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주인 없는 성(3)
핏물이 자욱한 잔해 속, 차가운 침묵이 감돈다.
두 사내의 시선이 마주친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던 그때.
“왜? 성이라도 먹으려고?”
고지태가 의자 앞에 선 우빈을 올려다보며 입을 뗐다.
“그렇다면요?”
“먹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하자.”
굳이 다음 대답을 들을 가치가 없었다.
우빈은 고지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손을 뻗었다. 그대로 빛에 가득한 의자에 닿으려는 순간.
우빈의 손길이 멈춰 섰다.
고지태가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와줘.”
“······”
“뭐든 할게. 짖으라면 짖고 죽으라면 죽겠다.”
고지태가 인벤토리에 든 아이템을 하나씩 바닥에 내려놓는다.
‘왜 저렇게까지 하지.’
상대는 무려 랭킹 5위의 괴물이다.
척결이 해체되었다고는 하나, 저 사내를 받아줄 길드는 차고 넘쳤다.
지금은 약간 기분이 더럽겠지만,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는 능력자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하는 거지.
그만큼 척결을 화민서를 지키고 싶은 것일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흔치 않은 기회였다.
무려 랭킹 5위가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풀고 싶은 호기심이 하나 있었다.
“정말 뭐든 할 수 있나요?”
“물론이지.”
우빈의 말에 고지태의 표정에 희망이 떠오른다.
‘됐다.’
고지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길드에서 확인한 메시지를 떠올렸다.
-세이버를 조심하세요. 저를 포함 부신을 이렇게 만든 건 곽정수였습니다. 만약, 제가 잘못된다면 강우빈을 설득해서 함께, 세이버를 막아주세요. 저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함께할 수 있어서 잠시나마 행복했습니다.
글을 읽는 순간, 고지태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곽정수.’
세이버 소속 용사이자, 전 랭킹 2위에 올라갔던 괴물. 이유는 모르겠지만, 작년엔 랭킹전에 참가하지 않아. 직접 싸워본 적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새끼를 찾아가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확신이 없었다.
PVP 전용 방패를 잃었고, 고지태의 부족한 화력을 채워줄 드래고닉을 빼앗겼다.
그런 와중 화민서가 꼭 집어 한 사내를 언급했다.
‘강우빈.’
만약, 이 사달이 벌어지기 전이었다면, 개소리라 치부해, 무시하곤 다른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던가.
고지태 본인도 어찌할 수 없던 화민서를 가볍게 제압하는 건 물론, 마스터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어떻게든 설득해야 해.’
그렇기에 고지태는 자존심과 목숨까지 걸어가며 저 사내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고지태는 마른침을 삼키며 우빈을 올려다봤다.
차가우면서도 딱딱한 표정이, 음흉하게 미소를 띠기 시작한다.
도대체 뭘 시키려고 저렇게 웃는 것일까.
긴장감이 치솟던 그때였다. 우빈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팔씨름 한판 하죠?”
“뭐?!”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맥이 팍 풀렸다.
“저를 이기시면 어떠한 조건도 없이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대신.”
“······”
“제가 이기면 죽을 때까지 제 밑에서 충성을 다하는 겁니다. 어때요?”
팔씨름이라는 어이없는 행위에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도 고민했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애초에 목숨을 포함 아이템까지 전부 걸며 한 부탁이지 않은가. 평생 충성을 다한다는 리스크?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힘 싸움을 하자고?’
제안의 내용이 너무 좋았다.
고지태는 탱커로써 모든 스테이터스를 체력과 근력에 투자한 근접 깡패로서, 공격력이라면 모를까 힘 싸움에서는 밀려본 적이 거의 없다.
물론, 하선율과 함지연을 포함, 괴물 같은 녀석들보다는 부족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상급 괴물들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
아무리 강우빈이 비범한 힘을 가졌다고는 하나, 힘에서만큼은 자신 있었다.
“정말 이기면 아무 조건 없이 도와준다는 건가?”
“네. 괜찮은 제안이죠?”
“좋다.”
이건 질 수 없는 게임이었다.
“그러면 바로 하죠.”
우빈이 부서진 잔해 중, 거대한 돌 하나를 들고 와 고지태의 앞에 가져다 놓는다.
자신 있게 팔을 걷어붙이며 돌 위에 올려놓는데,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뻔했다.
단순히 팔 굵기만 봐도 4배 이상은 차이 나지 않는가.
엘리드의 시스템이 상식을 깨부수는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부분이 존재했다.
근육이 크고 힘이 세면 적용되는 스테이터스의 퍼포먼스가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력 수치가 같아도 근육이 더 크고 힘이 센 사람이 이기는 구조였다.
고지태가 자세를 잡고, 우빈의 손을 붙잡으려 하자, 우빈이 입을 뗐다.
“스킬이나 아이템을 쓰셔도 괜찮습니다.”
거만한 배려에 고지태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아무리 강자라고 인정하긴 했지만, 호승심이 샘솟았다.
“필요 없으니까. 바로 하지.”
고지태가 침착하게 돌 위로 손을 올린다. 우빈의 작은 손바닥이 고지태의 거대한 손바닥으로 쏙 빨려 들어온다.
흡사 9살짜리 아이와 30대 아저씨가 팔씨름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단판으로 하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우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꽈드득-
고지태는 있는 힘껏, 이두를 쥐어짰다.
이 사내의 손이 돌바닥에 처박혀 으깬다는 심정으로 전력을 다해, 팔을 휘둘렀다.
‘어?!’
원래라면 1초도 되지 않아 끝났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전력을 다해, 힘을 쥐여 짜고 있지만, 맞잡은 양손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뭐야?!’
이상함을 깨닫는 그 순간이었다.
