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33. 너와 함께 간다 - 2 >
나유나는 무척이나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동안 정신과 육체를 잠식해 들어가던 피로가 깨끗이 걷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편안한 기분이었다.
“안녕.”
그리고 침대 맡에 앉아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놀랄 만큼 빠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별루 안녕 못 한데에.”
“역시 아직 상태가 별로야?”
“으으으으음.”
언제나 자랑스레 펄럭거리고 다니던 두 쌍의 날개는 어디로 던져버린 듯 찾아볼 수 없고, 그것을 대신해 신묘하게 반짝이는 연분홍빛의 드레스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성.
같은 공간에 있어도 좀처럼 실감하기 힘든 압도적인 존재감이 사라져, 마치 천사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 몸에 지닌 힘이나 미모는 결코 평범하지 않지만.
나유나는 리에라가 하위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 순간 납득하고 받아들였다.
“계속 거기서 그러고 있었어요?”
“아니, 중간에 쳐들어온 애들 한 번 손보고 왔지.”
“일한 씨는 어디 갔어요?”
“파멸마군 조지러. 아마 간 김에 제국군도 정리하고 오지 않을까?”
과연, 그래서 여기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유일한이 아니라 리에라였던 것인가. 나유나는 납득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일한 씨가 나 지켜달라고 부탁했죠?”
“너는 아니고 성역이지.”
“일한 씨 침대 위에선 어때요?”
“무서울 정도로 사람이 바뀌어서 밀어붙이는데 그건 이미 황홀을 넘어선······ 헉!?”
리에라가 대꾸하다 말고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나유나는 이미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은 후. 그녀는 한숨을 푹푹 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둘이 그렇게 됐구나. 지구에서 쫓겨날 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하긴 했는데······.”
“······너 머리 진짜 잘 돌아가는구나.”
작은 힌트와 상황을 가지고 순식간에 진실에 접근해버리는 나유나의 능력에 경악한 리에라는 허탈해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다 문득 그 당시를 떠올리곤 외쳤다.
“넌 그럼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일한이 처, 첫키스를!”
“지구에 단 둘만 남겨지는데, 둘 다 서로를 좋아하는데 관계가 발전하는 건 당연하죠오. 최대한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기는 했는데······ 그래서 도장까지 찍어뒀는데. 에휴, 지구에서 쫓겨나지만 않았어도 내가 리드할 수 있었는데.”
“너, 너······.”
리에라는 언젠가 나유나를 순진한 어린애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판단을 전면수정하기로 했다. 이 녀석은 영악한 악마였다! 이불을 들춰 엉덩이에서 꼬리가 살랑거리지 않나 확인하고 싶을 만큼 앙큼했다!
“나 이제 하위존재다? ······네가 까불면 때릴 수 있다?”
“아이고오, 누군 첫사랑을 보기 좋게 뺏겼는데 이젠 그 첫사랑을 뺏어간 여자가 때리겠다고 협박까지 하네에, 서러워서 정말 눈물이 나네요!”
나유나가 정말로 눈가에 찔끔 눈물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에 리에라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리에라가 자신을 신경써주는 것을 깨닫고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며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오. 일한 씨가 나랑 사귀던 사이도 아니구.”
“그래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구.”
“야!”
리에라가 정말로 창을 꺼내들려고 하자 나유나는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오. 나두 싫다는 사람한테 들이대는 사람은 질색이거든요. 솔직히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지금은 얌전히 있을게요.”
“왜 꼭 그렇게 여지를 남겨두는 말을 하는 걸까.”
“저 지금부터 할 일 있으니까 잠깐 나가줘요, 언니. 지금부터 정화수 떠다놓고 언니랑 일한 씨가 헤어지라고 레이트나 님한테 빌 거거든요.”
“좋아, 역시 죽여 둬야겠어.”
[잘 논다.]
미스틱은 둘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지켜보며 흥, 코웃음을 쳤다. 좀 더 살벌한 광경이 펼쳐질 거라고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시시하게 끝나지 않았는가!
“절대로 안 헤어질 거니까 꿈 깨시지.”
“언니야 그렇게 장담할 수 있겠지만 일한 씨는 어떨지 모르겠네에! 이렇게 예쁘고 훨씬 젊기까지 한 내가 옆에 있는데!”
“너 죽었어!”
그녀가 서로 장난을 치고 있는 리에라와 나유나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더라면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미스틱은 그렇게까지 성숙하지는 못했다.
유일한이 천공성에 도착한 것이 바로 그쯤이었다.
“아, 유나 씨 일어나 있었네요.”
“왔구나.”
“일한 씨이······.”
나유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일한을 보며 다시금 멍해졌다.
“피로는 다 풀린 것 같네요. 미의 여신의 축복은 정말 사기구나.”
