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23. 내가 열면 지옥의 문 - 5 >
유일한이 변태 진동마귀를 퇴치하고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까지도 그의 권속들은 푹 자고만 있었다. 2년 9개월 동안 버려진 세상에서 버티면서 잘 수 있을 때 오래 자고 움직여야 할 때 빡세게 움직이는 쪽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중간에 몬스터가 수천 마리 정도 저택을 침입하려던 흔적이 있었지만, 자동요격 시스템이 깔끔하게 놈들을 청소한 모양이었다.
자동요격이기에 비록 유일한의 경험치는 올라가지 않지만 그만큼 온전히 비터스윗 페르소나의 성장이 빨라질 터. 굉장히 만족스러운 일이다.
“좋아, 훌륭해. 빨리 씻고 자야지.”
유일한은 저택의 완벽한 방비 태세를 확인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강남의 아파트와는 달리 이곳에선 언제든 마음을 놓고 잘 수 있으니 말이다.
여태까지는 잘 때도 한 줄기 긴장의 끈을 붙잡고 놓지 않았기에 완벽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 저택 안에서라면 유일한은 휴식 마스터의 모든 힘을 다 해 전력으로 잘 수 있었다.
[그게 전력이 아니었단 말이야? 바보 같은!]
[일일이 진지하게 맞춰주지 마라, 리에라.]
천사들의 언제나와 같은 만담을 들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서재 쪽에서 기운이 느껴졌다. 서재 안의 물건은 유일한의 힘이 아니라면 누구도 움직일 수 없을 텐데 뭐하러?
[어서 와요, 유일한.]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재 내부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유일한이 2주 동안 앉아서 저택 디펜스를 하는 데 쓰였던 검은 가죽 의자에 기대어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유미르와, 유일한의 기척을 눈치 채곤 서재 입구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에르타의 모습이 있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혹시 정말로 아무도 찾지 못하던 곳에 4차 클래스가 득실거리고 있었나요?]
에르타의 지당한 질문에 다시 머리가 아파진 유일한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4차 클래스는 한 마리. 골 때리는 일이 있긴 있었는데 리에라가 설명해줄 거야. 그보다 미르는 왜 여기서 잠들어 있는 거야?”
[중간에 배가 고파서 깨더니 주방의 대형 냉장고 하나 가득 차 있던 드래곤 고기를 퍼펙트 클리어하고는, 당신의 흔적을 찾아 저택을 떠돌더니 끝내 서재에 도착해서 의자를 붙잡고 잠들었어요.]
유일한이 미르를 안아들자 녀석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원래는 깨우려고 했지만 너무 기분 좋게 자고 있으니 그럴 마음도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유일한까지 괜시리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나도 한숨 자고 일해야겠다.”
[그대는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스무 날 이상을 버텼다. 그 상태에서 다시 뭔가를 하려고 했다면 내가 그대를 기절시켰을 것이다.]
[나두 같이 잘래!]
[당신은 일로 와요.]
유일한은 잠시 유미르를 천사들에게 맡기고 샤워를 한 후, 녀석을 돌려받아 그대로 침대로 다이빙했다. 휴식 스킬의 마스터답게 유일한이 침대에 누운 지 1초 만에 잠들고 나자 천사들은 그 사이 밀린 업무를 보아야 했다.
[지구 일이 더 복잡해지겠는데······.]
[지금 지구에 이세계와 연결된 채 유지되고 있는 게이트가 있나? 그런 게이트가 있다면 적어도 천사 한 명은 붙여놓아야 하는데.]
[아뇨, 천사에게만 맡기는 것은 안일한 일이죠. 저번 일로도 배신자를 전부 소탕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인간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해요. 하늘 퀘스트를 내야죠.]
[하늘의 군단의 힘이 많이 소모되겠네. 가뜩이나 일한이 때문에 기둥 뿌리 뽑고 있는데.]
[감수해야 해요. 더 이상 지구는 하위 세계 하나로 취급할 시기를 벗어났으니까.]
[그래, 제법 강경하게 나가야겠어. 지구의 예비 권역 지정을 건의해야겠군.]
[그렇게까지?]
어쩌다 보니 유일한에게 6차 클래스 천사 두 명이 딸려 있어, 세 명 사이에 일어나는 회의가 지구에 제법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다녀와.]
[빨리 마무리하고 오겠다.]
셋이 의견의 일치를 본 후 스피에라가 대표로 하늘로 떠났다. 그녀라면 하늘의 군단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터, 리에라도 에르타도 불만없이 그녀를 보냈다.
[갔네.]
[갔군요.]
리에라와 에르타는 그녀를 전송하고 나서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았지만, 곧 무언의 합의를 마치곤 타이밍을 맞추어 섬전과 같은 속도로 각자의 한쪽 손을 내밀었다.
