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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부신(1) (18/107)

17. 부신(1)

“여기서부터는 걸어가겠습니다.”

부신까지 대략 1km가 남은 시점, 우빈은 펜리르에서 내렸다. 

굳이 펜리르를 숨길 이유는 없었지만, 정현태가 저기 있다면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 10분을 걸어갔을까.

“와··· 엄청 크다. 진짜 지구가 아니구나···”

민주희가 압도적인 성의 크기에 입을 쩍 벌리며 놀란다. 태양이 두 개인 것도 지금 발견했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변은 어수선했다.

“비키세요! 길 좀 지나갑시다.”

짐을 잔뜩 실은 타 지역 상인을 시작으로 중무장을 한 기사까지. 엘리드의 주민 수백 명이 부신으로 모이고 있었다.

“아빠! 저 언니 봐 너무 이쁘다.”

짐보따리가 가득한 수레 앞. 상인의 딸로 보이는 꼬마가 민주희를 가리키며 씨익 웃는다.

민주희가 그 모습에 활짝 웃으며 답한다.

“쳐다보지 마.”

하지만 돌아온 답은 냉랭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다급히 딸을 마차 속으로 밀어 넣어버린 것이다.

민주희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거렸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엘리드의 주민은 이계에서 온 우리를 극도로 경계하는 성향이 있었으니까.

그 행동을 증명하듯.

“비켜!!! 걸리적거리니까!”

등 뒤에서 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으악!”

“피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피하는 엘리드의 주민들. 

주민들이 길을 비키자, 그 너머로 거대한 표범이 보였다. 정확히는 표범 위, 화려한 갑옷을 입은 용사가 보였다.

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우빈 쪽으로 맹렬하게 뛰어온다. 

“레아야!!!”

콰드득! 펑-

민주희에게 인사를 했던 소녀가 탄 수레가 그대로 박살 나며, 폭발한다.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그중엔 여자아이도 포함돼 있었다.

“레아야! 정신 차려! 여기 누가 좀 도와주세요!”

소녀의 아버지가 울먹인다. 

“우, 우빈씨! 위험해요!”

어느샌가 우빈의 바로 뒤까지 도달한 거대 표범. 민주희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뒷걸음질 친다.

‘여기는 하나도 안 바뀌었네.’

우빈은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 역시 익숙한 광경이었다. 용사들은 대개 남의 눈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족속들이었으니까.

‘A급인가.’

우빈은 빠르게 탈것의 등급을 유추했다.

표범의 외형, 코끼리의 상아같이 튀어나온 이빨. A급 탈것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레파르도였다.

“병신 새끼 안 꺼져?!”

레파르도 위에 용사가 히죽 웃으며 우빈을 내려다본다.

“꺄악!”

민주희가 당황하며 꽈당 넘어졌고, 표범은 트럭처럼 달려들었다.

‘귀찮게,’

우빈은 주먹을 살짝 쥔 채, 노크하듯 레파르도의 다리를 톡 두드렸다.

띠링-

[주먹 강타를 사용하였습니다.]

펑!!!!

“우왓!”

콰과과과과과과-

레파르도 위에 타고 있던 용사가 말에서 낙마한 듯, 바닥을 쓸어내며 처박힌다.

순간의 정적이 일었다.

“뭐야? 갑자기···.”

“신경쓰지 마, 괜히 불똥 튄다.”

엘리드의 주민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가던 발걸음을 이어간다.

“아야야야, 뭐야, 씨발.”

거구의 용사, 김백청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뭘 봐 구경났어?!”

눈치를 보는 엘리드의 주민에게 버럭 화를 내더니, 허공에 뭔가를 조작한다. 그러자 하나의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치명적인 피해로 굶주린 레파르도가 사망하였습니다.)

[굶주린 레파르도의 어금니][사망]

종류: 탈 것

등급: A

레벨: 63

효과

-굶주린 레파르도를 소환합니다.

빛으로 차오르던 레파르도의 어금니가 회색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뭐, 뭐야··· 죽었다고?”

김백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탈것은 영체와 다르게 죽으면 다시 소환할 수 없다. 

즉, 김백청은 지금 탈것을 순식간에 잃었다는 것이다.

“어떤 새끼야···”

김백청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새어 나온다. 어깨가 미묘하게 떨리는 것이 분노가 느껴진다.