“······네에, 그런 것 같아요.”
역시 잘생겼다. 그동안 너무 그리웠던 나머지 자신의 눈에 콩깍지가 씌워진 것인지, 그동안 유일한이 정말로 많이 잘생겨진 것인지는 몰라도 잘생겼다.
“······유나 씨, 왜 그래요?”
“에잇.”
나유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유일한의 얼굴을 훑다가는 리에라의 팔꿈치 공격에 제정신을 차렸다.
“씨잉, 보지도 못하게 해!”
“우리 일한이 얼굴 닳는다.”
“또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유일한이 다가와 리에라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그때 나유나는 유일한이 한 손에 뭔가를 질질 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물었다.
“일한 씨, 손에 그거 뭐예요오?”
“리 카트리아나 제국 황제예요.”
유일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며 그것을 앞으로 슥 내밀었다. 가슴팍에 칼 하나가 꽂혀 있고, 양 다리는 분질러져 있고, 머리칼은 뽑혔고, 입술이 터져 있어 제대로 확인하기는 힘들었지만 돼지처럼 툭 튀어나온 배를 보면 확실히 황제였다.
아니, 잠깐만.
“······황제?”
“네.”
“······.”
터무니없는 선물에 나유나가 말을 잃건 말건 유일한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죽이지는 않았어요. 희생자들의 분노를 달래려면 역시 다른 희생양이 필요한 법이니까.”
엘포스는 제국과 싸우며 무수히 많은 동료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많은 민간인이 고통 받았고 죽어나갔다. 이대로 그냥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사람들의 갈증을 달랠 수는 없을 터. 그들의 목을 축여주려면 황제의 피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교황이라는 분하고 유나 씨가 알아서 하세요.”
지극히 담담하게 말하는 유일한을 보며 나유나는 다시금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불과 조금 전까지 세상의 절반을 쥐고 있었던 황제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이, 이미 그가 하위존재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유나는 그런 모습까지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음, 역시 콩깍지가 쓰인 모양이다.
“황제가 이 자리에 있으면, 제국군은요오?”
“처리했어요.”
유일한이 실로 담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처리했다는 말이 담고 있을 의미가 두려워 나유나는 차마 상세하게 묻지 못했다. 물론 유일한이 총 군세 수백만에 달하는 제국군을 전멸시키지는 않았겠지만 아까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때 유일한이 의외롭게 들리는 말을 내뱉었다.
“전부 밧줄로 묶어서 끌고 왔으니까 확인해요.”
“······네?”
유일한은 나유나, 리에라를 끌고 함께 저택을 나왔다. 천공성 외곽, 지상이 보이는 곳까지 달려 나온 그녀는 정말로 수백만에 달하는 제국군이 밧줄에 묶여 나란히 서서는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긴 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을 감시하는 이가 누구였는가 하면 물론 드래곤의 형상을 취한 유미르였다.
“와오······.”
“브레이아의 역사에 길이 남겠는걸.”
한 명의 인간이 수백만을 무릎 꿇리는 일이 가능할까? 정답은 ‘그렇다’다.
유일한은 그저 은신을 풀고 제국군 모두를 당당히 뚫어 황제를 찾아, 놈을 패대기치고 무력화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유일한에게 손을 댈 수 없었고, 누구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
제국의 모든 힘을 다해도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실로 간단하게 제국은 유일한에게 패배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죽고 싶지 않으면 하는 말 들으라고 했더니 저렇게 됐어요.”
“황제가 붙잡히고, 군대가 무력화되었으니 그럼······ 전쟁은 끝났네요오.”
“그렇죠.”
나유나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수긍하는 유일한. 대륙의 명운을 건 전쟁을 홀로 끝내버린 주제에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야 실제로도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 그런 것이겠지.
“후, 푸후후.”
나유나는 어이가 없어 그저 후후, 웃고 말았다. 지금쯤 지상에서 저것을 지켜보고 있을 이들은 어떤 심정일까. 교황과 강하진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생각하니 너무나 웃겼다. 그러나 그런 나유나를 보고 유일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올 뿐이었다.
“내가 뭐 더 해줄 일 있어요, 유나 씨?”
“많이 있지만, 지금은 이걸로 괜찮아요.”
“많이 있다고!?”
나유나는 당황하는 유일한을 보며 쿠쿡, 다시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리에라가 인상을 팍 쓰고 눈을 부라리는 것까지도 즐거웠다.
자신조차 모두 파악하기 힘든 이 벅찬 감정을 모두 담아 유일한에게 키스를 퍼부어주고 싶어도 리에라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니 그게 유일하게 아쉬운 노릇이다. 지금도 혹여 낌새만 보이면 가차 없이 처단하려고 리에라의 팔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언니 짠순이.”