리에라가 주먹, 에르타가 보였다.
[후······.]
에르타가 실로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자니 리에라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외쳤다.
[삼세판 하자!]
[승부는 언제나 단판입니다.]
에르타의 의지는 철벽과 같았다. 리에라가 울상을 지으며 유일한의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유미르 쪽에 눕자, 에르타는 조심스럽게 유일한 쪽에 누우며 그의 옷깃을 살짝 붙잡았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네요.]
[흥, 오늘만 봐줬다.]
리에라는 유일한의 옷깃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 뿌듯함을 느끼는 에르타를 복잡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내 수마를 이기지 못해 잠에 빠지고 말았다. 기분 좋게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었는지 에르타 역시 금세 잠들고 말았다.
유일한의 권속들 역시 여전히 깨어나지도 않고 잘 잤다. 근방에서 생성되는 몬스터들은 모두 저택으로 몰려들고 있었으나, 자동요격에 의해 저택 본채에는 미동조차 주지 못하고 정리되었다.
그로써 저택 전체가 고요한 잠에 빠졌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전 세계가 처절하게 이어진 몇 주간의 전투 끝에 남은 것들의 뒤처리는 물론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게이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 저택만이 그런 혼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다녀왔다. 어째서 저택이 이렇게 조용······ 이런.]
하늘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지금 이 순간부터 지구에 적용될 새로운 규칙과 함께 돌아온 스피에라는 리에라와 에르타마저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어이가 없었으나, 곧 그들이 고생할 만큼 했다는 생각을 하곤 잠시 더 그러고 있도록 놔두었다.
이제 곧 지금까지보다 더한 소란이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한편 그 시각, 뇌신 클랜 마스터 강미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지구가 아닌 이세계 란파스에서, 자신도 무시할 수 없는 높은 신분의 인물에게 한 가지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거래 말입니까.”
“지구의 자원을 말하는 게 아냐.”
대제국 팔라디아의 1황녀, 이르마 안 일르타가 대답했다.
“다른 무수한 세상으로의 통로가 열린다며? 미래, 너도 알겠지만 모든 세상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모두 조금씩 다른 자원을 지니고 있어. 물론 몬스터도 다 다르지. 그것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린 여태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기록을 얻을 수 있을 테고······ 분명 그건 정체되어 있던 우리 세상의 마법을 발달시킬 좋은 기회가 되어줄 거야.”
“위험합니다. 소용돌이가 언제 생겨날 지도 모르고, 제가 이곳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만들어 제국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넘어온다고 해도 혹 무엇인가의 착오로 인해 그 게이트가 닫혀버린다면······.”
“미래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언젠가 또 게이트를 만들어줄 텐데.”
이르마 안 일르타는 발전에 대한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와 제법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강미래는 그녀가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장담할 수 있어. 다른 세상 사람들도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걸? 난 마법이지만 어떤 이는 물건 그 자체를, 어떤 이는 몬스터를, 어떤 이는 사람을 원할 수도 있어. 그리고 이르건 늦건 지구에는 그 모든 것을 거래하는 시장이 형성되겠지.”
그녀는 킥킥 웃었다. 여태까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지구는 잘 대비해야 할 거야.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면 많이 힘들어질 테니까. 게이트의 관리,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사람들의 관리, 거래의 관리까지도······ 미래, 네 친구로서 충고하는 거야. 다른 누군가가 나서기 전 네가 나서서 기반을 다지고 모두가 필요로 하는 장소를 만들도록 해. 그렇게 하면 많은 것을 쥘 수 있게 될 거야.”
“후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한숨을 쉬는 강미래를 앞에 두고 그녀, 이르마 안 일르타가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지구는 이 많은 세상 가운데 언젠가 나타날 세상의 유형 중 하나였는지도 몰라. 좋게 생각하라구. 다른 많은 세상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할 수 있게 된 거잖아.”
“제발 많은 소동이 일어나지나 않았으면 좋겠네요. 지금 지구는 어디 다른 데에 한 눈을 팔 만한 상황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만큼······ 소동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제가 나서는 것이 최선이기도 하겠죠.”
강미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물론 이세계로의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능력자가 한정되어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 어디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발할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세계인들이 자신의 세계로 넘어온 지구인을 해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의 군단과 세계 사이의 계약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그 계약은 효력을 잃는다.
당장 눈앞의 황녀도 막상 지구로 넘어가면 어떤 일을 벌이려 할지 모르는 터, 철저한 감독과 관리는 필수!
강미래는 페라타와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다른 이들과 함께 버려진 세상과의 전투를 치르고 있을 때, 오직 혼자서 세상 하나를 막기 위해 분투한 유일한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천불이 났다.
