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40. 나는 준비하겠다. - 1 >
[미친 짓 같은데.]
미스틱이 정색하고 말했다.
[주인님이 굳이 나서서 그놈들하고 연관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도 어지간해선 엮이지 않으려 했지. 가능하면 앞으로도.”
지구를 상위세계로 도약시키면 봉인이 풀리게 된다. 하지만 유일한에게는 차원 항해자라는 서브 클래스가 있고, 차원의 지배자 스킬을 발동하면 다른 상위존재들이 지구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다. 유일한은 어디까지나 그 스킬로도 막지 못하는 존재들이 지구로 침범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그들과 엮일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진짜 무서운 놈들을 막으려면 내가 지금보다는 더 강해져야 할 것 같아.”
[대체 어디까지 강해지려는 거야, 지금 시점에서 이미 어지간한 7차 클래스와 맞상대가 가능하잖아!]
“그 정도로는 안 되니까 이러지.”
기적의 요람은 어디까지나 유일한이 지닌 기운을 자극할 뿐, 그것을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했다. 아니, 이끌어주고야 있겠지만 그 속도가 너무나도 느리다. 이런 식으로 상위존재에 이르려면 일이천년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표본이 더 필요해.”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자기?]
“지금 상위존재들이 겪고 있는 일에 참견해봐야지.”
하늘의 군단에 속한 천사들과 만나지 않은 지 대략 10달이 넘었다. 유일한 일행은 영원의 모래시계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부지런히 다른 세상을 돌아다니며 지구인들을 회유하고 망한 세상의 인간들을 지구로 데려오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유일한 그룹과 강미래 그룹 모두 어느 순간인가부터 어떤 세상을 가든 그들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다른 상위존재집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헬리에나가 툭, 유일한이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말을 던졌다.
[그건 아마 자기 탓일 가능성이 높네.]
“내 탓? 왜?”
[자기 덕에 광휘의 군단의 본영에 대한 정보가 모든 집단에 공유되었잖아? 그런데 다들 얌전히 지낼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렇게 치면 파멸마군 본영의 정보도 공유된 상태잖아.”
[그럼, 그래서 더 난리인 거지. 지금 아마 다들 엄청 재미나게 놀고 있을걸?]
헬리에나의 입가에 실로 뿌듯한 미소가 어렸다. 유일한은 어쩜 이렇게 사악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어느덧 그 미소에 적응해버린 자신이 무서웠다.
“그럼 광휘의 군단의 본영으로 가봐야 하나?”
[그건 안 돼, 자기.]
헬리에나가 즉답했다.
[집단의 수장이 머무르며 지배하는 세상, 그것도 심부에 들어간다는 건 단순히 상위세계를 방문하는 것과는 격이 달라. 적어도 자기가 상위존재가 된 다음에 가야 해. 나는 파괴도 살육도 좋아하지만, 우리 자기가 죽는 건 싫어. 그렇게 되면 나도 따라서 죽어버릴 거야.]
“······알았어.”
유일한은 여태까지 상위존재집단의 본영에 대해 어느 정도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아직까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늘의 군단의 본영에서는 괜찮았는데······ 음?
“······그러고 보면 하늘에서는 7차 클래스를 초월하는 존재를 느끼지 못했지. 내가 신을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글쎄, 어쩌면 신이 없었던 것 아닐까?]
“헬리에나, 헛소리하지 마. 신은 계셔. ······그분이 정말로 하늘에 계시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헬리에나에게 반박하는 리에라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유일한은 이 화제를 더 파고드는 것은 현명하지 않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본영이 안 된다면 지부를 들쑤시는 수밖에 없나.”
[그게 좋은 방법이겠네. 원래 상위존재집단이란 보유하고 있는 세상의 숫자와 크기에 따라 강해지는 법이거든. 그러니 지금쯤 대전쟁을 앞둔 서로의 세력 갉아먹기에 돌입했을 거야. 정말정말로 큰 전쟁이 다가오고 있는 거지.]
그에게 대꾸하는 헬리에나의 목소리가 고조되어 있었다. 그녀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여 살짝 소름이 끼친 유일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가만히 있으면 지들끼리 싸워서 알아서 약해져주지 않을까? 지구에 관심도 꺼줄 테고.”
[무슨 소리야, 자기. 이게 다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이잖아? 그치들의 최종 목적지는 지구인걸?]
유일한은 잠시 침묵했다. 실로 오랜만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태까지는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두루뭉술하게 넘겨버리거나 뒤로 미루어뒀었는데, 더 이상은 모른 척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말해봐, 헬리에나.”
결국 유일한은 입을 열어 물었다.
“대체 지구에 뭐가 있기에 그 망할 놈들이 하나같이 지구를 노리는 거지?”
[예언이 있었어.]
“또 그놈의 예언.”
[그러니까······.]
헬리에나가 말을 하다 말고 주위를 살폈다. 열한 번째로 펼친 영원의 모래시계의 결계가 깨지기까지 남은 시간이 앞으로 한 달하고도 반. 저마다 수련이나 몬스터 사냥에 열중하는 가운데, 유일한을 중심으로 모인 멤버는 그와 헬리에나, 김예슬, 강미래, 나유나, 리에라뿐이었다.
[우리 자기랑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으니까 다들 가줄래?]
“무슨 짓을 하려고? 절대 그렇겐 못 놔둬.”
리에라가 결사반대했으나, 유일한이 손을 저었다.
“얘기를 들을 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흥미로운데, 우리는 들으면 안 되는 얘기인거니?”
[아니, 자기를 제외한 인간은 들어봤자 의미가 없거든. 지구의 지배자인 자기만 듣는 게 제일 좋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얘들아, 잠시 자리를 비우자꾸나.”
