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42. 내가 네 아빠다. - 5 >
일행은 유일한의 워프 스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다레우로 귀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들이 겪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 또한 유일한에게 낱낱이 전달되었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너덜너덜한 거야?”
“응······ 그래도 죽은 애는 없어. 아, 파테의 언데드 몇 마리가 삼도천을 건너버리긴 했지만.”
“계산불가 예측불가 마나내성을 지닌 적이 갑자기 차원에 난입해서 공격해왔다니, 그런 말을 내가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어야 하지만.”
유일한은 자신의 앞에 놓인, 비교적 온전하게 원형이 보존된 정체모를 적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까지도 기묘한 스파크를 튀기고 있는 일그러진 헤일로와 찢어진 천막처럼 너덜너덜한 날개는, 분명 유일한이 여태까지 마주한 적이 없는 종류의 생물이었다.
[생물이라구?]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이제는 여신의 축복도 사라져 완전히 제 상태로 돌아온 헬리에나였다. 물론 그녀가 의문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 마나가 아닌 기묘한 에너지를 다루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매혹을 버텨낸 이것들을 생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유일한의 대꾸는 심플했다.
“뭐, 말투가 딱딱했다고 하니 너희가 이것들을 로봇이나 그 비슷한 걸로 간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건 제대로 된 자아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녀석들이 생명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해. 지금 단계에서는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는 얘기지.”
유일한은 기록 스킬의 마스터다. 그쯤 되면 비록 기록하지 않은 것과 마주해도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기록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법. 그러나 유일한은 이것들을 보며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생물인지 아닌지, 생물이라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무생물이라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이 녀석들의 분석 작업에 들어가고 싶다만······.”
“멋져······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다레우? 이게 정말 다레우란 말이야······?”
바뀌어도 너무나 바뀐 다레우의 정경을 눈앞에 두고 정신을 놓고 있는 일행을 보고 있자면 아무래도 그 작업은 조금 뒤로 미뤄야 할 듯싶었다. 유일한은 피식 웃으며 일행의 상태를 확인했다. 격전을 치렀다더니 정말로 다들 많이 지치고 상처 입은 듯이 보였는데, 그 가운데 유독 나유나만이 활기가 넘쳤다.
“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일한 씨이이, 우리 저기서 결혼식 올려요오! 결혼시익!”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유일한이 한창 건설 중에 있던 성이었다.
선언 스킬로 세상의 마나와 물질들을 움직여 드래곤들이 살 곳을 마련하는 김에 엘프와 랑족들의 주거지, 자신과 일행이 머무를 곳도 짓다 보니 어쩌다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로망이 꿈틀거리는 바람에 아주 살짝 폭주한 감이 있었다. 그 결과 지금 이 일대는 1세대 판타지 소설에나 등장할 것만 같은 유럽풍 왕국이 되어 있었다.
“그래요, 허락해줄 테니까 이제 좋은 남자만 찾으면 되겠네.”
유일한은 자신의 팔 한 쪽을 붙잡고 꺄꺄 떠들며 즐거워하는 나유나의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았다. 그러나 나유나는 꿀밤을 맞아도 마냥 좋다는 듯이 헤실거리며 유일한의 팔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당연히 상대는 일한 씨밖에 없죠오! 사랑해요, 일한 씨!”
“언제는 포기하겠다더니?”
“포기(foggy)는 안개가 끼었을 때나 하는 말이에요오!”
“그때는 보통 배추를 얘기할 텐데.”
유일한은 기가 막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유나가 언제나 이렇게 촐싹을 떠는 것도 아니고, 아마 여태까지 힘들게 전투를 벌이다가 안전한 환경으로 돌아온 탓에 조금 더 과장된 반응을 하는 것이리라.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과 그녀의 뒤에 스르륵 나타난 사신을 막아주는 것은 아주 조금 다른 얘기였다.
“너의 그 포기할 줄 모르는 마음만은 인정해줄게. 하지만 그것이 너를 죽음으로 이끌 거야.”
“히이이익, 리에라 언니이!”
두 사람이 지치지도 않고 언제나와 같은 시트콤을 찍는 가운데(나유나에게는 호러 스페셜이었지만) 유일한은 일행을 돌아보며 손뼉을 쳤다.
