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43. 너희도 나와 같다. - 5 >
[레그나(Legna)의 기록을 일부 분석했습니다.]
[선언 스킬의 레벨이 43이 되었습니다.]
“좋아, 일단 고유명까지는 파악했다.”
[결코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리라고 믿고 있던 모든 자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군.]
“당연하지. 모든 복선을 파괴하고 창조한다, 그것이 바로 나야.”
멋지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냥 변태적인 창조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유일한은 신의 수작에 따라 사체가 붕괴되어가는 과정에서 기록을 수집하며 부족한 정보를 보충하기를 서너 번 가량 반복한 끝에, 드디어 자신의 창조능력을 발동하여 그것을 막고 복원시키는 악마와 같은 방법을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유일한이 그 방법을 깨닫고 시도하여 성공에 이르기까지 희생된 이형의 천사, 레그나의 사체는 총 다섯 구. 그 이후로 모든 사체가 분석과 분해, 재창조의 과정을 거쳐 온전한 사체의 모습으로 유일한의 눈앞에 자리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그 과정에서 선언 스킬은(기록 스킬의 상위 스킬이기에 기록 스킬 대신 성장하는 것이다.) 52레벨까지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스킬 성장 완전 쉽다니까.”
[수만 년 고련하여 상위스킬의 경지에 오르는 자들이 들으면 굉장히 분노하겠군.]
“내가 알 바 아니니까 괜찮아. 그나저나 레그나라······.”
유일한은 굉장히 무례한 말을 서슴지 않고 지껄이며 천사의 이름을 읊조려보았다.
Legna, 천사를 뜻하는 Angel을 뒤집어놓은 것과 같은 단어다. 영어가 아닌 다른 지구어로 이해해도 마찬가지였으며, 다른 세상의 언어, 하늘의 언어로 바꾸어보아도 천사를 뒤집어놓은 단어로 파악되었다. 어쩜 이렇게나 안이할 수 있단 말인가!
“미래 씨한테 접근해서 지껄이는 패턴이나 골렘한테 붙이는 뻔하디 뻔한 네이밍 센스로 볼 때 아무래도 이놈은 가짜 보스고 뒤에 진 보스가 따로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인데······.”
[흑막을 추측하는 근거가 상당히 빈약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군······.]
“쯧, 넌 아직 뭘 모르는구나, 에흐야르.”
게임이나 소설에서 대개의 주인공은 항상 강하거나 빠른 속도로 강해진다. 그러나 주인공이 엄청나게 강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그들에게 위기가 없으면 극적이지도 않고 재미도 없기 때문에, 크리에이터는 언제나 ‘주인공이 인지하지 못하던 요소’를 넣어서 기습의 묘리를 살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플레이어도 당황하고, 주인공도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탓에 한 방 먹어 분루를 삼키며 복수를 다짐하는 전형적이지만 그만큼 재미난 전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렇게 기습을 당하고 있으면 빡치거든. 따라서 우리는 방심과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거야. 언제나 이 뒤에 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대비해야 하는 거지.”
[절망의 드래곤이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의 지배자여. 정말 치열하게 살고 있구나.]
레그나 사체의 분석을 모조리 끝낸 유일한은 온전한 상태로 돌아온 레그나의 사체 여섯 구를 일렬로 늘어놓았다.
지금까지가 놈의 생성 원리와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신이 이런 놈을 얼마나 더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그대로 써먹든 이것의 카운터를 준비하든 해서 놈을 맞설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대로 써먹는 건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파괴되었던 마법진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기는 했다만 그 마법진을 다시 발동시킬 에너지원이 없으니까.”
그 에너지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얼추 감을 잡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 에너지원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혼을 태우면 맞아떨어지는 에너지가 탄생할까?”
[혼에서 감정을 이루지 않는 근본 영역만을 추출하면 얼추 비슷하게 나올 것 같아요, 주인님!]
“그래그래, 우리 이터널 플레임 똑똑하구나. 길게 부르기 귀찮으니까 앞으로는 레이라고 하자.”
[네! 야호!]
길게 부르기 귀찮아 별명을 만들었을 뿐인데도 기뻐 죽겠다는 듯이 환호하는 이터널 플레임, 레이. 모든 이가 이 녀석처럼 단순하면 전쟁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텐데, 같은 같잖은 생각을 하며 유일한은 다시금 레그나의 사체 앞으로 돌아섰다.
