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인체 실험(1)
벚꽃을 녹여 만든 듯 영롱한 보랏빛을 머금은 파편.
띠링-
[7번째 파편]
종류: 세계수의 파편
등급: EX
설명: 세계수의 원동력인 엘리드의 7번째 파편입니다. 7개의 파편으로 세계수의 힘을 되찾아 긴 모험의 여정을 끝내세요. 엘리드를 구한 영웅에겐 엘리드의 비보를 지급합니다.
파편의 내용을 읽은 우빈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여정을 끝낸다.’
파편엔 이 지옥을 끝내고 지구로 귀환할 방법이 담겨있었다.
만약, 크로노스의 던전에 갇히기 전이었다면, 우빈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파편을 모았을 것이다.
지구엔 본인의 목숨보다도 우빈을 더 위하는 어머니와 동생이 우빈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빈의 목표는 오직 하나. 그 새끼들이 절망에 허덕이는 것뿐이었다.
‘끝내고 싶지 않다 이건가.’
우빈은 빠르게 차주성의 생각을 추측해나갔다.
정현태의 말에 따르면 차주성은 첫 번째 월드 보스 아드로스를 처치하고부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왜일까? 지구에 아픈 부모님이 있다고, 누구보다 돌아가고 싶어 하던 게 바로 차주성이었는데.
‘잃기 싫다 이거겠지.’
이유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을 함께한 동료까지 버려가며, 무력을 취한 쓰레기다.
지구였다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을 녀석이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세계적인 집단의 우두머리로 우뚝 올라섰다.
차주성은 그 무력을, 권력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갔다.
어떻게 하면 그 새끼의 계획을 망가트려야 할지가 뚜렷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오길 잘했네.’
그저 성장을 위해 온 월드 보스 공략이 뜻밖의 이득으로 작용하였다.
차주성의 계획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엄청난 성장까지 이뤄냈으니 말이다.
우빈은 상태창을 열어, 이번에 성장한 레벨을 확인했다.
띠링-
레벨: 176(34↑)
HP: 2260/2260
MP: 226/226
스태미나: 226/226
생명력: 50
정신력: 50
지구력: 50
근력: 50
기량: 191
체력: 50
지력: 50
감각: 50
행운: 50
미분배:34
‘176.’
우빈이 크로노스의 던전에 갇힌 시점의 레벨은 171.
그 레벨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을 노력했다. 그런데 고작 몬스터 몇 마리로 그 시간과 노력을 한 번에 메꾸어버릴 줄이야.
‘슬슬 전직도 해야 하는데.’
띠링-
[기량: 191 → 225]
우빈은 스테이터스를 찍곤, 이번에 얻은 보상을 확인했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보상은 칭호였다.
[진실을 꿰뚫어 보는 자]
종류: 칭호
등급: L
설명: 엘리드의 살아있는 전설 나인테일을 처치하였습니다. 나인테일의 진실을 꿰뚫어 본 그대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합니다.
효과
-대상의 기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억을 엿봐?’
모호한 설명이었다.
사용하면 대상이 여태까지 겪었던 기억을 전부 볼 수 있다는 건가.
‘써볼까?’
호기심에 우빈의 시선이 민주희에게 향한다.
“호텔 주방장이셨다고요? 어쩐지,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놀랐어요!”
“그래? 괜찮았어? 말만 해 더 만들어줄 테니까.”
벌써 캠프 사람들이랑 친해졌는지,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나간다.
‘됐다.’
우빈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접었다.
굳이 실험이라는 이유로 주희의 기억까지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확인할 보상은 나인테일이 떨어트린 막대한 아이템뿐이었다.
우빈은 흥미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보상을 확인했다.
각종 S급 장비를 시작해서, E급 잡템까지. 적어도 20개 이상의 아이템이 인벤토리에 가득 차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우빈은 아이템 하나하나를 분류하기 시작했고, 기대 이상의 효과에 입꼬리를 올렸다.
***
거대한 불사조 석상이 강렬한 위용을 내뿜는다.
이곳은 5대 왕국 중 최대 강국으로 손꼽히는 메아로카.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하는 가운데, 서울에서나 볼법한 현대적인 건물이 우뚝 솟아있다.
고풍스러운 방패가 세이버의 위상을 증명하듯 반짝인다.
이 건물은 세이버의 사옥.
“허억···허억···”
건물 내부로부터, 땀내 나는 거친 호흡과 날붙이가 부딪히는 파열음이 연신 터져 나온다.
“씨발, 왜 이렇게 세.”
한 사내가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 사내 앞으로 익숙한 얼굴의 청년이 있었다.
“다음이요!”
그 청년은 다름 아닌 최수호.
“저 새끼 특성, 데미지 누적해서 강해지는 원리 아니었어? 그냥 처음부터 개 센데.”
“그러니까. 랭커한테도 비비겠어. 신입 영입에 실패했다더니, 뒤로 빼돌려서 뭐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최수호를 상대해주던 선배 길드원들이 최수호의 무력에 감탄한다.
“으악!”
어김없이 최수호의 피해자가 한 명 늘어났다.