“어떤 새끼야!!!!!”

쿵!

엄청난 압력이 주변을 짓누른다.

“으악!”

“도망쳐!”

엘리드의 주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피한다.

“저 새끼 또 지랄이네. 빨리 들어가자.”

같은 용사조차 눈을 피하며, 부신으로 향한다.

“내 말 무시해! 어떤 새끼냐고!!!”

분노에 찬 김백청의 시선이 우빈을 향한다.

“너냐? 너 맞지! 너랑 부딪히자마자 이 지랄이 났다고!!!!”

김백청이 무섭게 우빈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저 사람 제대로 똥 밟았네.”

“오늘 또 한 새끼 불구 되는구나.”

말은 걱정스러워했지만, 용사들의 표정에 흥미가 감돌았다.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또 없었기 때문이다.

약간 아쉬운 게 있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건 단순한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폭력이라는 것 정도인데.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김백청으로 향했고, 우빈의 코앞에 도달한 김백청이 무섭게 우빈을 내려다봤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에 핏줄까지 솟구치자 산적이 따로 없는 포스였다.

“눈 안 깔아?!”

김백청의 손바닥이 허공을 가른다. 후웅- 야구 배트를 휘두르듯 섬뜩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우빈의 동공이 수축한다. 기량 수치가 높아서 그런지, 놈의 손바닥이 멈춘 듯 느려진다. 

우빈은 점점 다가오는 손바닥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띠링-

[선악 수치가 10 감소하였습니다.]

‘더럽게 많이 깎이네.’

고작 탈것 하나 죽였다고 무려 선악 수치가 10이나 깎였다. 

저 새끼를 죽이면 얼마나 더 깎일까.

최악의 경우 선악 수치가 0으로 내려가 수배에 오른다면, 중립국인 부신에 입장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마음만 같아선 저 새끼 역시 레파르도처럼 분쇄해버리고 싶었지만, 이번만은 참아야 했다.

그렇다고 맞는다는 건 아니다. 

죽이거나 죽음에 달하는 피해를 입히는 게 아니면 선악 수치에 변동은 그리 크지 않을 테니까.

‘적당히 밟자.’

판단을 바친 우빈은 손바닥을 펼쳤다.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녀석의 주먹을 막으려고 했다.

퍽-

하지만 우빈의 손엔 어떠한 충격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만하시죠.”

우빈의 앞으로 하나의 신형이 튀어나왔다.

백발의 긴 생머리와 낡은 갑옷. 엘리드 주민의 특유 마력이 전신에 감돈다.

“이 년은 또 뭐야, 안 꺼져!”

김백청이 난입한 여인의 복부를 발로 찬다. 

윽!하는 단말마와 함께, 여인의 신형이 바닥을 쓸어내며 밀려난다.

“일진 한번 더럽네. NPC 따위가 내 앞을 막아?”

여인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검집에서 검을 꺼낸다.

“어쭈? 해보자고? 그래, 한번 들어와 봐.”

김백청이 양팔을 넓게 벌리며 도발한다.

그 광경에 구경꾼들의 표정은 더욱 밝아졌다.

“뭐야, 주민인가? 개 약한데.”

“얼굴은 좀 반반하다.”

여인의 실력과 얼굴을 평가하며, 입꼬리를 올린다.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스릉- 검을 다잡으며 자세를 취할 뿐.

여인이 자세를 낮추는가 싶더니, 있는 힘껏 대지를 박차며 달려든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몸놀림이었다.

순식간에 김백청의 품을 파고들었고, 후웅- 복부를 향해 검을 내지른다. 

엘리드에 굴러다니는 평범한 모험가치곤 실력이 출중했다. 

실버를 뛰어넘어 골드를 바라볼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딱 그 정도 실력이었다.

꽈드득-

있는 힘껏 내지른 여인의 칼이 멈춘다. 

“뭐야? 끝이야? 뭐 좀 더 해보라고.”

김백청이 히죽 웃으며 주먹을 꽉 쥔다. 꽈드득- 손아귀 손 검이 찌그러지며, 으깨진다. 

이윽고, 후웅- 짝- 김백청의 손바닥이 여인의 뺨을 후려친다.

여인의 머리가 휘청거리며, 쓰러지려 한다.

“어딜!”