“혼을 태운다, 라······. 고유존재의 완전한 소실을 대가로 움직이는 골렘이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어쩌면 세상을 없애려는 것도 골렘을 움직이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를 수집하기 위한 것 아냐? 세상도 파괴하고 골렘도 늘리고 일석이조 같은 느낌으로.”
[실로 로드가 말하던 ‘악역’에 어울리는 일이군.]
“혼, 혼이라······.”
유일한을 이루는 근본 중에는 분명 혼을 관장하는 사신의 영역도 포함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그는 전직을 하던 그 순간부터 신에 가까운 수행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용의 둥지의 수장에 이른 지금도 혼을 관장하는 그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쩌면······.”
신은 이미 혼을 이용해 힘을 만들어내는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러니 만약 유일한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가 내딛어야 할 그 한 걸음은 혼의 영역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녀석들도 마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던 건 아냐. 그저 소재의 힘을 증폭시켜 마나를 극한에 가깝도록 억압하고 억눌렀을 뿐이지.”
이것은 옳은 길이 아니다. 사도이고 외도이며 부조화다. 유일한은 설령 자신에게 그런 힘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써먹을 생각이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유일한은 장고 끝에 한 손을 들어 휘둘렀다. 그 손끝에서 뻗어나간 이터널 플레임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 레그나의 사체를 한꺼번에 감싸며 타올랐다.
[괜찮겠는가?]
“응. 자료는 충분히 얻었고, 선언 스킬도 충분히 성장했으니까.”
[다 나뉘어라! 깨끗이 정화되어라! 에잇!]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그곳에는 레그나의 사체가 수십 종류의 금속과 각종 무기물로 나뉘어 정렬해 있게 되었다. 기껏 마법진과 사체를 완벽하게 복구해놓고도 그것을 무로 되돌린 것이다.
에흐야르가 내심 감탄하고 있으려니, 유일한은 그것을 앞에 두고 씩씩하게 말했다.
“난 다른 길을 걷겠어.”
[그것이 주인이 바라는 옳은 길인가?]
“아니, 이기는 길. 무슨 수단을 쓰든 이기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나의 길이다!”
[······.]
그래선 신이라는 작자가 하는 짓과 별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에흐야르는 마음속으로 태클을 걸었지만 차마 그 의사를 유일한에게 전달할 용기는 없었다. 유일한은 일단 자신의 인벤토리 안으로 그것들을 싸그리 밀어 넣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할 일이 또 생겼구나. 앞으로 바빠지겠네.”
[정말 중증의 워커홀릭이군······.]
유일한이 강림 스킬을 취소한 것은 그로부터 32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때쯤에는 이미 용종과 드래곤 가운데 일부가 많은 숫자의 몬스터를 죽여 스킬과 레벨을 성장시킨 후였기에, 굳이 유일한이 강림 스킬로 그들을 백업하지 않아도 충분히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한 시점이었다.
[자기, 무슨 일 생긴 거야?]
[일한아? 혹시 또 다른 데 어디 가야 하는 거야?]
강림 스킬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헬리에나와 리에라가 그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용의 둥지라는 이름으로 같이 묶이고 나서부터 가능하게 된 일이었다. 유일한은 그녀들을 포함해 자신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전원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금부터 준비할 것이 있어 혼자 작업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용종을 도와서 세상을 마저 정리해주세요. 아마 그쯤엔 이 세상을 커버할 만큼은 충분히 완성되어 있을 테니까.]
[파멸의 덫이군요?]
에르타의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아깝다. 유일한은 히죽 웃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파멸의 덫이지만 파멸의 덫이 아냐.]
[······또 절 놀리려는 건가요? 그럼 뭔데욧?]
[글쎄, 이름을 뭘로 할까······ 아, 그래.]
유일한은 잠시 고뇌하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재생의 덫, 으로 하면 되겠네.]
[뭔가 또 굉장히 불길한 예감이 드는 네이밍이군요······.]
[안심해, 눈의 착각이야.]
[뭐라구욧!]
그는 드래곤과 용종을 보호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료를 한 번 훑어본 후, 용종이 밀리고 있는 지역에 가볍게 장판을 강화해준 후 천공성으로 올랐다.
[주인님, 이제부터 또 엄청 바빠지겠네?]
“응,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너도 엄청 바빠질 거야.”
[이미 충분히 바쁜데?]