레드 드래곤 레이드로 세이버의 핵심 전력이 빠진 지금. 최수호를 대적할 실력자는 사옥 안에 없었다.
“더 없나요?”
그 누구도 최수호의 앞에 나서지 못한다.
최수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궁금한데.’
조금 전까지 40명이 넘는 선배들과 대련을 펼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최수호의 호흡은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마에 땀 한 방울조차 맺히지 않았고.
지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무력을 손에 넣은 이유는 전부 최수호의 특성 때문이었다.
[인피티니 가드]
종류: 특성
등급: S
효과
-퍼팩트 가드에 성공 시 데미지를 축적합니다. 축적한 수치에 따라 특별한 효과를 얻습니다.
[추가 효과]
-방어력 100% 증가.
-퍼팩트 가드 시 방어력 150 증가.
-모든 스테이터스 5 상승.
-방어력 200 증가.
.....
....
.
최수호의 특성은 가드에 성공한 데미지를 축적하면 할수록 강해진다.
사기적이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축적된 데미지는 초당 100씩 감소합니다.)
아무리 많은 데미지를 누적한다 해도 1초당 100씩 감소하며, 힘을 사용하면 소모 폭은 더욱 커진다.
당연히 전투를 할 때면 누적 데미지를 0부터 모아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최수호의 시선이 특성창으로 향한다.
[현재 축적된 데미지: 1,541,416,733,335]
누적된 데미지가 무려 1조 5천억에 육박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수 없던 그 새끼와의 PVP 이후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되어있었다.
최수호는 궁금했다.
‘왜 쌓인 거지?’
무려 1조 5천억에 달하는 수치, 언젠가는 0으로 수렴할 것이다.
이유를 파악해 원할 때마다 충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파악할 수 없었다.
PVP 도중 죽는 과정에서 버그가 걸린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떠올릴 수 있는 조건은 딱 하나뿐이었다.
‘설마···’
몸이 폭발하기 직전, 최수호는 공격을 가드했다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그 새끼의 주먹이 방패를 두드리는 순간, 기억이 날아가듯 육신이 폭발했다.
그렇다는 건, 그 새끼의 주먹 데미지가 저 수치라는 이야기인데.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추측에 최수호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다 복도를 걷고 있는 서희빈의 모습을 발견했다.
“선배!”
활짝 웃으며 다가가는데, 서희빈은 대꾸도 없이 갈 길을 걸어간다.
아지트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으쌰으쌰하는 분위기였다.
마스터가 레드 드래곤을 처치했단 소식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흘리며 기뻐했다.
하지만 막상 마스터가 돌아오는 시간이 돼가자 다시 시무룩해진 상태였다.
마스터가 선물로 준 화기의 반지를 내기로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시무룩하네. 기운 내라니까요? 제가 어떻게 해서든 되찾아줄게요.”
“퍽이나.”
“진짜예요! 저 세진 거 봤잖아요. 그래, 이참에 펜리르도 구해줄게요!”
최수호의 호언장담에 서희빈이 웃기지 말라는 듯 무시하며 걸어 나간다.
“진짠데···”
최수호는 입술을 잘끈 씹었다.
원래라면 그저 말뿐인 허세에 불가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 허세 때문에 서희빈의 소중한 아이템을 빼앗기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축적된 데미지: 1,541,416,733,335]
이 힘만 있다면, 이 수치라면 마스터도 뛰어넘는 힘을 가지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PVP를 계속 제안했다. 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원래라면 이길 수 없었던 레벨 180대 선배들까지 너무 쉽게 제압해버렸다.
‘오시면 바로 PVP 해달라고 해야지.’
세이버의 선배 중 PVP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분이 있었다.
최수호가 기억하기론 서희빈에게 펜리르를 500만 룬이라는 헐값에 판다고 한 인물도 그녀일 터.
내기 PVP로 살짝 건드려주면 어렵지 않게 펜리르를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좋았어!’
최수호가 완벽한 계획에 두 주먹을 불끈 쥐던 그때였다.
“세이버다! 마스터가 돌아왔어!!”
레드 드래곤의 원정을 나섰던 핵심 인력의 귀환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같이 가요!”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가는 서희빈의 뒤를 따라가자, 거대한 성 입구가 철컹하고 열리기 시작했다.
쀼웅- 펑!!!
유엔의 상징인 보랏빛 폭죽을 시작으로,
“우와!!!!!!!!!!!”
메아로카 주민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차주성의 귀환을 축하해주었다.
원래라면 길드 시스템인 스크롤을 통해 1초면 메아로카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친히 왕국 입구로 들어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메아로카 왕국은 세이버의 열열한 후원국이었으니까.
푸른 하늘 위로 수만 개의 꽃잎이 흩날린다. 나팔과 북소리가 퍼레이드를 연상케 한다.
수만의 시선이 모인 그 중심으로 세이버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와···”
“저게, 뭐야···”
쿵! 쿵!
가벼운 발걸음에 대지가 요동친다.
크르르릉-
내뿜은 콧바람에 불꽃이 피어오른다.