김백청은 그런 여인의 머리를 움켜잡았고, 짝! 퍽! 섬뜩한 파열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좀 심한데.”

“또라이 새끼. 여자고 뭐고 없구만, 끝났다. 가자.”

압도적인 폭력은 구경꾼들의 흥미를 꺼트렸다.

‘뭐야···.’

우빈은 구타당하는 여자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끼어들어선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있다.

해결하지도 못할 일에 왜 오지랖을 부리는지.

‘오히려 잘된 건가.’

김백청의 분노가 오직 여인만을 향했다. 

잘만하면 선악 수치에 구애받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빈은 좋게 생각하기로 판단하고 여인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짝- 짝- 퍽-

등 뒤로 섬뜩한 파육음이 이어진다.

그대로 부신을 향해 걸어 나가려는데, 덥석- 민주희가 우빈의 손을 붙잡았다.

“어, 어디 가세요···”

“어디긴요. 성안으로 들어가야죠.”

“네? 저 여성분은 어떻게 하고요, 저러다가 진짜 큰일 나겠어요!”

“그래서요?”

“그래서요라뇨. 우리를 도우려다가 저렇게 되신 건데···”

“누가 도와달라고 했나요? 정 신경 쓰이시면 직접 도와드리면 되겠네요.”

우빈의 단호함에 민주희의 시선이 파르르 떨린다. 

‘스스로···.’

우빈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우빈은 계속 같은 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부탁하지 말라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기르라고.

“저는 돕고 싶어도 능력이 안 돼요.”

“······.”

“그래도 돕고 싶어요!”

민주희의 눈에 각오가 떠오른다. 

스르륵- 손아귀로 화마의 유산이 생성된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꾸벅 목례를 하곤 그대로 김백청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우빈은 그 모습에 눈매를 좁혔다. 

‘깡 하나는 좋네.’

민주희는 바보가 아니다. 저 사내를 못 이길 거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겁 없이 무기까지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간다. 웬만한 각오가 있지 않은 이상 하지 못할 행동이다.

‘어쩔 수 없지.’

우빈에게 민주희는 필요한 요소이다. 적당히 현실을 직면하게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우빈의 시선이 김백청을 향한다.

짝- 

김백청이 여성의 뺨을 후려친다. 여성이 바닥에 쓰러지자, 퍽- 짓밟기 시작한다. 

‘마음에 안 들어.’

저 사내의 행동이 짜증 날 정도로 마음에 안 들었다.

다짜고짜 나타나선, 욕을 하질 않나. 뺨을 후려치려고 손찌검을 하질 않나.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잘됐네.’

띠링-

[인벤토리에서 헤츨링의 비늘을 불러왔습니다.]

우빈은 뭔가를 판단한 듯, 인벤토리에서 하나의 아이템을 꺼냈다.

선악 시스템은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직접적으로 상대를 죽이면 선악 수치가 깎인다. 하지만 간접적인 피해는 선악 수치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빈은 그걸 실험해볼까 한다.

‘깎이면 어쩔 수 없고.’

우빈은 농구를 하듯 하늘 위로 헤츨링의 비늘을 던졌다.

후웅- 비늘이 팽그르르 돌며, 떠올랐다 중력에 의해 떨어진다.

[주먹 강타]

-주먹으로 대상을 타격할 시 공격력의 1,541,461,513,335% 데미지를 입힙니다.

과연 이 비늘을 전력으로 때리면 어떻게 될까.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던전의 문까지 박살 낸 게 주먹 강타이다. 

주먹과 닫는 순간 레파르도처럼 분쇄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있던 하나의 버그가 있었다.

띠링-

[헤츨링의 소유권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바로 소유권을 포기하는 1초의 딜레이. 그 순간 아이템의 내구성이 무한대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레이드에서 즉사기 패턴을 막으려고 자주 사용하긴 했는데, 과연 주먹 강타엔 어떻게 반응할까.

우빈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만 하세요!!”

주희가 김백청을 향해 소리친다. 수십 명의 시선이 민주희를 향한다. 

우빈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공중으로 떠올랐던 비늘이 김백청과 하나가 된 그 순간.

툭- 

비늘을 두드렸고,

띠링-

[주먹 강타를 사용하였습니다.] 

펑!!!! 거대한 폭발과 함께, 굵은 선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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