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27. 나 빼고 다 수호자 - 7 >
유일한은 버켓에서 빠져나와 몸을 닦고는 가볍게 옷을 챙겨 입으려 했으나, 2년 전에 사두었던 옷들은 사이즈가 전혀 맞질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속옷 위에 대충 가운을 챙겨 입고, 자이언트 버켓을 욕실 한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이 안의 물은 어차피 지금 이 순간도 버켓의 영향을 받아 청결을 유지하고 있으니, 다시 들어갈 때 데우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빠 왜 여기서 목욕해?”
“미르도 앞으론 여기서 해.”
“응!”
일단 아빠의 말이니 무조건 긍정하고 보는 유미르. 지금도 유일한에게 꼭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이였다. 하긴, 이제야 고작 6살이 된 아이인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더욱이 2년 이상 떨어져 있지 않았는가.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아휴, 너무 바빴어. 그리구 지금도 바빠.”
벌써 3차 대격변이 닥쳐온다는 얘기를 할 정도면, 그야 그동안 엄청 바쁘기도 했을 것이다. 유일한은 피식 웃으며 녀석을 쓰다듬어주고는 아직 젖은 채인 머리를 완벽히 말렸다.
채비를 마친 후 일단 기절해 있는 강미래를 들어 바깥으로 나가니, 제법 얌전히 대기하고 있던 나유나가 그를 맞이해주었다.
강미래 역시 상당히 아름다워졌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타고난 외모에 미의 여신의 축복까지 받은 나유나에 비하면 한 수 접어주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안녕!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오.”
“유나 씨도요.”
예전에야 상위 존재들을 따라잡기는 무리가 있었으나, 레벨이 오르고 미의 여신의 힘을 보다 잘 끌어낼 수 있게 된 그녀는 정말 같은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수준의 미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유일한은 2년간 그 변화과정을 지켜보지 못했으니 더더욱 그녀의 달라진 미모에 경악했다.
아직 하위 존재에 머무르고 있는 주제에 상위 존재가 지닌 존재의 근원적 아름다움을 뒤쫓을 정도니, 그녀가 상위 존재로 거듭난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전 각 단체의 수장들이 그녀를 노리고 수작을 벌였던 것도 이해가 간다. 그와 동시에 분명 앞으로도 그녀와 관련하여 귀찮은 일이 생기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일한 씨, 예전보다 더 잘생겨졌네요오!”
“고마워요.”
“그럴 땐 유나 씨도 훨씬 더 예뻐졌다고 대꾸해줘야죠오!”
“그런 요구를 해올 걸 알고 입 다물고 있었어요. 여전히 재수 없네요.”
나유나가 두툼히 볼을 부풀렸지만 유일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깔끔하고 붉은 금속으로 이루어져 그 위에는 작은 보석까지 촘촘히 박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서클렛을 하나 꺼내어 건네었다.
“상품이에요오?”
“상품으론 못 팔아요. 에픽 등급이니까.”
유일한에게야 2년 동안 지옥에서 구르며 남는 시간동안 틈틈히 만들어둔 악세서리에 불과했지만 에픽은 에픽. 제아무리 대단한 배포의 나유나라고 해도 그것을 보며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유일한의 말은 더욱 심각했다.
“유나 씨 가져요. 마나 강화 능력도 있지만 특히 보호 능력에 출중하거든요. 설령 상위 세계에 떨어져 상위 존재의 기습을 받는다고 해도 두 번쯤은 버텨낼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도망쳐서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돼요. 그 외에 옵션도 많으니까 살펴보고.”
“······.”
나유나의 대답이 없어 돌아보니, 그녀는 서클렛에 시선을 내리깔고 있어 유일한의 말은 전혀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야 에픽 등급의 아티팩트를 받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유일한은 그녀를 이해했다.
이윽고 작은 목소리로 대꾸가 돌아왔다.
“고마워요.”
“잘 쓰면 그걸로 됐어요.”
“······네에.”
나유나가 즉시 서클렛을 착용했다. 서클렛은 나유나의 초월적인 미모에도 눌리지 않고 밝은 빛을 발하며 그녀를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착용 순간 가동된 보호 기능도 확실했다.
“예뻐요?”
“누가 만든 건데 안 예쁠 리가.”
유일한은 괜히 모태솔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센스 하나 없는 대꾸를 하고는 강미래를 거실의 소파에 눕혔다. 나유나가 툴툴거리며 따라왔다.
“나한테 반했으면서.”
