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세이버(2)
부스럭-
수풀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20대 초반의 앳된 외모. 깔끔한 단발머리. 방패 문양이 새겨진 망토는 저 여자 역시 세이버 길드의 일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처음 보는데.’
두 명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렇다는 건 우빈이 던전에 갇히고 난 뒤 들어온 플레이어라는 건데.
“너도 쓸모가 있었구나.”
“전 언제나 유능했었는데요.”
“유능은 개뿔, 그런데 이게 다 뭐냐. 이미 한 따까리 한 모양인데.”
“그러게요. 으악. 내장 봐. 으 냄새.”
사내가 코를 막으며 우빈을 향해 다가온다. 이윽고 뭔가를 발견한 듯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 선배! 저거 마검 기간테스 아닙니까? 그러면 방금 뜬 메시지가 여기서 일어난 일이라는 건데··· 저 고깃덩어리가 도민준이라고?”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도민준과 마검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하긴 도민준이 준 보상은 필드 보스 몬스터에 필적했다. 그만큼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다는 말이니까. 유명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화민서 마스터님,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찾아다니시더니. 결국 성공하셨네요. 배신자라는 건 알았지만, 화려하게도 처리하셨네요. ”
단발의 여인, 서희빈이 짝짝 박수치며, 화민서에게 말을 건다.
‘마스터라고···’
마스터라하면 길드의 수장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저 여자 등장부터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거물인 모양이다.
서희빈의 말에 화민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귀찮아질 거 같은데.’
아무래도 도민준을 죽인 게 화민서라고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죽였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될까.
‘흠···’
우빈이 앞으로의 일을 그리며, 고민하던 그때였다.
“이봐. 너 척결 길드원 맞지? 마검 구경 좀 하자. 꼭 한번 만져보고 싶었거든.”
세이버 길드원의 사내, 최수호가 우빈의 손에 들린 마검을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안 그래도 저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새끼들의 밑에서 일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짜증 났다.
그런데 어린놈의 새끼가 다짜고짜 반말에 동의도 없이 남의 아이템에 손을 덴다.
후웅- 퍽!!!
우빈의 다리가 사내의 복부를 후려 찬다. 콰과과과- 최수호의 다리가 대지를 쓸며 뒤로 밀려난다.
“이 새끼가 쳐 돌았나. 길마 옆이라고 눈에 뵈는 게 없지?”
최수호의 표정이 무겁게 일그러진다. 전력으로 후려 찼지만, 별다른 타격은 없어 보인다.
“안 그래도 신입 영입 같은 잡일 맡아서 짜증나는 거 애써 참고 있는데. 씨발, 넌 뒤졌다.”
스르륵-
최수호의 손아귀로 기다란 장검과 방패가 튀어나온다.
강렬한 적의가 우빈을 향해 쏘아진다. 우빈은 차갑게 눈매를 좁히며 사내를 응시했다.
‘죽일까.’
애초에 세이버 길드원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신경도 안 쓰겠지.’
보아하니 저 둘은 우빈이 던전에 갇히고 들어온 신입 길드원이다.
입지도 없을뿐더러 위에선 신경도 쓰지 않는 말단.
그런 인물을 죽인다고 녀석들이 신경이나 쓸까? 죽었는지조차 모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 둘을 죽이면 우빈이 가지는 페널티는 컸다.
애써 올려놓은 선악 수치를 시작으로 민주희의 신뢰까지 잃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불평을 듣고 있을 정도로 우빈은 성격이 좋지 못했다.
“딱 잡일이나 맡은 수준이니까 줬겠지. 내가 보기엔 그 잡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할 실력으로 보이지만.”
“뭐? 이 새끼가!”
우빈의 도발에 최수호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던 그 순간이었다.
“그만!!!!!”
거대한 고함과 함께. 쿠웅- 거대한 압력이 전신을 짓눌렀다.
띠링-
[진룡의 포효가 당신을 짓누릅니다.]