“성 안에 개인실을 마련해뒀으니 다들 들어가서 씻고 쉬고 있어요. 천공성과 수호성이 착륙할 장소도 마련해놨으니 미스틱은 그곳으로 두 성을 옮겨놓고.”
[주인님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어마어마한 짓들을 저지르는구나.]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천공성과 수호성에 있던 이들이 전부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엘프와 랑족들은 이곳이 정말로 자신들이 살던 곳이 맞나 의심하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드래곤 군단 소속의 어린 아이들은(어린 아이라고는 보기 힘들 만큼 성장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다레우의 풍부한 마나 밀도에 만족하며 저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들 레벨 엄청 올랐네.”
“그야 정신없이 상위세계들을 돌아다녔으니 당연하죠. 죽은 이도 없는 건 아니지만요······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지금 당신의 모습이에요.”
에르타는 이전보다 아주 조금 키가 더 크고, 머릿결과 눈동자에서 어딘가 광채를 발하는 듯한 모습의 유일한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더욱이 그의 붉게 변한 눈동자에 새겨진 황금의 세로줄은 마치 드래곤을 보는 것만 같았다.
“유일한, 당신은 정말로 상위존재가 되었군요······.”
“맞아.”
유일한은 가볍게 그것을 긍정했다.
“다레우로 오지 말라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내가 다레우에 도착한 순간 상위세계로의 도약이 일어나는 걸로도 모자라서 여태까지 내게 복종의사를 표했던 인류가 살고 있던 하위세계들이 전부 다레우에 융합되는 바람에 세상의 마나가 폭주를 일으켰거든.”
“하위세계들이? 다레우에?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죠?”
역시나 에르타도 모르는 눈치였다. 유일한은 헬리에나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그녀 역시 처음 보는 현상인 모양이었다. 모든지 다 먹어치우는 그리드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는데 먹어치우는 것과 융합하는 것은 역시 조금은 다른 일인 것일까.
[자기에게만 있는 힘이야, 확실해. 보다 자신의 권능을 깊이 탐구해보는 건 어떨까? 아무리 기록 스킬을 마스터했다지만 아직 자기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쓰지는 못하잖아, 그렇지?]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아직 미숙하지······. 알았어. 그건 나 혼자서 조금씩 생각해보도록 할게. ······애들을 지켜줘서 고맙다, 헬리에나.”
[자기가 부탁한 일인걸.]
헬리에나는 그렇게 말하며 푸근하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와 비교해본다면 독기가 너무 많이 빠져 못 알아볼 지경이다. 유일한은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들어가서 쉬고 있어, 헬리에나.”
[쉬고는 있을게. 하지만 난 자기 곁에 있는 게 가장 좋은 휴식인걸.]
“······끙.”
그녀와 계속 마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낯이 간지럽고 리에라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그는 계면쩍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강미래를 들쳐 업은 채인 강하진이 서 있었다. 그녀가 헬리에나와 함께 일행을 지켜낸 일등공신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래 씨는 쓰러져서 못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고요?”
“아무래도 마나를 한계 이상으로 소모한 모양입니다. 그 탓에 녀석이 쓰고 있던 서클렛의 최대내구도도 많이 하락한 것 같은데······.”
“그건 제가 나중에 손을 보겠습니다. 우선은 그녀를 쉬게 해주세요.”
“부탁드리죠. 서클렛뿐만 아니라 미래 본인도.”
“······나중에 봅시다.”
강하진과 강미래가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아직 바깥에 있던 다른 이들도 줄줄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처음부터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던 헬리에나와, 놀란 눈으로 유일한을 살피고 있던 김예슬 뿐이었다.
“아들,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야? 너무 많이 바뀌어서 깜짝 놀랐어.”
“걱정할 쪽은 나지. 엄마야말로 괜찮아요?”
“엄마는 멀쩡하지, 그럼. 앞으로도 그런 놈들이 남아있을 걸 생각하면 조금 걱정되기는 한다만······.”
“괜찮아. 샘플도 확보했고, 앞으로는 굳이 두 패로 나뉘어 다닐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까.”
하필이면 자신이 상위존재로 도약해 세상을 정비하던 그 시간에 일행에게 마수가 닥쳤다는 사실에 제법 놀라기는 했지만, 상정 외의 적이 나타날 경우는 언제든 생각해두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다들 안전하게 자신의 곁으로 귀환했다는 것, 그리고 더 큰 위기가 닥치기 전에 자신이 무사히 상위존재로 도약하여 집단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아들, 장해. 아주 장해. 엄마는 아들이 해낼 거라고 처음부터 믿고 있었단다.”