언제까지고 지구를 오롯이 유일한의 어깨 위에만 얹어놓을 수는 없다. 이젠 누군가 그 어깨 위의 짐을 덜어낼 때도 되었다.
강미래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파트너에 어울리는 일이 될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반드시 해내겠어요.”
“그걸 또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이다니. 가만 보면 너도 참 사서 고생이야. 누가 보면 지구인들 목숨을 다 네가 떠받치고 있는 줄 알겠어.”
황녀로서는 약간의 언쟁을 각오하고 꺼내든 말이었으나, 강미래는 그저 쓰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자신에 대해 깊게 말하지 않는 강미래를 보며 두툼하게 볼을 부풀린 황녀였으나 그녀 역시 강미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바, 깊숙이 발을 들이밀지 않고 적당히 물러났다.
“어쨌든 노력해보라구. 모두가 지구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할 테니까.”
“남 일이라고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강미래는 이번 일에 달려들 지구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의 탐욕은 모두가 사이좋게 손 붙잡고 멸망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소용돌이를 이세계로 통하는 게이트로 만드는 일이 누구에게나 가능했더라면 진즉 지구는 난장판이 되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각국의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책 마련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지만, 그런 그들마저 속으로는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해야 자국에 보탬이 될지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가장 편한 방법은 지구의 특산물을 만들어내는 거야. 모든 이가 그것을 욕심낸다면 자연히 거래 장소도 그 인근으로 집중되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말씀하신들 지구만의 특징을 지닌 물건이 그리 쉽게 튀어나오지는······ 아아.”
강미래가 살짝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꾸하다 말고 감탄사를 발했다. 그 모습에 오히려 그녀를 바라보던 황녀 쪽이 놀랐다.
“뭐야, 정말로 있어? 아무리 지구가 대단하다지만 이제 막 2차 대격변을 겪은 세계에?”
“있네요, 그게. ······그 누구라도 욕심을 낼 법한 특산물이.”
강미래는 대꾸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특산물이 있다고 말하는 주제에 저렇게 무거운 한숨을 쉬는 것인가, 황녀는 궁금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떠올리고 있는 특산물이 지구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지구의 브랜드 뱅가드를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다재다능한 거람!’
유일한의 어깨 위의 짐을 덜어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조금 전의 일인데, 곧장 그의 능력에 기대어야 하는 일이 생기다니 부끄러운 마음에 구멍이라도 파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특산물이 뭔데? 나한테는 알려줄 수 있잖아, 그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 전에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지구의 특산물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들어주셔야 할 부탁이기도 합니다.”
강미래의 부탁이라는 말은 굉장히 불길한 울림을 띠고 있었다. 왜냐면 이전에 몇 번 그 말이 나왔을 때, 제국의 마나 포션의 일부가 전부 그녀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미래는 이미 반쯤 제국의 상징이 되어버린 중요 인물. 그런 그녀의 부탁을 가벼이 넘겨버릴 수는 없다. 황녀는 단단히 각오를 한 후 입을 열었다.
“좋아, 얼마든지 말해봐. 내게 뭘 원하지?”
“마도공학과 관련된 자료가 필요합니다. 제국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엥?”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방향에서 들어온 공격. 그러나 그녀의 생각보다는 훨씬 받아들이기 쉬운 부탁이었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아, 한 번 찾아볼게. 기초도서라면 당장 내 방에도 몇 권 있고······. 그런데 마도공학은 장인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인지라, 사실 지금 시대에 와서는 그쪽 방면의 연구가 영 신통치 않은 것도 사실이야. 혹시 네가 익힐 생각이라면 각오해두도록 해.”
“아뇨, 제가 익히기 위한 것은 아닌지라······ 실은 그것이 전하께서 그리도 궁금해 하시는 특산물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황녀의 얼굴 위로 가득 물음표가 떠오르고 있었다. 강미래는 슬슬 그녀의 의문에 답을 해주어도 될 것이라 생각했고, 조용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팔찌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야?”
“제 목이 떨어져도 이건 못 드립니다. 어서 정보나 확인해보시죠.”
황녀는 강미래의 단호한 대꾸에 살짝 볼을 부풀리면서도 얌전히 강미래의 팔찌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그녀의 망막 위로 녹색 글귀의 나열이 떠올랐으며······.
“이, 이이이이이이이이 장인!”
“어떻습니까.”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외치는 황녀.
예상했던 반응 그대로의 모습에 강미래는 팔찌를 다시 자신의 손목에 끼우며 씨익 미소 지었다.
“특산물의 가치로 충분하겠지요?”
< Chapter 23. 내가 열면 지옥의 문 - 5 > 끝
ⓒ 토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