[칭호:한계를 뛰어넘은 용사가 진룡의 포효를 저항합니다.]
“윽!”
“꺄악!”
서희빈과 최수호가 압력을 못 이기곤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화민서는 가만히 서서 이를 악물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차가운 살기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잖아요! 길마라는 작자가 부끄럽지도 않아요!”
서희빈이 공격적으로 쏘아붙인다. 화민서는 그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우빈을 한번 스윽 훑어보곤 시선을 돌린다.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저 사람은 우리 길드원이 아니야.”
화민서가 바닥에서 덜덜 떨고 있는 나신의 여자에게 다가가, 착용하고 있던 망토를 덮어준다.
“도민준을 죽인 것도 내가 아니고.”
피를 흘리며, 포박당한 신입 용사들을 풀어준다.
주변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화민서는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내며 읊조렸다.
“싸울 거면 딴 데 가서 싸워. 쓸데없이 소란 일으키지 말고.”
그 말에 분노를 표출하던 서희빈의 눈이 커다래진다.
‘도민준을 죽인 게 저놈이라고?’
서희빈의 시선이 우빈으로 향한다.
며칠은 못 씻은 듯한 떡진 머리.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낡은 하의 갑옷과 신발.
딱 봐도 엘리드에 제대로 적응조차 하지 못한 어중이떠중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도민준을 죽였다고? 저렇게 처참하게?
‘어디서 거짓말을···’
서희빈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거짓말을 할 거면 어느 정도 말이 되는 거짓말을 해야지, 우리를 병신으로 보는 게 확실했다.
‘신경 쓰인다 이건가.’
대충 이해는 갔다.
아무리 타락 용사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척결 길드의 길드 마스터라해도 이런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게 소문이 나면 명성에 금이 갈 테니까.
대충 상황을 파악한 서희빈은 표정을 굳히며 최수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내가 쓸데없이 나대지 말랬지.”
“저 새끼가 먼저. 하아··· 죄송합니다. 빨리 신입 용사분들부터 모시죠.”
최수호가 억울하단 표정을 지으며 신입 용사를 향해 다가간다.
‘어딜 날로 먹으려고.’
우빈은 그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신입 용사를 처음 발견한 것도, 위협하던 악인을 처치한 것도 전부 우빈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해놓고 인제 와서 신입 용사를 쏙 빼가겠다?
“이제 안전합니다. 주희씨, 동료분들 좀 살펴주세요.”
“네? 네!”
우빈의 말에 수풀에서 정신을 놓고 있던 민주희가 다급히 뛰어왔다.
“괜찮으세요? 제가 도와주실 분 모셔왔어요.”
“고생하셨어요.”
“흑···흑···”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타락 용사에게 당했던 세 사람이 민주희의 곁으로 다가간다.
우빈은 그 모습에 바로 쐐기를 박았다.
“저분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구한 것도 저입니다. 쓸데없는 관여하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아직 특성을 파악하지 않은 지금, 민주희를 제외한 3명의 신입 용사에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민주희만 있어도 18회차 특전을 누릴 수 있고, 어지간한 특성이 아니고서야 민주희의 특성보단 안 좋을 게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런 이득 없이 저들을 넘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쓸데없는 관여? 하아··· 진짜 아까부터 빡돌게 하네.”
“넌 좀 닥치고 있어.”
우빈의 말에 최수호가 울컥한 듯 주먹을 말아쥐었지만, 서희빈이 최수호를 말리며, 앞으로 나선다.
“어디 길드에서 나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분들은 물건이 아닙니다. 먼저 발견했다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었어도 저 여자가 저런 주장을 했을까? 그저 우빈에게 간 주도권을 빼앗고 싶은 것뿐이다.
“소유권···. 저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섣부르게 오판하고 무례한 게 둘이 참 닮으셨네요.”
“무, 무례?!”
빠직-
우빈의 말에 서희빈의 이마로 핏줄이 솟구친다.
