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38. 나를 따라오겠다면 - 1 >
[······.]
[······.]
[······뭐?]
헬리에나의 등장 앞에 전장이 그대로 굳었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해서가 아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 너는. 너는 죽었을 텐데!?]
여유를 유지하고 있던 사티에르의 표정에 금이 갔다. 놈은 설령 같은 7차 클래스라 할지라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이 헬리에나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렇게 혼돈의 벽까지 몸을 옮긴 것인데 설마 본인이 이리도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다니?
[죽었지. 하지만 다시 살아났어. 짜잔!]
[말도 안 돼, 언데드라는 말인가······?]
[내가 언데드로 보여?]
[이익······!]
헬리에나가 고혹적으로 웃자 사티에르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물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생기 넘치는 장밋빛 뺨, 생생한 눈빛, 그녀가 달콤한 숨을 내뱉을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모든 이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흉부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녀가 뿜어내는 짙은 마력이 넘실거리며 전장으로 흘러나갔다. 그 순간부터 육신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파멸마군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파멸마군이 아냐!?]
[기운을 가두었어. 하지만 어떻게······?]
하늘의 군단도, 광휘의 군단도, 석양의 화원도, 그리고 파멸마군마저도 살아 움직이는 헬리에나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상황에서도 잽싸게 움직이고 있는 이들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이들 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놈은 확실히 맡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걸, 자기.]
[하위존재에게 종속되기까지? ······무슨 수단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기분이 더러워. 단단히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아.]
사티에르의 시선이 유일한을 향했다. 전장이 동요하고 있는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한창 타천사들을 쓸어버리고 있는, 영혼의 불꽃을 다루는 하위존재.
놈이다. 놈이 상위존재들의 일에 끼어든 이후로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역시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여야겠어.]
[사티에르, 넌, 나랑, 놀자니까?]
사티에르의 날개가 펼쳐지다 말고 강제로 접혔다. 어느덧 헬리에나와 사티에르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헬리에나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사티에르 자신이 직접 발을 내딛고 있었다.
[큭, 이 빌어먹을 년이!]
[꺄악, 무서워.]
사티에르가 양쪽 눈에 터무니없는 열기를 농축해 쏘아낸 순간, 파멸마군과 석양의 화원, 광휘의 군단을 이루는 상위존재들이 앞 다투어 헬리에나를 보호했다. 순식간에 수십의 시체가 늘어났다.
[어쩜 같은 타천사들을 그리 무자비하게 공격할 수 있는지!]
[······!]
접혔던 날개가 모두 펼쳐지고 사티에르의 두 눈이 재차 빛을 발했다. 두 줄기의 광선이 똑바로 헬리에나를 노렸으나 이번에도 다른 상위존재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사티에르는 굴하지 않고 바로 다음 공격을 이었다. 타천사들의 비명이 검은 깃털과 함께 허공에 흩날렸다.
[사티에르 님!]
[죄송, 크학!]
[흥.]
사티에르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순간 그녀의 매혹이 더욱 강렬하게 들어온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을 농락하는 서큐버스, 그녀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금의 생각도 허용되지 않을 만큼 빠른 공격을 연이어 쏘아내는 것뿐!
[전장의 모든 상위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먼저일지, 네년이 내 날개를 뽑는 것이 먼저일지 시험해보겠느냐!]
[사티에르, 여전히 용감한 남자구나. 성질도 여전히 급하지만 말이야.]
제아무리 헬리에나의 매혹이 강력한들 7차 클래스를 완벽하게 조종할 수는 없다. 이전 광휘의 8익 나티에르, 석양의 화원 수석 문지기 켈라투크와 전투를 벌였을 때에도 그러했다. 천천히 조금씩, 그들의 전투의지를 없애고 다른 이들과 충돌하게 만드는 식으로 힘을 소모시키지 않았던가! 더욱이 지금 헬리에나의 힘은 그때보다 더욱 약해진 상태였다.
사티에르는 그녀에게 시간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광휘의 군단의 이름을 걸고 나선 전투, 부하들을 전멸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음이니!
바로 그때 헬리에나가 꺄르륵 웃었다.
[사티에르, 너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음?]
[어머나, 내가 너무 예뻐서 나 외에는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구나. 그렇지?]
[그게 유언이라면 지금 네년을······ 아니!?]
