈을 살려둘 순 없어. 그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선후가 틀렸어, 다른 무엇보다도 이놈을 가장 먼저 없애야 해!]
놈들의 반응을 보며 유일한은 히죽 웃었다.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드래곤들마저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거 아무래도 유일한에게는 도발의 재능도 있었던 모양이다.
유일한은 재도약을 펼쳐 개중 한 마리에게 접근하며 새로운 파일 벙커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아직 유일한의 무기는 많이 남아 있다. 놈들의 피로 만든 술이 유일한의 체력을 끝없이 북돋워주고 있다.
“깨닫는 게 너무 늦었어, 친구들. 어디 한 번 열심히 해보라구.”
유일한이 가까스로 지면에 발을 딛었을 땐 이미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드래곤의 불꽃 때문도, 그들이 흘리는 피 때문도 아니다. 시간이 흘러 석양이 지고 있었다.
유일한은 마지막으로 죽은 드래곤의 시체까지 모두 크로스백에 수납하며 힐끗, 망막 위로 하나의 정보를 불러냈다.
[4차 클래스 죽이기 1,000/1,000]
“후, 가뿐했다.”
[그것 참 퍽이나 가뿐하셨겠어요.]
[정말 해내셨군요.]
에르타가 비웃듯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레타는 진심어린 감탄을 표했다. 유일한은 피식 웃으며 치어팩을 빨았다. 브레스가 아닌 블러드링크였다.
“브레스는 체력도 회복시켜주면서 휴식 에너지까지 회복시켜줘서 좋긴 한데 취기가 돌아서 문제야.”
[어느 정도 상상 가능했던 부작용이네요.]
체력을 완벽히 채우고, 그 자리에서 무구의 간이 수리까지 완벽히 끝냈다. 해변가에는 용종의 시체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파일 벙커의 잔해들이 나뒹굴고, 드래곤 잃은 작살과 화살 잃은 발리스타만이 흉악하게 석양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
이러다 크로스백이 언젠가 터지는 것 아닐까 불안했지만 에르타가 지구에만 돌아가면 천사 백 명을 불러서라도 다시 확장을 해준다는 말을 믿고 버텨보기로 했다.
그러면 이제 미뤄두었던 선물상자를 뜯어볼 시간이다.
[전직 미션 완료! 블레이징 리퍼로 전직하시겠습니까?]
“드디어 전직이구나.”
[정말 길었지요.]
[전직이라, 그렇군요.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역시 터무니없이 빠르세요.]
유일한은 레타와의 만남과 전투에서 2차 클래스를 달성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3차 클래스를 획득한다니 그녀가 기가 막혀할 만도 했다.
[아직 준비가 완벽히 되지도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그 뒤를 잇는 말은 어째 뭔가가 이상했다. 유일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가 어쩔 수 없는데?”
[당신이 3차 클래스를 얻어 저와 동등한 격을 얻게 되면, 제 마법이 성공할 확률이 한없이 낮아질 테니까요.]
유일한의 눈가가 꿈틀했다. 그것은 실로 불길한 울림이었다.
“마법?”
[그래요, 마법.]
레타의 말이 떨어진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화했다.
유일한의 두 발이 딛고 있던 대지를 시작하여 사방으로 푸른빛이 뻗어가기 시작했다. 작은 섬 너머, 바다 표면 위로 넘실거리는 푸른빛은 그 끝을 모르고 나아갔다. 어쩌면 그것은 대륙의 끝까지 뻗어갈 지도 모른다.
사방을 뒤덮은 푸른빛 속에서 알아보기 힘든 기하학적인 문양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유일한은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설마 이건 마법진이냐?”
[그렇습니다. 고대 제국이 대륙 전역에 설치한 마법진. 엘프 마법의 정수라고 부를 수 있는 실로 위대한 마법진이죠. 여태까지 당신이 고작 공간이동의 용도로만 사용해온 마법진이기도 합니다.]
고작, 공간이동이라. 유일한은 씁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다른 용도가 있었구나.”
[엘프 제국의 황제는 이 마법진을 이용해 영생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늙은 육신을 버리고, 영혼만을 타인의 몸에 옮기는 영혼 전이 마법으로 말이죠.]
유일한은 그것이 어쩐지 라스트보스나 할 법한 사악한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희생자가 될 뻔한 저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를 처치할 수 있었고, 마법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드래곤의 준동으로 제국이 혼란스러운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써먹을 수 없었다. 드래곤의 힘은 지나치게 강대했고, 영혼 전이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더욱 높은 격을 지닌 상대로는 발동하기 힘들었으니까.
마지막 순간 그녀는 드래곤을 대상으로 펼친 영혼 전이에 실패한 대가로 브레이커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녀는 뛰어난 사신이었고, 조각 나 소멸되어야 할 스스로의 영혼을 붙잡아 자신의 육신과 아티팩트에 나누어 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드디어 희생자를 만났다. 유일한이라는 이름의, 더없이 뛰어난 자질을 지닌 희생자를.