불만에 가득 차 말하는 미스틱. 용의 둥지에 속하게 되어 기뻐하던 것이 바로 얼마 전 같은데 벌써부터 배은망덕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물론 유일한이 그녀를 많이 부려먹은 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일한이 전가의 보도를 꺼내어 들었다.
“네 몸 만들어줄게.”
[그 말씀을 해주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이 로드!]
미스틱의 충성도가 100 상승했다! 유일한은 헤죽헤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몸을 갖게 된다고 해서 좋은 일은 그리 많이 없을 텐데, 지금은 그 기쁨을 만끽하도록 놔두는 것도 좋겠지!
[내가 도와줄 일 뭐 있어, 주인님? 뭐든지 말만 해! 나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안 그래도 이제 곧 생길 테니까 지금은 그저 대기만 하고 있으렴.”
[응? 응, 응······?]
분명 좋아해야 할 일인데 어째서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아직 실체도 없는 미스틱이 한기를 느끼며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놔두고 유일한은 곧장 공방을 찾았다.
“일단 설계부터 후딱 끝내볼까. 재생의 덫, 재생의 덫이라······.”
신이 어떤 수작을 부려올지 모르는 지금 기존의 파멸의 덫을 그대로 만드는 것은 위험하다. 과거 유일한이 만들었던 개량버전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합금으로 인한 구조의 완전한 변화와 그것에서 파멸의 덫 이상을 성능을 끌어내는 일인데, 물론 유일한은 여기에 써먹을 아주 좋은 도구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기적의 요람.”
허공에 붉고 거대한 원통이 생겨났다. 유일한과 동료들, 휘하 수하들 몇 명까지 상위존재로 탈바꿈시키면서 점점 더 많은 기록을 얻어 성장하고 있는 기적의 요람은 유일한의 의사를 완벽하게 받아들여 모습을 조금씩 바꾸었는데, 수십 초에 달하는 변화 끝에 그것은 실로 거대한 화덕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레이.”
[알겠어요, 주인님!]
이터널 플레임이 화덕 안에 가득 차올랐다. 유일한은 우선 레그나를 해체하며 얻은 하르카늄과 페시놈을 전부 화덕에 쏟아 붓고, 아직까지 아공간 안에 남아있던 각종 몬스터 사체로 만든 금속과 합금, 여태 거쳐 온 세상에서 수집해온 금속을 전부 때려 박았다.
[이렇게 난폭한 방식으로 정교한 합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부족하면 추가하고, 많거든 덜어내면 돼. 이만한 재료를 가지고 만족스러운 물건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죽는 쪽이 나을 거야.”
유일한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으로 액체 금속, 엘하즈라를 전부 담아놓았던 통을 꺼냈다.
수 마리의 레그나 사체로부터 끌어 모아 복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은 극히 미약했다. 물론 상관없다. 앞으로 이 금속을 수급할 장소는 많이 남아 있으니까.
“큿.”
손가락 끝을 베어 피를 낸다. 마나를 듬뿍 담아 조금 많이 내었다. 유일한의 마나를 듬뿍 담은 피는 엘하즈라와 무리 없이 섞여 그것을 유일한에게 완전히 종속시켰다. 앞으로도 이런 과정을 많이 거쳐야 할 것을 생각하니 유일한은 아주 조금 우울해지고 말았다.
“블랙스미스, 마나 크래프트, 소울 인챈트.”
차례로 세 가지의 스킬을 활성화시키고, 엘하즈라를 허공에 띄워 조물거렸다. 그의 마나에 저항하기도 잠시, 엘하즈라와 섞여 공명하는 유일한의 피가 그것의 구조를 서서히 바꾸어나갔다. 엘하즈라는 끊임없이 진동하면서도 끝내 실로 거대한 망치와도 비슷한 무언가의 형태로 고착되었다.
“자.”
유일한은 그것을 그대로 내려쳐 화덕 그 자체를 두드렸다. 이미 유일한의 대장장이 작업은 물질과 도구에 구애되는 수준을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되는가?]
“물론이지. 내 마음이 원하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알아서 완성될 거야.”
유일한의 창조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던전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며 그와 동시에 세상의 희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유일한의 일행이 우연히 조우하고 포획하는 데 성공한 레그나의 사체로 인해, 모든 세상의 역사와 운명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 Chapter 43. 너희도 나와 같다. - 5 > 끝
ⓒ 토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