“꿈은 자면서 꾸라니까.”
유일한 또한 마찬가지로 툴툴거리며 답하고는 강미래를 눕힌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유미르가 졸졸 따라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래서 미래 씨는 왜 이러죠?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유는 알 것 같지만, 미래의 친구로 남아 있기 위해서 비밀을 지킬래요오.”
괜히 더 신경 쓰이게 하는 말이었다. 언젠가 강미래에게 그것에 대해 캐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자니 맞은편에서도 천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최선두에 선 리에라가 너무나 당황해서인지는 몰라도 발가벗은 채, 온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날아들었다는 것이다.
[일한아, 3차! 3차 대격변이래!]
“나도 알아들었으니까 일단 옷이나 제대로 입어.”
이미 그녀의 알몸을 이런저런 이유로 몇 번인가 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에게 그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리에라의 몸을 말리고 옷을 입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그러는 사이 나유나는 에르타에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저 천사 일한 씨한테 수작부리는 거 맞지이.”
[그래요, 당신이 유일한에게 자주 그러듯이.]
“그런데 일한 씨는 태연하게 받아넘기는 거고오?”
[그렇죠, 당신이 유일한에게 흔히 당하듯이.]
“에헤헤, 뭘 그렇게까지.”
[칭찬이 아녜욧!]
강미래 또한 일행이 부산을 떨고 있는 사이 무사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토마토처럼 달아올라 있었지만, 적어도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유일한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확인했다.
“괜찮아요? 무리하지 말고 쉬어도 되는데.”
“······아, 아뇨. 전 괜찮아요. 그럼요.”
기분 탓일까, 강미래가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타인이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유일한에게 있어 제법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별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상황과 지금 지구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유일한과 마주하고 있는 이들은 2년간 유일한이 대체 뭣 때문에 혼자서 지냈는지 무척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유일한은 어쩔 수 없이 대강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던전에······ 갇혔었다고요?”
“그래서 던전 보스를 죽이고 빠져나오려고 2년간 노가다를 했고, 그 와중에 운이 좋아서 던전 클리어를 안 하고도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죠.”
언제나처럼 어디 다른 세상에서 활약하고 왔겠거니,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일행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기는 말이었다.
“······2년 동안 혼자서 던전 안에요오?”
“아뇨, 천사들도 있었으니까 혼자는 아니었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천사를 동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유일한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아직 천사를 자신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불가능했던 강미래와 나유나는 유일한 스스로가 지옥이라 칭한 공간에서 2년간, 그가 대체 어떤 심정으로 버텨왔을지 지레짐작하며 침묵하고 말았다.
“그러니 이젠 3차 대격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2년 동안 지구가 어떻게 굴러갔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어서.”
물론 유일한에겐 자신이 던전에서 노가다를 했던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보다는 3차 대격변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 말에 강미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일한 씨가 없는 2년 동안 지구의 성장속도가 정말 터무니없이 빨랐거든요.”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지구의 마나가 다른 세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풍부하니 몬스터들의 생성도 압도적이고, 당연히 지구인들의 성장도 엄청 빨랐어요. 원래 다른 세상이었다면 재능의 한계로 2차 클래스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뱅가드의 우수한 병기들이 염가에 많이 풀리면 풀릴수록······.”
유일한이 경매로 진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상위 무구일 뿐, 어떤 세상에 내놓아도 최전선에서 활약할 우수한 무기들은 표준 무구라는 이름으로 터무니없이 저렴하게 전 세상으로 팔려나갔다.
그 결과, 그 인간 본인의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수행할 수 없어야 할 클래스 미션을 유일한이 만든 우월한 무구의 힘으로 쉬이 클리어하고 다음 클래스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 지구에서는 2차 클래스를 달성하는 것이 최소한의 클랜 가입 조건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다른 세상이었더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준이다.
물론 여기까지도 유일한이 익히 예상했던 바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평균 전력이 높아져야 지구를 지키는 일이 수월해질 터이니까.
그런데.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인간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지구의 발전 속도도 빨라지거든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정 레벨에 도달한 인간들이 차례로 자신들과 연결된 세상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면서 무수한 다른 세상의 사람들까지 지구로 들어왔고······.”
수많은 게이트가 지구의 각지에 열렸고, 그 과정에서 그 세상을 이루는 마나가 지구와 섞이게 되었다. 그것들은 반발, 융합, 거부 등의 다양한 반응으로 서로를 자극했으며, 결과적으로 지구의 성장을 빠르게 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니까 지금 온 우주가 지구의 성장을 돕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이세계인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다른 천사들의 알림으로 판단해도 아직까지는 3차 대격변의 징조가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추세로 보아 3달, 빠르면 1달 안에도······.”