“시끄러.”
“······응?”
[인간이란 정말 재미있군.]
여자들 사이에 이미 한 차례 대화가 오갔던 것을 모르고 있는 유일한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오로치만이 짤막한 감상을 내뱉을 뿐!
그렇게 해서 세상 브레이아 전역을 뒤덮었던 전쟁이 끝났다. 전쟁은 정복전쟁을 일으킨 리 카트리아나의 승리도, 미의 여신 레이트나의 이름 아래 수호를 위해 일어난 엘포스의 승리도 아닌, 여자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난입한 외톨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황제를 비롯한 제국 수뇌는 모두 처형당했다. 그렇게나 나유나에게 집착하며 그녀를 갖고 싶어 했던 황제는 끝내 나유나의 그림자 한 번 밟아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나유나가 성역에서 보인 기적과 맞추어 나타난 유일한과 천공성은 레이트나의 신도들에게 레이트나의 힘의 일부, 그녀의 분신쯤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그것은 유일한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제국군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결국 대륙 전체가 레이트나의 존재감에 휘둘려 그녀의 이름에 지배되도록 만들었다.
리 카트리아나는 그대로 무너졌다. 유일한과 천공성의 활약으로 제국의 권력 중추를 속속 뽑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엘포스가 리 카트리아나를 흡수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새로 탄생한 통일제국의 황제 자리에 누가 앉느냐였다.
“싫어요오.”
“지금 이 관을 쓸 자격이 있는 것은 온 세상에 너뿐이란다, 유나.”
“하지만 전 이제 일한 씨 따라서 다시 지구로 갈 거라구요오.”
“세상의 주인 자리를 마다하고 말이니?”
“네에.”
교황을 비롯한 엘포스의 중추인물들은 성역의 기적을 만들어낸 인물이자 유일한을 불러낸 당사자이기도 한 나유나만이 황제의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정작 나유나는 더 이상 브레이아에 붙들려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이제 이곳에는 제가 필요 없지만 일한 씨한테는 제가 필요하거든요!”
“아냐, 일한이한테도 너 필요 없어.”
“후후, 일한 씨 생각은 다를걸요오.”
“······.”
나유나가 확신은 맞아떨어졌다. 유일한이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유나의 축복은 강력하다. 이미 하위존재의 한계를 넘어선 유일한을 거기서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능력의 보유자는 나유나 뿐이다. 앞으로 유일한이 어떤 이들과 싸워야 할지 모르는 지금, 솔직히 나유나가 제국의 황제로 남겠다고 선언해도 그녀를 붙들고 매달려야 할 판이었다.
“일한이 너······.”
“그래도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유일한은 이미 나유나에게 자신이 리에라와 깊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나유나는 전혀 충격도 받지 않고 그 사실을 납득해주었지만, 아무래도 유일한 본인이 마음에 걸려 순순히 따라와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나유나가 이렇듯 먼저 적극적으로 합류 의사를 표하니 솔직히 유일한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니? 레이트나를 상징할 수 있는 이가 너 말고 대체 이 대륙에 누가 있겠니!”
교황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나유나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답했다.
“성하가 하시면 되죠오.”
“나 같은 다 늙은이가 무슨······.”
“저번에 보니 젊으시던데 뭐.”
“그건 묶어두었던 마나를 순식간에 방출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가능했을 뿐이지, 그 모습을 유지하려면······.”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유일한은 그 즉시 썩어 넘치는 4차 클래스 마석들을 활용하여 교황을 위한 액세서리를 다섯 개 정도 만들어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즉위 축하 선물이에요.”
“고마워요, 하지만 이건······ 음?”
그것은 단순히 마나를 보충하는 것을 넘어, 교황의 마나를 보조하여 그녀의 육신의 기능을 영구적으로 회복까지 시켜주는 천고의 보물이었다. 단순히 말하자면, 그것을 착용하는 것만으로 수명을 늘릴 수 있었다.
“지금 내 신체 세포가 회복되는 것 같은데······.”
“맞아요. 워낙 고레벨이시니 앞으로 레벨을 조금만 올려도 신체 나이가 확확 젊어질 거예요. 앞으로도 한 수백 년은 더 사실 수 있겠네요. 이 기회에 아예 상위존재에 도전해보시던가.”
“······.”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그것으로부터 넘쳐나는 마나를 신성력으로 전환하여 20대 후반의 미녀 모습을 되찾은 교황은 유일한을 괴물 바라보듯이 했지만 유일한에게는 익숙한 시선이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유나는 뿌듯하게 웃었고, 리에라 역시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쓰게 웃었다.
통일제국의 황제가 결정 난 순간이었다.
< Chapter 33. 너와 함께 간다 - 2 > 끝
ⓒ 토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