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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정리(2) (16/107)

15. 정리(2)

크르릉-크르릉-

펜리르의 숨소리가 대기를 타고 흐른다.

‘펜리르라고···’

그 모습에 화민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펜리르는 여태까지 딱 3마리만 등장한 초희귀 탈것이다. 

화민서가 가진 유니콘보다 약 2배가량 비싸며, 3배 뛰어난 성능을 자랑한다. 그런데 저걸 어떻게 구한 걸까.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우빈이 펜리르의 등 뒤에 올라타 화민서에게 말한다. 우빈의 시선이 돌아가며 펜리르의 고삐를 움켜쥔다. 

‘어떻게 하지.’

화민서는 입술을 잘끈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라면 저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 저 사내의 사상을 검증하고 싶었는데···

화민서의 머릿속으로 좋은 수가 번뜩였다.

“잠시만요! 혹시 마검을 파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화민서의 제안에 우빈의 시선이 화민서로 향한다.

“마검을요?”

“네, 평균 시세보다 비싸게 사드리겠습니다.”

우빈의 반응에 화민서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됐다.’

솔직히 화민서에게 마검은 필요 없는 아이템이었다. 

마검은 마스터의 유산이기는 하지만, 화민서의 목표는 오직 복수뿐이었으니까.

복수의 대상이 사라진 지금, 복수를 대신한 저 사내가 궁금했다.

“가격을 듣고 생각해보죠.”

“전부 룬으로 사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우선 저희 길드에 가셔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시죠. 못해도 2,500만 룬 이상은 쳐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우빈의 눈빛이 좁게 가늘어진다.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생각 못 하게 쐐기를 박아야 했다.

“원하신다면 윙슈즈도 얹어 드릴 수 있습니다.”

스르륵-

화민서의 손 위로 하나의 신발이 떠오른다. 

윙슈즈. 

하늘을 걷게 해주는 사기적인 효과를 시작으로 도약 공격력이 200% 증가하는 히든 아이템.

마검과 마찬가지로 엘리드에 단 하나뿐인 전설 아이템으로서 추정 가치는 1,500만 룬을 뛰어넘는다.

윙슈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확실히 나쁘지 않네요.”

우빈이 긍정적으로 답해왔다. 

“저도 여기서 바로 거래하고 싶지만, 윙슈즈 말고는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없어서요. 우선 저희 길드로 모시고 싶은데.”

“생각해보겠습니다.”

“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다음에 길드로 직접 찾아가죠. 척결 길드라고 했죠.”

“네. 그렇긴 한데.”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망했네.’

다음에 길드로 찾아오겠다는데, 붙잡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소한 보험을 들어두자.

판단을 내린 화민서는 인벤토리에서 2개의 물건을 꺼냈다.

“언제든 마음 바뀌면 찾아와주세요.”

[이동 스크롤:척결]

[자필:화민서]

첫 번째 아이템은 척결 길드로 이어진 이동 스크롤. 두 번째 아이템은 화민서의 자필이 적힌 종이였다.

“자필은 곤란한 일이 생기시면 써주세요. 하몬과 메아로카 진영이라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우빈은 아이템을 받아들곤, 고개를 끄덕인다.

화민서는 그 모습을 보며 아쉬워했다. 

더 이상 붙잡을 명분이 없었기에, 이대로 떠나보내려 했다. 그대로 출발할 줄 알았는데, 우빈이 시선을 돌려 화민서를 바라봤다.

“혹시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뭘 부탁하려는 걸까. 설마 선금이라는 명분으로 돈이라도 뜯으려는 건가.

“저분들 좀 잘 부탁드립니다.”

“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상상 밖의 내용이었다.

“직접 케어해주셨으면 해서요. 그럼.”

우빈은 그 말을 남기고 고삐를 잡아당겼다.

크르릉- 

펜리르가 거친 숨을 내쉬며, 펑!!! 쏘아진다. 

바람이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화민서는 멀어져 가는 우빈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착각이었나···’

이해할 수 없는 무력. 

도민준을 시작으로 최수호까지. 망설임 없는 살생에,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엘리드에 구른 지 10년이 넘어갔지만, 생판 처음보는 타인을 챙겨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10명도 채 보지 못했었으니까.

‘나중에 찾아온다고 했으니까.’