“그야 엄마는 처음부터 나를 의심한 적이 없었지. ······고마워요, 엄마.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쑥스럽기는 하지만 이제부턴 전부 아들한테 맡겨둬.”
“오냐, 아주 믿음직하다.”
어머니의 눈에 어린 감정이 비단 기쁨 뿐만은 아니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세월 탐구하던 저 너머의 영역에 아들이 오롯이 도달했다는 사실에 아주 약간의 시기를 느끼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게 그녀의 아들이기에 납득할 수 있었다. 기특해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맡겨두라는 말에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 안심했다.”
김예슬은 붉게 광채를 발하는 아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실체가 있는 듯, 없는 듯 기묘한 감촉과 따스한 온도가 느껴져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았다.
“엄마도 잠깐 쉬고 올게. 남은 얘기는 그때 마저 하자꾸나.”
“응, 들어가서 쉬어.”
끝내 김예슬도 퇴장했다. 헬리에나는 사람들이 없어지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유일한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그에게 기대었지만 유일한은 굳이 그녀를 떼어내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계산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한 것에 대한 포상이었다. 아까 나유나를 적극적으로 내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유일한은 그렇게 행동하는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면서도, 어쩌면 이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 번만 봐줬다.”
[응응, 자기도 이젠 제법 초월자다운 면모를 보여주는걸. 그걸로 충분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기뻐.]
“넌 그렇게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게 제일 문제야.”
[후후훗.]
헬리에나는 아주 오랜만에 주어진 유일한과 단둘만의 시간을 제대로 만끽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일한은 드래곤 둥지와 도시, 별궁 건설에 선언 스킬을 사용하며 지상과 상공에 넘쳐나는 마나를 마구마구 써대고 있었다. 헬리에나는 장엄하게조차 느껴지는 창조의 광경을 느긋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는 문득 그에게 물었다.
[자기, 지구와 다레우를 합칠 생각이야?]
“가능하다면, 언젠가는.”
세계와 세계를 합쳐 보다 거대한 하나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시도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어쩌면 지구에 다레우와 통하는 게이트가 생겨난 그때부터, 유일한이 이 땅에 들어와 고대 엘프의 마법진을 얻게 된 그때부터 이 일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호의 의지에게 고대 엘프의 마법진을 흡수하게 해 그 넓은 세상을 뒤엎으려면 또 엄청 힘 써야겠는데.”
[분명 가능할 거야. 그래, 그러면 분명 자기가 지켜야 할 것들을 모두 지키는 게 쉬워지겠지. 후후, 정말 자기한테 어울리는 권능을 얻었는걸.]
“내가 어째서 이런 힘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상위존재집단뿐만이 아니다. 정체모를 에너지를 사용하는, 딱 봐도 엄청 나중에 반드시 유일한과 트러블을 일으킬 것만 같은 놈들과 조우하기까지 했다. 복선을 파괴하고 복선을 창조하는 유일한에게 라스트보스의 존재를 알고도 바보같이 당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 누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줘야겠지.”
[그거야, 자기. 완벽해······ 그래서.]
헬리에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체 이 세상에 드래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그것도 금방이라도 상위존재에 이를 것 같은 괴물들이?]
“뭐, 차차 소개해줄게. 마침 저기 몇 마리 오네.”
유일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보였다. 저 너머, 첫 번째 사냥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하는 드래곤 무리의 일단이 보였다.
그 선두에 서 있는 것은 물론 에흐야르의 고기와 피를 전부 먹어치워 백만 마리 드래곤의 리더를 맡은 레드 드래곤 루비. 294레벨로 떠났는데 돌아오는 지금은 벌써 296레벨이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다레우에 생겨나고 있는 다른 몬스터들도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버님, 루비가 돌아왔습니다!]
[······아버님?]
헬리에나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유일한은 다시금 살풋 웃었다.
“소개해준다고 했잖아.”
상위 집단 용의 둥지, 그 무시무시한 잠재력이 발아하고 있었다.
< Chapter 42. 내가 네 아빠다. - 5 > 끝
ⓒ 토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