8M 육박하는 붉은 드래곤. 그 위로 세이버의 상징이 거대한 방패를 치켜들며, 드높은 위상을 증명했다.
“설마 저거 탈 거야?”
“개 쩐다···”
같은 길드원조차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와···”
최수호의 역시 차주성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쩐다···.’
지금, 이 순간 드래곤 위에 우뚝 선, 저 사내가 세계의 중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시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 저게 뭐야···”
“······.”
차주성을 향하던 수만의 시선이 더 높은 하늘 위로 향한다. 그러자 하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띠링-
[위대한 용사가 엘리드를 위협하는 월드 보스: 나인테일을 처치하였습니다.]
[엘리드에 위대한 영웅이 탄생하였습니다!!!]
***
띠링-
[다크 피닉스의 깃털의 깃털을 사용합니다.]
손에 들린 검은 깃털이 빛무리로 흩어진다. 이윽고, 한 점으로 모이더니 거대한 형상을 이룬다.
-끼이엑!
10M 남짓의 거대한 새가 포효를 내지르며 날개를 펼친다.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 피닉스의 깃털이 이글거린다.
“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캠프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저거 날것 맞지···”
“날것이 무슨 필드 보스보다 더 세 보이냐? 와··· 역시 사람은 외모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더 이상 우빈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존경의 시선을 보내며, 궁금해했다.
도대체 어떤 힘을 가졌길래, 17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월드 보스를 일격에 처치하고, 저런 날 것을 가졌는지를.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우빈은 부러움의 시선을 느끼며 피닉스의 등 뒤로 올라탔다. 주희까지 올라타자, 후웅- 피닉스가 거대한 날개를 휘젓기 시작했다.
펑!!!
탱크가 하늘로 쏘아졌다는 표현이 비슷할 것이다. 피닉스가 순식간에 하늘 위로 사라진다.
“으악!”
강렬한 바람에 모두가 인상을 찡그렸고, 하늘 위를 확인했을 땐, 불사조의 모습은 손톱보다도 더 작아져 있었다.
“존나 빠르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요.”
“글쎄.”
하루를 같이 지냈지만, 우빈에게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같이 데리고 다니던 여자 역시 사내에 대해 잘 모르는 듯 보였고.
모두의 호기심이 극에 달하던 그때. 구시현은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부탁 하나 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나야 땡큐지.”
구시현의 입가로 은은한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크게 소리쳤다.
“자, 놀았으면 일해야지. 그동안 못 가본 나인테일의 영역을 탐색한다!”
우렁한 명령과 함께.
“네!!!”
오랜만에 느껴보는 후련함과 해방감을 느끼며, 새로운 모험을 이어나갔다.
***
후웅-
창문 없는 제트기를 탔다면 이런 기분일까.
귀 끝을 지나가는 바람이 찢어지듯 메아리치고, 눈은 뜰 수 없을 정도로 시렸다.
그야말로 미친 듯한 속도감이었다.
‘역시 올려놓길 잘했네.’
우빈은 만족스러운 속도감에 다크 피닉스의 정보를 확인했다.
띠링-
[다크 피닉스의 깃털]
종류: 날 것
등급: L
레벨: 100
효과
-다크 피닉스를 소환합니다.
작업대의 효과로 피닉스의 레벨은 이미 최대치에 도달한 상태였다.
들어간 포인트는 무려 2,500만.
마음만 같아선 펜리르와 업그레이드된 영체, 드래곤도 레벨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남은 포인트는 300만 포인트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올라가는 거지.’
우빈은 시간이 날 때마다 포인트를 확인했다.
그 결과, 포인트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쌓이는 것으로 판단됐다.
작업실 안에선 1시간당 6포인트, 밖에선 1시간당 60,000포인트가 적립되었다.
아쉬운 획득량이었다.
당장 펜리르의 레벨을 최대치로 올리는 데 필요한 포인트는 2,500만이다.
지금 있는 300만 포인트에 나머지 2,200만 포인트를 채우려면, 무려 365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모을 수 있단 계산이 나왔다.
‘분명 포인트가 쌓이는 원인이 따로 있는 거 같은데. 뭐지.’
여러 고민을 하다 보니, 저 멀리 주황빛으로 물든 산맥이 보였다.
“우빈씨! 못 버티겠어요!!!”
민주희가 있는 힘껏 우빈의 허리를 움켜잡곤, 눈을 질끈 감는다. 근력을 올려놓아서인지, 목숨을 건 악력에 숨이 턱 막혀온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금방 도착합니다!”
우빈은 민주희에게 소리치곤, 주황빛으로 물든 산맥을 응시했다.
‘벌써 궁금하네.’
우빈은 뭘 해야 차주성이 제일 짜증 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결과, 그 녀석이 가장 공들이고 있는 걸 박살 내기로 판단을 내렸다.
지금 도착할 장소는 메아로카 왕국과 러우신 왕국의 경계선인 에론 산맥.
‘여기 있단 말이지.’
정현태의 정보에 따르면 저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차주성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을 박살 내버릴 아주 중요한 요충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