혹시 모를 보험도 들어놓았겠다.

“어두워지기 전에 움직이시죠.”

화민서는 신입 용사 3명을 파티에 초대하곤, 꽈지직- 스크롤을 찢었다.

***

“흑···흑···”

서희빈의 눈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너무 억울했다. 코인으로 전재산을 날렸을 때도, 이것보다는 덜 억울했었다.

‘왜 이렇게 됐지.’

무려 마스터가 선물해준 귀중한 아이템을 내기 PVP로 날려 먹다니.

욕심을 부려서일까. 최수호를 너무 믿었다. 설마 최수호를 가지고 놀 수준의 고수였을 줄이야.

서희빈은 강우빈과 처음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제대로 된 아이템조차 없는 거지. 우리를 보자마자 시비를 걸며, 도발해왔다. 

‘설마···’

약자 코스프레로 방심을 유발한 뒤, 도발, 그 이후 내기 PVP.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전부 철저히 계획된 행동으로 느껴졌다. 

“젠장! 젠장!!!”

엘리드에서 구른 지 6년이 넘어갔다. 하지만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강우빈이라고 했지.’

서희빈의 눈으로 분노가 차오른다. 

어떻게든 복수해야만 했다. 그 새끼를 찾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신입 용사!’

서희빈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아···”

원래 신입 용사가 있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찢어 죽이고 싶은 강우빈도, 척결 길마인 화민서도 전부.

‘뭐라고 보고를 올려야 하지.’

꽈드득-

분노에 잇몸이 짓이겨져 피 맛이 입안 가득 고인다.

“정신 안 차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괜스레 옆에서 멍 때리는 최수호에게 윽박질렀다.

최수호는 넋이 나간 듯 바닥을 내려다볼 뿐 별다른 반응이 없다.

“하아··· 내가 뭘 바라냐. 가자.”

서희빈은 최수호의 손을 붙잡곤 끌어당겼다. 하지만 따라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열받아 죽겠는데, 빠져 가지고.

“야!!!!”

서희빈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

그러자 볼 수 있었다.

최수호의 어깨가 미묘하게 떨린다.

뚝-뚝-

바닥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끄윽거리며 울먹인다.

“야··· 정신 안 차려···”

다그치고 싶었지만, 미묘한 떨림에서 최수호의 감정이 느껴졌다.

‘하긴, 여태까지 제대로 져본 적이 없으니까.’

최수호.

그는 엘리드에 전이된 15회차 용사였다. 

사기적인 특성으로 세이버에 들어와, 그야말로 승승장구. 미친 듯한 성장을 보여줬다.

아무도 최수호를 무시하지 못했다.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최수호가 PVP에서 처참히 졌다. 아니 죽음에 이르는 타격을 입었다. 충격을 뛰어넘어, 자존심이 꺾였을지도 몰랐다.

뭐라고 말해야 기운을 차릴까. 

‘위로받고 싶은 건 나라고.’

서희빈이 갑작스러운 최수호의 눈물에 당황하던 그때였다. 

최수호의 호흡이 진정되는가 싶더니, 소매로 눈을 벅벅 비빈다. 이윽고, 최수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분해요.”

“······.”

“너무 분해서 열받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자신감이, 아니 자존감이 깎여나간 게 보였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말주변이 없는데, 사람을 참 곤란하게 만든다.

“하아···”

고민 끝에 서희빈은 최수호의 앞에 섰다. 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뗐다.

“할 수 있는 게 왜 없어.”

“······.”

“너 레벨 낮잖아.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 맞추고, 때 되면 각성도 하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불평질이야.”

그 말에 최수호의 눈빛이 변한다. 꺼져있던 눈에 빛이 떠오른다. 그 모습에 서희빈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계속 그러고 있던가, 나는 간다.”

“잠깐만요! 같이 가요!”

최수호가 길잃은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온다.

“선배 죄송해요.”

“뭐가?”

“저 때문에, 마스터한테 받은 반지 뺏겼잖아요.”

“아, 그거. 걱정하지 마. 네 이름으로 600만 룬 달아놓았으니까.”

“네? 왜요. 그거 추정 가치 340만 룬이던데.”

“230만 룬도 준다며.”

“그러면 더 이상하죠. 더하면 570만인데.”

“이자 몰라?”

