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척결(2)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따끔한 살기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화민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달라고요?”
척결은 타락한 용사를 처단한다는 신조를 지니고 설립되었다.
그만큼 정의를 따졌으며 선을 중요시하는 길드이다. 용사를 죽여달라는 암살 사주? 들어줄 리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척결은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해결해드리는 곳이 아닙니다.”
“인신매매. 주민 살해. 노예 거래.”
우빈의 말에 화민서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부신에서 주민 가지고 장사하던 놈입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우빈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부신의 치안을 맡은 척결 쪽에서 처리했었어야 할 인물.
판단을 내린 화민서가 입을 뗐다.
“이철영이라고 했죠.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대화는 이철영을 처치하고 다시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웬만하면 사옥에서 기다려주세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 말에 우빈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철컹-
우빈이 문을 닫고 나가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난다. 이정훈이었다.
“정말 들어주실 건가요?”
“저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쪽에서 처리했어야 할 일이잖아요?”
이정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다. 화민서는 차갑게 내려앉은 표정으로 읊조렸다.
“확인하시고 만약, 사실이라면 처리 부탁드립니다.”
화민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느샌가 이정훈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오직 침묵만이 가득한 장소에서 화민서는 상념에 잠겼다.
***
“운성아, 이야기 들었어. 레벨 1로 초기화 됐다며 형이 쩔 해줄까?”
“진짜요? 저야 고맙죠.”
“오케이. 일단 오늘은 쉬어. 내가 책임지고 100까지는 찍어줄 테니까.”
체육관 같은 연습실. 수많은 길드원이 지운성에게 관심을 보인다.
원래 척결은 소수의 인원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오늘은 지운성의 생사를 결정짓는 날로써 화민서의 소집 명령이 내려온 상황이었다.
길드원의 70% 이상이 모인 지금. 부신의 길드 사옥은 어느 때보다 북적였다.
그런 어수선함의 중심 채수연이 앞으로 나선다.
그 앞으로 조기훈, 김호준, 윤지아와 민주희가 학생처럼 자리에 앉아 채수연을 응시했다.
채수연은 고민 많은 선생님처럼 검지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흠··· 뭐부터 설명하지.”
“사냥 알려주시는 거 아니었나요?”
“사냥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기본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대충 훑어드리고 바로 실전 연습 진행해드릴게요.”
채수연은 판단을 내린 듯 입을 뗐다.
“우선, 스테이터스부터 하죠.”
스테이터스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생명력은 문자 그대로 목숨과 관련이 있는 스테이터스에요.”
민주희는 다시 공부하는 취준생처럼 모든 이야기를 경청했다.
9개의 스테이터스를 하나하나 설명해주는데, 한마디로 쓸모없는 스텟은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설명을 대충 끝났고, 그러면 룬으로 스테이터스를 올려보세요. 호준씨랑 기훈씨, 지아씨는 길드에서 룬을 지원받았을 테니까. 5만 룬씩 가지고 계실 테고. 주희씨는 얼마나 가지고 있으신가요?”
채수연의 질문에 주희는 바로 인벤토리를 열어, 가지고 있는 룬을 확인했다.
[보유 룬: 656,380]
‘뭐야, 왜 이렇게 많지?’
처음 18회차 지원 상자에서 10만 룬을 얻은 것까지는 기억난다.
그다음부턴 우빈과 파티를 하고 뭔가가 계속 떠올랐던 거 같긴 한데.
‘나도 모르게 쩔이라는 걸 받은 거였구나.’
레벨 수치도 그렇고, 룬도 그렇고 우빈이 뭔가를 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성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라고 말하지? 굳이 솔직하게 가진 룬을 말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여기서는 누구도 믿지 마세요. 특히, 특성, 가진 아이템을 알려주는 건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보다 멍청한 짓입니다.
우빈의 말이 떠올랐다.
주희가 선 듯 말하지 못하자, 조기훈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든다.
‘없으신가? 없으시겠지.’
주희가 따라갔던 사내의 몰골은 그야말로 거지꼴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주희는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한 듯 수척했다.
당연히 돈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판단을 내린 조기훈이 인벤토리에서 룬을 꺼냈다.
“룬 없으신 거 맞죠? 조금 드릴게요.”
“네? 아뇨. 있어요.”
“괜찮아요. 받으세요.”
조기훈이 민주희의 손에 룬이 든 주머니를 쥐여준다.
띠링-
[10,000룬을 획득하였습니다.]
“정말 괜찮은데···”
“그러면 전부 있는 거죠?”
둘의 대화를 듣던 채수연은 모두 룬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구석에 있는 아령을 가져왔다.
쿵!
가볍게 내려놓는데, 지면이 울릴 정도로 묵직했다.
“주희씨 한번 들어보실래요?”
채수연의 손짓이 민주희가 앞으로 나선다.