그러니까 여태까지 그녀가 해온 말은, 드래곤이 원수라는 고백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엇 하나 빠짐없이 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유일한은 팔을 들어보려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의사만으로 전직을 진행하려 했지만, 아무리 의지를 발해도 망막 위로 문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육신이 그의 통제를 듣지 않는 빌어먹을 일이 발생한 것이다.
[당신은 지극히 뛰어나지만, 너무 긴장감이 없습니다. 그저 즐기는 데에만 치중하다가 자신의 목숨마저 깜박 잃어버릴 것만 같아요.]
레타가 냉소했다.
[전 사신이었습니다. 그것도 영혼의 힘을 다루는 데에 특화된 사신이었죠. 그러니 아티팩트에 제 영혼을 나누어 담기도 하고, 사념밖에 안 남은 몸뚱이로 엘프의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도 있었던 겁니다. 깨닫지 못하셨나요? 제가 너무나 자유롭다는 사실을? 어째서 생각하지 못하셨나요? 제가 반역의 의지를 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가 널 믿고 싶었다고 하면 너무 진부하냐?”
이젠 입을 여는 것도 조금씩 힘겨웠다. 그야 당연하다. 대륙에 설치된 거대한 마법진이 지금 이 순간, 유일한을 속박하는 것을 위해서만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실로 거대한 힘이었다. 문득 생각하건대, 어쩌면 유일한이 마법진을 발동하기 위해 소모한 마석도 온전히 소모된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되어 마법진에 비축되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당신의 혼 속에 머무르는 제게 겁도 없이 생명의 힘을 퍼주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사고를 뚜렷하게 만들고, 제게 남은 힘을 강화시켰습니다.
아아, 당신은 엘프의 마법진이 사념밖에 남지 않은 저를! 당신이 아닌 저를 오롯한 주인으로 인식했을 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했습니다.]
듣고 보면 확실히 그렇다. 고작해야 영혼 조각, 생명의 힘을 먹어치웠을 뿐 겉으로 드러나지도 못하는 사념에 불과한 레타 카르이하는 엘프의 마법진의 주인으로서 그 힘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마법진을 이용해 유일한의 의사에 반하는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마법진에 대해 늘어놓는 예상을 들으며 웃음을 참느라 아주 힘들었답니다. 미래예지? 드래곤들이 뭐가 어쨌다고요? 틀렸어요! 이 마법진은 엘프가 아닌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것. 앞으로 우리 종족의 번영을 이끌 위대한 마법진입니다!]
“큭.”
유일한을 구속하던 마법진의 힘이 이내 그의 전신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일한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마나가 그의 육신을, 정신을 좀먹었다.
[당신의 육신은 제가 갖겠습니다. 파멸마군 소속의 드래곤들을 모두 처치하고, 석양의 화원과 동맹을 맺어 다시금 다레우 대륙을 멋지게 발전시키겠어요.]
레타가 웃었다. 시작도 전부터 레타의 혼이 유일한의 혼 속에 깃들어 있었던 만큼, 영혼 전이 마법은 이 이상은 불가능할 만큼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이미 반쯤 유일한의 감각을 빼앗기 시작해, 유일한이 웃지 않았는데도 절로 입 꼬리가 비틀리고 있었다.
[앞으로는 남을 쉽게 믿지 않도록 하세요. 아, 어차피 영혼이 소멸될 테니 이제와 깨달아봤자 소용이 없겠네요.]
[글쎄요, 저는.]
여태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에르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유일한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생각해본다면 지극히 이상한 일이지만 레타는 너무 고양되어 있는 나머지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에르타는 여전히 유일한의 머리 위에 앉아 있었는데, 어째 그 표정은 살짝 뿌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에게 그걸 가르쳐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뭐라구요?]
에르타가 말하고, 레타가 어이없어하며 코웃음을 치던 그 순간.
유일한이 힘겹게 입을 열어 말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
그가 속삭이듯 말한 그 순간, 여태까지 그의 내부에서 잘 자고 있던 사념 하나가 눈을 떴다.
생명의 힘을 흡수하며, 마법진을 이용하며 능력을 키워 강해진 레타가 깜박 그 존재조차 잊고 있던 사념이.
“일어났으면, 물어죽여.”
[크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찰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두 달간.
‘레타는 들어올 수 없었던’ 결계 속에서 유일한이 이제껏 얻어온 '모든' 용종의 생명의 힘과 사념을 먹어치워 성장한 오로치가 힘차게 포효했다.
[오로치······어떻게? 겨, 결계! 당신, 알고 있었군요! 날 믿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흐.”
레타의 절규에 유일한이 피식 웃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이번엔 레타가 움직인 것이 아니다. 레타의 사념이 오로치에게 짓눌리는 과정에서 육체의 통제권을 제법 되찾은 유일한이 웃은 것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안 그래?”
[크루루루루오오오오오!]
믿고 싶었으나 끝내 믿을 수 없었던 상대를 대비해 준비한 마지막 보험이, 드디어 제 일을 하기 시작했다.
< Chapter 15. 너, 나, 남남 - 1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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