여느 때와 같이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서희빈과 최수호는 발걸음을 옮겼다.

***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속.

띠링-

[비탈의 영혼석을 사용하였습니다.]

우빈의 앞으로 묵직한 중세기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을 경계해.”

혼자라면 필요 없는 작업이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명령을 내렸다.

철벅-철벅-

육중한 쇳소리가 주변을 배회한다.

‘이거면 대충은 안전하겠고.’

우빈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느꼈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피어오른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뭔가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평온인지. 고통이 없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갇혀있었다.

‘한 새끼는 잡아 올 걸 그랬나.’

배신자 새끼들이 어디에 있으며 뭘 하고 있는지 정보가 필요했다.

세이버 길드원인 서희빈이나 최수호라면 그 새끼들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명 정도는 납치해올 걸 그랬는데.

‘가만히 안 있었겠지.’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딱 봐도 도리를 중요시하는 화민서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까. 

이미 지나간 일은 잊고 새로운 플랜이 필요했다. 정보를 얻으면 가장 좋은 장소는 사람이 모이는 곳.

‘여기서 가까운 영지는 부신인가.’

부신은 하몬 왕국에 속한 중립 영지로서 타국의 상인들이 많이 몰리는 무역 도시이다.

가서 정보를 수집한다면 원하는 정보는 전부 얻을 수 있을 터. 문제가 있다면 거리가 좀 있다는 것 정도인데.

꼬르륵-

계획을 세우던 그때,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까.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크로노스의 던전에선 배고픔이라는 감각은 사치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배가 고팠다. 피곤했다. 

“이거 드실래요? 혹시 몰라서 챙겨왔는데.”

꼬르륵 소리를 들은 건가. 민주희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우빈에게 건넸다. 

잘 익은 고기였다. 

익힌 지는 좀 지난 듯 식어있었지만, 윤기가 흐르는 게, 맛있어 보인다.

서희빈이나 민주희에게 받았다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는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걸 왜 안 먹고 나한테 주는 거지.

‘뭘 믿고 날 따라온 거야.’

애초에 민주희가 우빈을 따라온 것 자체부터가 이상했다.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지켜준다고 계약을 했다고는 하나, 민주희에게 있어 우빈은 오늘 만난 낯선 존재이다.

우빈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도움을 청할 수조차 없는 야생. 그런데 뭘 믿고 우빈을 따라온다고 한 걸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정도로 믿고 있는 상황이라면 약간의 신용을 더 하는 것으로 두터운 신뢰를 형성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우빈은 민주희가 건넨 고기를 들곤, 크게 베어 물었다. 

치아가 표면을 짓누르자, 육즙이 왈칵 터져 나온다. 

짠기와 달콤함에 침샘으로부터 알싸한 통증이 느껴진다.

‘맛있다.’

순식간에 고기는 사라졌다.

‘부족해.’

다시 돌아온 입맛이 뇌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치킨, 투김, 떡볶이. 수많은 음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씻고 싶었다. 따듯한 침대에 누워 편히 자고 싶었다. 여태까지 누리지 못한 욕구가 전신을 뒤덮었다.

‘씨발 새끼들.’

우빈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진다.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고작 고기 한 점 먹는 행위조차, 편히 눈을 감는 휴식조차 누리지 못하게 만든 그 새끼들에게 이가 갈릴 정도로 화가 났다. 

그 시간이 무려 5만 년이다. 어떻게든 갚아줘야만 했다.

‘그냥 바로 출발할까.’

꼬르륵-

우빈이 분노에 이를 갈던 그때, 이번엔 민주희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흠!”

민주희가 얼굴을 붉히며, 기침한다. 민망했는지, 갑자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뭐가요?”

“그분한테,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

“아, 네.”

출발 직전 화민서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말하는 듯싶었다.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저 세이버에게 넘기지 말고 직접 케어하라는 걸 돌려서 말한 것뿐이었으니까.

대충 배도 채웠겠다. 

우빈은 못다 한 정비를 이어나가기로 판단을 내렸다.

가장 처음 확인할 건, 민주희만이 열수 있는 보급 상자를 여는 것.

“이것 좀 열어주시죠”

우빈은 민주희에게 18회차 보급 상자를 건넸고,

[18회차 용사 전용 보급 상자를 열었습니다.]

강렬한 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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