민주희의 표정이 경직된다. 이미 한번 스테이터스의 위력을 체험해보지 않았던가. 그래도 막상 시선이 쏠리니까, 뭔가 긴장되었다.
스읍-
숨을 들이켜 마신 뒤, 꽈드득- 타이어보다 더 큰 아령을 집어 들었다.
끼리릭-
바닥으로부터 묘한 소리가 나더니, 미약하게 들린다.
“윽!”
쌀 한 가마니를 손으로 집어 든 느낌이다.
“우와! 뭐야? 들었잖아. 이거 근력 25는 되야 들 수 있는 건데.”
그 광경을 본 채수연이 깜짝 놀라며 주희에게 다가갔다.
“근력 몇이에요? 기본 스테이터스 5 아니었나?”
“20인데요.”
“20이요? 너무 높은데. 설마, 미분배 쓰신 거예요?”
“아뇨. 처음부터 20이었어요.”
“네?”
채수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김호준과 조기훈에게 향한다.
“맞아요. 저도 전부 20이에요.”
“저도요.”
여기 있는 신입이 전부 20이라는 소리는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18회차 혜택이구나.”
누구는 5부터 시작해서 초반을 완전 죽 쑤었는데, 초기 설정값이 20이라니.
채수연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면 룬으로 근력을 25까지 올려보세요. 5,000 룬이면 충분히 올리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 말에 주희는 바로 상태창을 열어 근력 수치를 조정했다. 시스템을 조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띠링-
[5,706룬으로 스테이터스를 올리시겠습니까?]
[근력이 5 상승하였습니다.]
딱히 몸에 큰 변화는 없었다. 약간 컨디션이 좋아졌다는 정도?
“다시 한번 들어보실래요?”
채수연의 제안에 주희가 앞으로 나섰다.
끼리릭-
다시 한번 가볍게 힘을 주자, 아령이 쑥하고 딸려 올라왔다.
“우와···”
고작 버튼 몇 번 눌렀다고 들 수 없던 물건이 가볍다고 느껴질 정도로 힘이 세졌다.
만약, 근력이 100을 넘어가면 어떤 힘이 생기는 것일까?
“저도 들어볼래요.”
“원래 가벼웠던 거 아니야?”
민주희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낀 김호준과 조기훈 역시 아령을 들기 시작했고,
“자, 다음은 무기에 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채수연의 교육은 계속되었다.
“경매장에서 원하는 무기랑 룬석 하나를 사주세요.”
무기와 룬석, 스킬 카드와 영체. 그 밖에도 탈것과 날것의 쓰임새 등. 많은 정보가 담긴 교육이 계속되었다.
대략 1시간이 지나자 실질적인 교육은 끝이 났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사냥을 해볼까요?”
“사, 사냥이요?”
사냥이라 하면 괴물과의 전투를 의미하지 않은가. 그렇다는 건 성 밖으로 나간다는 말인데.
윤지아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채수연은 바로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냥이라고 해도 몬스터를 바로 잡는 건 아니니까요. 연습용으로 준비해둔 영체가 있습니다.”
채수연이 구석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가져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상자였다.
상자를 열자, 수십 개의 아이템이 피규어처럼 나열돼있다.
“왼쪽이 레벨 10대 몬스터랑 비슷 수준의 영체고요 오른쪽이 레벨 100대 몬스터급인 영체입니다.”
“우와~!”
“누가 먼저 해보실래요?”
“제가 해보겠습니다!”
실전이라는 말에 조기훈이 자신 있게 손을 들곤, 앞으로 나선다.
그 모습을 본, 채수연은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내기하실래요?”
“네? 내기요?”
“여러분들은 열심히 도전만 하시면 돼요.”
“네?”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
채수연이 호흡을 크게 마시더니, 큰 소리를 내뱉었다.
“다들 모여 보세요!!!!”
그 외침에 체육관뿐만 아니라, 사옥에 있던 척결 길드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오랜만에 내기 한판 해요!”
뜻밖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
철컹-
우빈은 화민서의 방을 나와, 표정을 굳혔다.
‘얼마나 걸리려나.’
부신은 중립국이자, 무역에 특화된 도시로서 엘리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를 자랑한다.
아무리 정보력이 뛰어나다 해도, 특정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과연 척결의 정보력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궁금하네.’
우빈이 흥미롭게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옮겼다.
“용사님!”
그때였다.
문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백발의 NPC가 다가왔다.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정신이 없어서 신경 쓰지 못했는데, 백발의 NPC는 이철영이 버리고 간 아이까지 품에 안고 따라온 모양이었다.
“용사님! 그때 그거 돌려주세요! 꼭 필요해요.”
계속해서 뭔가를 달라고 하는데, 김백청의 명치에서 떨어져나왔던 인공 마정석을 말하는 거겠지.
“따라와.”
“네!”
우빈의 관심에 활짝 웃으며 쫄래쫄래 따라오기 시작했다.