유일한은 그저 쓰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던전에서 구르다가 이제야 좀 쉴 수 있을까 싶었더니 3차 대격변이라. 정말 일복 하나는 제대로 타고난 모양이었다.
[2차 대격변만으로 3차 대격변과 같은 수준의 격상을 이룬 지구가, 3차 대격변을 겪는다면······.]
[그 던전도 여러모로 신경 쓰이고, 정말 지구는 골치 아픈 일뿐이네요. 이 일들을 언제 다 처리한담.]
“여태까지 많이 일했잖아. 굳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뭐.”
그래봤자 3차 대격변, 몬스터가 닥쳐오면 싸워서 물리치면 그뿐이다. 물론 그 전에 여태 유일한이 소화해낸 마도공학 능력을 이용해 비터스윗 페르소나를 강화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런데 진짜 문제는 다른 부분에 있어요.”
“다른 부분?”
온갖 수라장이란 수라장은 다 겪은 덕에 3차 대격변이라는 말에도 제법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던 유일한의 귀가 처음으로 쫑긋거렸다.
“이 사실은, 현재 저를 비롯해 극히 일부의 인간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또 뭔가 있었던가? 여태까지 들어온 보고 가운데 3차 대격변에 대해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는데.]
[버려진 세상과의 연결? 아니, 지금 지구에는 그것도 굉장히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만. 지금의 지구는 마치 개미떼가 몰려든 눈깔사탕과 같으니 말이야.]
“야, 슬퍼지니까 사실적시 공격 하지 마라. 그래서 미래 씨, 뭔데요?”
강미래는 자신이 말을 꺼내놓고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유일한과 함께하고 있는 천사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실은······ 버려진 세상과의 연결 이외에, 적들이 지구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것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 광휘의 군단이나 파멸마군의 얘기가 없었구나.”
처음엔 유일한 자신이 들어갔던 던전도 놈들의 수작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너무 갔다. ‘다른 이들을 안에 들이지 않고자 하는 의지’로 똘똘 뭉친 그 공간은 남을 공격하는 데 이용하기에는 실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 새끼들이 또 뭐 하고 있어요? 지금 당장 움직여야 될 만한 일인가요?”
“아, 아뇨. 저희도 이제 막 한 건 끝내고 온 참이라······. 어머니께서 오셔서 설명해주실 거예요.”
“그럼 어머니께 듣는 게 좋겠······ 네?”
유일한은 강미래의 말에 자연스럽게 대꾸하다 말고 반문했다.
“어머니라니······ 혹시 강미래 씨 어머니께서도?”
“아, 아뇨. 제 친어머니가 아니라 일한 씨의······.”
기껏 진정되나 싶었던 강미래의 볼이 다시금 발그레해졌다. 유일한이 자신의 어머니와 강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고리에 대해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 순간, 정말로 저택의 입구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그것도 강미래와 몇 살 차이나 보이지도 않는, 유일한이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외모로.
“대체 어머니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 일에 대해 처음 알려주셨던 게 일한 씨의 어머님이셨어요. 2년간 저희를 많이 도와주시기도 했고······.”
“어머니 짱 세요!”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정보로 가득한 강미래와 나유나의 보고에 정신이 아득해진 유일한은 일단 저택 안으로 그녀를 들인 후, 굉장히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마주했다.
“엄마······?”
“아들이 과거로 돌아온 것도 아니고 엄마가 과거에서 온 것도 아니다.”
“헉!”
유일한은 그 자리에 있는 김예슬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속내를 이렇게 잘 읽어내는 이는 리에라 아니면 그녀뿐이었으니까!
“엄마가 강하리라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는데······.”
“짐작하고 있었는데 뭐가 문제니?”
“설마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죠.”
유일한은 민망해져 머리를 긁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자신이 없으면 지구가 그대로 망해버리는 것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오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다면 조금 진즉 도와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유일한은 나지막이 투덜거렸지만, 어머니께 그것을 따지기 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 다녀왔습니다.”
“그래, 아들. 어서 오렴.”
어머니가 맑게 웃으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겉으로 보기에 어머니와 아들보다는 누나와 동생으로 보인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것은 제법 감동적인 재회였다.
< Chapter 27. 나 빼고 다 수호자 -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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