김예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일행을 끌고 뒤로 물러섰다. 리에라를 주축으로 한 여성진이 격한 반발을 했지만 김예슬의 부드러운 손짓 앞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러면······.]
헬리에나는 주위를 두 번 세 번 확인한 후 간이결계까지 치고는 유일한을 향해 돌아섰다. 그제야 간신히 그녀의 입이 열렸다.
[예언은 석양의 화원에서 흘러나왔어. 석양의 화원의 수장이 예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봤어, 자기?]
“언젠가.”
유일한은 결계 저 너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리에라에게 흘낏 시선을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들은 것이다. 과거 다레우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말이다.
[응, 아마 그자의 능력은 진짜일 거야. 내가 다섯 번째 신의 옆에 서게 되리라고 예언한 것도 그자거든······.]
헬리에나가 그렇게 말하며 볼을 붉히는 모습이 실로 사랑스러웠다. 스스로 그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부끄러워 견디지 못하는 모습.
이런 것만 보면 정말 풋풋하고 순수해보이지만 그 두 단어만큼 헬리에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으니, 여자란 모두 끔찍한 거짓말쟁이라고 유일한은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가 석양의 화원의 동향에 신경을 쓰고 있지. 그런데 그 수장이 어느 순간부터, 그때만 해도 대격변이 일어나지도 않은 세상이었던 지구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거야.]
“그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알아냈지. 석양의 화원의 수장은 남자고, 나는 남자라면 자기를 제외한 누구든 마음대로 홀릴 수 있거든! 다섯 번째 신에 대한 예언도 그때 들었어. 아, 물론 거기까지 듣고 도망쳐 나와야 했지만 말이야.]
유일한의 골치가 아파왔다. 지구를 둘러싼 모든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이 녀석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녀가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석양의 화원 뜻대로 지구가 놀아났을 테니 어쩌면 지구는 그녀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자기······ 화났어? 미안해, 하지만 그건 내가 자기를 알게 되기 전인걸······.]
사람들을 물린 것은 이래서였는가.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지금 지구가 처한 상황과 깊게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유일한에게 속내를 다 드러내며 사과하는 장면을 다른 존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제길, 유일한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마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겠지. ······괜찮으니 계속해봐.”
[그러면······ 예언의 내용은 이래. 세상 지구가 ‘하늘’을 뛰어넘는 세상이 되리라는 것.]
헬리에나가 입을 다물었다. 유일한이 고개를 갸웃하다가는 물었다.
“설마 그게 끝이야?”
[응, 끝이야.]
“그게 뭐야!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그 망할 놈들이 지구를 노린다고!?”
[그거면 충분한걸, 자기. 하늘의 군단이 어째서 그렇게 강한지 알아? 전부 하늘이라는 세상이 품고 있는 기록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라구. 그렇기 때문에 군단이 지닐 수 있는 힘의 한계도, 병력의 한계도 타 집단에 비해 월등한 거야.]
“······확실히.”
상위세계 쟁탈전은 그것 때문에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모든 것의 파괴를 원한다는 파멸마군이 하늘의 군단 본영을 노리는 것도 전부 그것 때문이었던 것일까.
아귀가 들어맞는다. 그 사실이 더욱 분하다. 어째서 자신이 기록 스킬을 갖게 되었는지도, 점점 더 납득이 갔다.
[어쨌든 그 사실을 알아낸 난 정보를 사방으로 퍼트렸어. ······어째선지 물어봐줄래?]
“어째서? 파멸마군을 위해서?”
[아니, 모든 집단이 지구와 관계되어야만 내가 자기와 만날 수 있게 될 테니까.]
유일한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지구를 둘러싼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더라면 자신과 헬리에나 사이에 접점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라.”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유일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석양의 화원 수장이 지구와 다섯 번째 신에 관련된 예언을 하고, 그 정보를 파악한 헬리에나가 모든 집단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않은가.
“혹시 너는······.”
[응. 나는 석양의 화원의 수장에게 이용당한 거지. 그자는 내가 다섯 번째 신과 이어지리라는 정보를 준 대가로 나를 부려먹은 거야. 물론 내가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아주 조금 나중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한 가지의 사실을 시사한다. 석양의 화원의 수장은 지구를 노리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내 성장을 의도하고 있었다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응,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석양의 화원은, 적어도 그 수장은 자기를 신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게 분명해.]
“내가 강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정말 짜증나기는 하지만 내가 홀로 지구에 낙오했기 때문이야. 그렇다는 건 그 자는 내 낙오까지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거야?”
[그렇게 되겠지? ······어쩌면 자기가 그렇게 되기를 의도했을 수도 있고.]
유일한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하늘의 군단이고 석양의 화원이고, 지들이 뭐라고 유일한의 성장에 관여하며 그의 인생에 참견한단 말인가. 멋대로 그를 신으로 만들고, 멋대로 지구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고······.
그것은 아주 불쾌한 기분이었다. 특히 예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든다. 그건 반칙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예상하고 있었다.’나 ‘알고 있었다.’는 식의 대꾸를 하면서 센 척을 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내 눈앞에 놓인 길을 걷지 않을 수도 없지.”
유일한은 이를 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놈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건 유일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 그것도 되도록이면 놈들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제 내가 아는 건 대부분 말했어, 자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하려던 일 해야지.”
헬리에나에게 대꾸하는 유일한의 목소리가 차갑게 번뜩였다.
“상위세계 약탈이다.”
[그건 자기가 원래 하려던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헬리에나가 기겁하며 외쳤다. 유일한은 그 말을 무시하고 전원을 소집했다.
“전쟁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전쟁을 준비한다!”
외톨이가 제대로 뿔난 순간이었다.
< Chapter 40. 나는 준비하겠다. -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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