조용한 구석에서 한 10분을 물어봤을까? 모든 궁금증은 해소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러니까, 엄마를 찾아서 부신에 왔는데, 그 물건에서 엄마의 향기가 났다 이거야?”
NPC가 한 말은 개소리뿐이었다.
“네!”
오른손을 하늘 번쩍 올리며 답한다.
뭔가 말하는 것도 그렇고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생긴 거랑 다르게 정신연령이 낮아 보인다.
그러나 특별히 이상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엘리드는 교육 시스템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장소. 정신연령이 낮은 성인은 차고 넘친 곳이었으니까.
헛소리가 분명했지만, 혹시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띠링-
[인벤토리에서 종언 아드로스의 정기를 불러왔습니다.]
우빈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어?!”
백발의 NPC가 바로 반응해온다.
“그거에요! 주세요!”
우빈은 달려드는 NPC의 얼굴을 밀며 눈매를 좁혔다.
이 NPC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아드로스와 관련된 아이템에서 엄마의 향기가 느껴진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몬스터는 엘리드의 주민에게 있어 천적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중에서 아드로스는 몬스터의 정점 월드 보스.
“······”
월드 보스에게서 엄마의 향기가 느껴진다고?
판단을 내린 우빈은 NPC로부터 시선을 옮겼다.
“비켜.”
그대로 NPC를 밀치곤 발걸음을 뗐다.
“잠시만요! 전부 말씀드렸잖아요! 주세요!”
“주면 엄마를 찾을 수 있어?”
“그, 그건 아니지만···”
우빈의 다그침에 NPC가 입을 닫는다. 우빈은 날카롭게 NPC를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혹시 모르나.’
이 NPC가 맛이 간 건 확실해 보이지만, 보험으로 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결정적으로 정현태를 찾는데, 일조한 아이템이 인공 마정석인 이상,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두어야 했으니까.
“이것 말고 또 찾으면 가져다줄 테니까. 여기에 있어.”
“네? 여기에요?”
어리둥절해 하는 NPC를 두곤 그대로 걸어 나갔다.
‘스킬 카드나 업그레이드할까.’
시간도 남겠다. 그동안 못했던 스킬 카드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우빈의 시선이 슬롯에 장착된 스킬로 향한다.
[스킬 카드: 뇌섬격+10]
종류: 스킬 카드
등급: S
[스킬 카드: 초진동+10]
종류: 스킬 카드
등급: L
“L등급 이상도 있나.”
특히 초진동의 다음 등급이 있을지가 너무 궁금했다.
마음을 정한 우빈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희를 찾았다.
[민주희][LV.83][HP:1,300/MP:130]
저 멀리 벽 너머로 민주희의 위치가 보인다.
그곳으로부터 웅성거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호기심에 발걸음을 옮겼고 도착하자 이상한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야, 너한테 1만 룬 걸었다. 무조건 레벨 50까지는 잡아.”
“5,000 룬 지원해줄 테니까. 기량 찍어.”
“쪼랩 때는 스테이터스보다는 스킬이지. 공격 스킬인데 한번 끼워봐.”
***
신입 용사를 둘러싸곤 수십 명의 길드원이 들러붙는다.
마치 새로 들어온 관원에게 관심을 쏟는 선배의 모습 같다고 해야 할까.
“특성 뭐야? 뭐?! 스킬 숙련도 800% 증가? 개 사기잖아. 그런데 당장 써먹긴 힘드네.”
“무기는 뭐가 마음에 들어? 검? 검이 초반에 편하긴 하지.”
선배 용사들이 신입 용사에게 붙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김호준의 주변으로 30여 명. 조기훈의 주변으로 20여 명이 모여 열심히 뭔가를 알려준다.
그들과 제법 떨어진 곳에서 지운성과 채수연은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시끄럽게 무슨 내기야.”
“재미있잖아. 예전에 자주 하기도 했고.”
신입이 들어오면 자주 하던 풍경이었다.
경마를 떠올리게 하는 신입 용사의 순위 경쟁.
아직 긁지 않은 복권. 신입 용사를 순위로 줄 세우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있을까.
그 과정에서 선배 용사들은 후배를 챙기고 후배는 도움을 받으며, 선배 용사에게 친밀감을 형성한다.
이보다 더 좋은 시스템은 없었다.
다만, 돈이 걸린 내기인 만큼 약해 보이는 사람은 냉정하게 소외되는 게 문제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윤지아입니다.”
“왜 이렇게 겁먹어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나마 같은 길드원이라는 것만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외부인에겐 아니었다.
수십 명의 관심 중,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단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손님인데. 내가 도와주고 올게.”
채수연이 민주희를 도와주러 가려 했지만, 굳이 그럴 이유는 없어 보였다.
“이게 뭐예요?”
“우빈씨!”
민주희에게 한 사내가 다가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