놈은 조금이라도 빨리 헬리에나를 처리하고 유일한을 지워버릴 생각뿐이었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놈은 그녀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완벽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생각해보자. 애초에 헬리에나가 어째서 모습을 드러냈던가?
“흔적을 잡았습니다!”
그렇다. 강미래가 광휘의 군단 본영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만들어낼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사티에르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 빌어먹을!]
[꺄하하하,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 귀여운걸!]
어째서 그가 그것을 잊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본래 광휘의 군단 본영으로 상위존재들이 몰려오는 사태를 막기 위해 출정한 것이었을 텐데!
[네년······!]
[아무리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봐도 헬리에나에게는 이미 임자가 있답니다. 애석해서 어쩌나?]
[감히, 감히 나 광휘의 4익을 농락하다니!]
[내 얼굴을 이렇게 구경한 대가로는 싸지, 그렇지?]
그의 살기를 여유롭게 맞받아치는 헬리에나의 미소가 더없이 사악하다. 사내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서큐버스 퀸, 그녀에게 패배는 없었다! 곧 강미래가 외쳤다.
“지금 열겠습니다!”
[어딜!]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사티에르가 강미래를 향해 온갖 공격을 퍼부어댔지만 그때는 이미 유일한 일행이 천공성과 합류한 시점이었다.
“흐브브븝!”
폴링다운을 이루는 혼염의 사슬이 얽히고설켜 형성된 거대한 방패가 놈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내고 소멸되었다. 유일한은 폴링다운이 강제로 캔슬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휴, 역시 미치도록 강하네. 아직 손도 못 대겠어.”
[그걸 막은 것만으로도 대단해, 자기. 너무 멋져······!]
“역시 나 쟤 재수 없어.”
“미안하지만 리에라 당신도 평소에 별로 다르지 않아요.”
[제기랄······ 하위존재 따위의 마법에!]
강미래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지금은 독립된 의지를 갖추고 허공에 서서히 형성되어가는 게이트. 마법이 완성된 이상 사티에르조차 감히 그것을 취소시킬 수 없다.
취소시키기는커녕, 놈이 발산하는 마력까지 재료로 삼아 더없이 거대하고 튼튼한 게이트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여, 열린다.]
[정말로 열리고 있어.]
[광휘의 군단의 세상······ 나락!]
전장의 전원이 전율했다. 하늘의 군단 이상으로 그 실체를 꽁꽁 감추고 있던 광휘의 군단, 그들의 군대가 머무르고 있는 세상이 설마 지금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게이트가 열린 바로 그 순간부터 너머로부터 꿈틀거리는 초월적인 힘이 느껴졌지만,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파멸마군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헬리에나 님이 열어주신 게이트다!]
[키하하하하하하! 난 저쪽도 재미있어 보이는데!]
[가자, 타천사들의 살점을 포식하러 가자!]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세상 나락으로 통하는 게이트가 열린 순간부로 동맹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결성 순간부터 불안하기는 했으나, 설마 이런 식으로 파토가 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타천사들은 당황하며 놈들을 막아섰지만 그것은 파도를 막겠다고 방패 하나를 들이미는 꼴이었다. 곧 파멸마군은 물론이고 석양의 화원까지 기세에 편승했다.
[일이 재미나게 돌아가는데!]
[후후, 죽을 장소를 택할 순간인가? 나는 저쪽이야. 타락한 자들의 낙원에서 맞이하는 황혼도 제법 근사할 것 같아!]
일이 삽시간에 커졌다. 수백, 수천을 넘기는 숫자의 상위존재가 게이트로 몰리자 막을 수 없는 흐름이 형성되고 말았다. 본능에 몸을 맡겨 폭주하는 파멸마군, 제멋대로 움직이는 석양의 화원! 타천사들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귀환한다!]
[돌아가서 직접 게이트를 막아야 해······ 큭!]
[파멸마군······ 이 일을 잊지 않겠다!]
전장 곳곳에서 타천사들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혼돈의 벽을 넘어 하늘의 군단을 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머무르는 세상의 수호를 선택한 것이다!
혼돈의 벽 전장의 주적이었던 파멸마군은 이미 나락으로 향하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고, 두 세력이 모두 포기한 이상 석양의 화원이 굳이 하늘의 군단과 시비를 붙을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그들도 타천사들의 세상을 구경하기를 원했다.
[유일한, 헬리에나······!]