“저분과 계약을 했습니다.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도와주기로. 그쪽 같은 수상한 사람으로부터 지킬 의무가 있는 거죠.”
“뭐? 수상? 우리가 누군지 몰라?!”
“누구신데요?”
“하아··· 어이가 없네.”
최수호가 자신 있게 망토를 펼쳐 보인다. 견고한 방패가 고풍스럽게 새겨져 있다.
“세이버 길드잖아. 명실상부 엘리드 1위 길드! 우리가 수상하면 누굴 믿는다는 건데!”
엄지를 지켜 새우며 소리치는데, 자신감을 넘어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말에 우빈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1위라고.’
우빈이 길드에 속해 있을 때만 해도 세이버는 랭크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삼류 길드였다. 그런데 고작 5년 만에 쟁쟁한 1세대 용사를 누르고 1위에 올랐다고?
꽤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게 뭔 상관이죠?”
“뭐?”
“당신이 1위 길드 소속인거랑 수상하지 않은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이 새끼가 진짜···.”
우빈의 대답에 최수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듯한 표정이다.
“선배 더는 못 참아요. 말리지 마세요. 척결 길드원도 아니라잖아요!”
최수호가 이성을 잃은 듯 앞으로 나선다.
여태까지 최수호을 컨트롤하던 서희빈 역시 잠잠하다. 아무래도 우빈의 대꾸가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최수호의 날카로운 살기가 피부를 찌른다.
‘130정도 되려나.’
우빈은 최수호의 전력을 빠르게 파악했다.
우빈이 던전에 갇히고 길드에 들어왔단 건, 엘리드에 전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뉴비.
아무래 레벨을 높게 쳐줘도 130은 넘기 힘들 걸로 예측됐다. 그러나 착용한 장비의 수준은 준수했다.
풀 악세에 백야 갑옷 세트와 막야 세트.
적정 레벨 160에서 드랍되는 희귀 장비였다. 전부 길드에서 지원받은 거겠지.
‘할만하겠는데.’
지금의 전력으론 약간 무리가 있었지만, 조금 전 얻은 보상으로 전력을 보강한다면 충분히 할만한 수준으로 판단됐다.
우빈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최수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크로노스 던전에서 나와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비약적으로 성장한 주먹 강타 1방이면 전부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민서가 보여준 행동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주먹 강타 없이 상대를 제압할 힘이 필요했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마침 잘됐네.’
어느 정도 성장도 이루어냈겠다. 우빈은 지금 가진 전력을 체크하기로 마음먹었다.
“병신 새끼들은 꼭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더라.”
최수호가 우빈을 향해 인상을 구기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질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우빈의 몰골은 상당히 초라했다. 제대로 씻지 못한 몰골에 상의는 입지도 못한 그야말로 거지꼴. 무시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띠링-
[최수호 용사님에게 PVP를 신청하시겠습니까?]
우빈은 그런 반말남을 보며, 하나의 시스템을 열었다.
플레이어 간의 살생을 막고, 선악 수치에 구애받지 않은 채 마음껏 싸울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승리 상품을 선택해주세요.]
이 시스템엔 특별한 기능이 있었다.
바로 승리 시 얻을 수 있는 내기 상품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신 있는지 볼까.’
우빈은 내기 상품을 선택하곤, 입꼬리를 올렸다.
“씨발, 뭘 쪼개. 쫄리면 지금이라도 빌어.”
“너야말로 쫄리면 거절해도 돼.”
“뭐? 무슨 개소리야.”
최수호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어이없어한다.
우빈은 그 모습을 보며, 시스템창을 보냈다.
자고로 내기라 하면 걸린 금액에 상응하는 보상을 걸어야 콜을 할 수 있는 법.
‘올인.’
띠링-
[최수호 용사님에게 PVP를 신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볼 수 있었다.
“뭐, 뭐야···”
자신감 넘치던 최수호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오르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