마지막까지 전장에 남아 흐름을 막아보려던 사티에르마저 결국 그것을 포기하고는 귀환을 택했다. 놈은 자신의 몸이 다른 공간으로 녹아드는 와중에도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 굴욕을 잊지 않겠다. 반드시 내 손으로 네놈들의 목을 꺾어주마.]
[가지 말고 나랑 더 놀자, 사티에르. 조금만 더 나랑 있으면 너도 내 매력을 깊이 깨달을 수 있을 텐데!]
헬리에나의 윙크에 사티에르의 머릿속이 순간 아득해졌다. 그냥 던진 말이 아니다. 조금만 더 이곳에 버티고 있다가는 그녀의 매혹에 제대로 당하고 말 것이다!
[큭!]
괜히 도발했다가 본전도 못 건진 사티에르까지 다급히 귀환하고 나자 그 혼란스러웠던 전장이 제법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게이트는 아직까지 닫히지 않아 파멸마군의 대이동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더 이상 혼돈의 벽을 넘어 하늘을 침범하고자 하는 자는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해냈군요······.]
티타에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계획의 실행자 중 한 명이었으면서 확신이 없었다니! 유일한이 그녀에게 뭐라 따지고 들려던 그때,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도 아닐 텐데 티타에라가 그에게 홱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저 서큐버스는 대체 무엇입니까!]
[내 이름은 헬리에나야!]
[이, 이익!]
헬리에나의 마성은 여성이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티타에라는 필사적으로 헬리에나를 무시하며 유일한에게 따졌다.
[그녀는 분명 죽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살아있을 수 있죠!? 더구나 그녀에게선 여전히 파멸마군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파멸마군을 죽일 수 있는 것입니까! 룰을 위반했음에도 어째서 파멸마군에서 쫓겨나지 않는 거죠!? 아니, 애초에 그녀는 파멸마군인데 어째서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거죠!?]
“생각해봐, 대천사.”
유일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내가 거기에 답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
“후우.”
유일한과 티타에라가 신경전을 벌이든 말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해냈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린 강미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유일한은 티타에라의 표독스러운 눈빛과 마주하고 있었으면서도 여유롭게 그녀를 받아냈다. 프로 외톨이에게만 가능한 세심한 곁눈질 스킬이 만들어낸 배려!
“정말 고생했어요, 미래 씨. 완벽한 마법이었어요.”
“······고마워요.”
역시 자신은 너무 단순해져버린 것 같다고 강미래는 생각했다. 상위존재들 사이에 노출되어 대마법을 연달아 구사하느라 몸도 마음도 완전히 그로기상태였는데, 지금 그의 품에 안겨 말 한 마디 듣는 순간 그것이 회복되다니!
옆에서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 나유나가 무척 거슬렸지만 이 순간을 스스로 깨트리고 싶지 않았던 강미래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일한은 그녀가 스스로 설 수 있게 도와주고는 야속하게도 손을 떼어버렸다.
“약속은 제대로 이행된 것 같고, 그럼 나머지 아티팩트를 받으러 돌아가 볼까.”
[기다리세요, 헬리에나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세요!]
“누누이 말하지만 그건 우리 약속 내용에 없었던 것 같은데? 우리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너희가 7차 클래스 천사장을 내보내지 않았던 것처럼······ 어라?”
유일한은 티타에라에게 매몰차게 대꾸하던 와중 고개를 갸웃했다. 혼돈의 벽으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이곳 전장까지 똑바로 날아오는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헬리에나!]
[크하아아아아! 헬리에나!]
[이런, 또 곤란한 일이 되어버렸네.]
전장을 가득 메우는 우렁찬 고함소리에 헬리에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유일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명해, 헬리에나.”
[아이참, 부끄럽게······ 두 번 묻지 마, 자기. 날 짝사랑하는 남자들이 많다고 이미 얘기해줬잖아?]
설마 그 안에 7차 클래스도 포함된다는 말이야!? 유일한은 그렇게 물으려다 말고 침묵했다. 곧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자들이 직접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었구나, 헬리에나!]
[어째서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 헬리에나!?]
유일한은 지금의 자신으로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 명의 7차 클래스의 모습을 확인하며, 좋아, 하고 상큼하게 웃고는 외쳤다.
“튀자!”
< Chapter 38. 나를 따라오겠다면 -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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