“확실히, 세네요.”
사내의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후웅-
엄청난 압력이 손끝을 타고 흘러나왔고,
쩌억-
띠링-
[HP 313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으악!”
손등으로부터 강렬한 충격이 타고 올라왔다.
“말도 안 돼···”
띠링-
[근력: 204]
고지태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근력을 확인했다.
근력을 200 넘게 올린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고지태가 아는 한 근력 200 넘게 올리고 살아남은 놈은 없었다.
근력을 200까지 올리면 상대적으로 다른 스테이터스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만큼 생존에 불리했으니 살아남은 놈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그런데 우빈은 달랐다. 단순히 근력만 센 게 아니었다.
PVP 당시 미친 듯한 속도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아무리 아이템이 좋다 해도 기량이 낮다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퍼포먼스였다.
‘도대체 뭐야,’
고지태는 퉁퉁 부어오른 손을 붙잡곤, 미소를 지었다.
평생 복종해야 한다는 패배감에 속이 쓰릴 법도 했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할 수 있어.’
저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상식을 벗어나는 힘이 이제는 상대할 대상이 아닌, 같이 걸어 나갈 동료로 바뀌었으니까.
고지태가 우빈을 보며, 희망을 느끼던 그때였다.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빈은 고지태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우빈은 빛으로 가득한 의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의자에 손이 닿는 그 순간.
띠링-
[성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화아악-
강렬한 빛이 부신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찌르르르-
벌레 소리와 함께, 부서진 천정으로 따스한 햇볕이 내리쬔다.
지독할 정도로 상쾌한 날씨를 느끼며, 한 사내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부신의 기사단장인 쿠반 에델론.
“젠장. 젠장!!!”
쿠반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그의 앞으로 한 소녀가 무언가에 목을 물어뜯겨 차갑게 식어있었다.
이 소녀는 부신의 남작 베드로의 딸. 샤에리스.
죽은 건 샤에리스 뿐만이 아니었다.
쿠반은 제일 처음 자신의 저택에 갔었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시작으로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아들, 수년을 함께한 하인들까지. 전부 죽어있었다.
‘젠장···’
쿠반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지킬 주군도 없어져 버렸다.
왜 이렇게 됐을까.
‘개새끼들···’
쿠반은 이 지옥이 일어나기 직전을 떠올렸다.
-유엔에서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처음 왔었던 정현태라는 놈이 사라지고, 유엔에서 새로운 용사가 부신에 찾아왔었다.
그리곤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가족을 죽인 것도, 주군을 죽인 것도, 주민을 학살한 것도 전부.
언제나 사건의 중심엔 용사 새끼들이 끼어있었다.
‘알려야 해.’
어떻게든 하몬의 국왕 수메르 아카 하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평화의 시대는 끝났다.
부신을 이렇게 만든 이상, 용사 새끼들과 동맹은 파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절망으로 가득하던 쿠반의 감정에 복수라는 분노가 치솟던 그때였다.
띠링-
[강우빈 용사님이 왕좌에 오르셨습니다.]
[성의 군주가 탄생하였습니다!]
성으로부터 강렬한 빛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쿠반의 앞으로 하나의 문구가 떠올랐다.
띠링-
[성의 주민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
화아악-
찬란하게 터져 나왔던 빛이 사그라들자, 다시금 고요함이 찾아왔다.
우빈은 양 손바닥을 펼쳐 몸 상태를 확인했다. 별다른 변화점은 없었다.
띠링-
[성을 소유하였습니다.]
그저 눈앞으로 여러 가지의 메시지가 떠오를 뿐.
[성의 이름을 설정해주세요.]
처음 떠오른 메시지는 성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뭐로 하지.”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띠링-
[성 이름을 부신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이름을 대충 설정하자,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작위]
[정책]
[세금]
[동맹국]
[시설]
[인구]
[주요 자원]
[식량]
........
.....
....
.
무수히 많은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문구는 이것이었다.
띠링-
[인구: 0명]
지금 부신에 생존자는 아무리 못해도 5천 명이 넘어갔다. 그런데 인구가 0명이라니.
‘내 밑으론 안 들어오겠다. 이건가.’
그 예상을 뒷받침하듯.
“쿠데타다!!! 당장! 하몬으로 떠납시다!”
“씹어먹어도 부족한 새끼들!!! 죽어!!!!”
성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부서진 나무 조각을 들며, 마을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다.
애초에 쉽게 밑으로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구해 줬다 한들 저들에게 있어, 용사라는 존재는 이 지옥을 만든 원흉 그 자체였으니까.
‘슬슬 준비해야겠네.’
원래라면 주민의 전력 따위 없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주민은 레벨이라는 성장을 할 수 없었으며, 시스템의 힘이 깃든 아이템 또한 하나밖에 착용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우빈에겐 달랐다.
사용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아이템이 웬만한 용사쯤은 커버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어떻게 될까.
띠링-
[경매장을 활성화합니다.]
[영혼석]
하급 고블린/F/LV.1/판매가: 899룬
늙은 리카르토/F/LV.1/판매가: 499룬
순록/E/LV.1/판매가: 2,800룬
코볼트/D/LV.1/판매가: 3,250룬
레드 오크/C/LV.1/판매가: 6,999룬
리저드맨/B/LV.1/판매가: 427,490룬
샤카이/A/LV.1/판매가: 5,027,490룬
........
.....
....
.
우빈은 바로 경매장을 열어 영혼석을 확인했다.
F급을 시작으로 C급까지. 올라온 영체는 수천 개가 넘어갔으며, 가격 또한 저렴했다.
그러나 B급으로 넘어가자, 올라온 물량부터 차이가 났다.
B급 영체는 200개가 넘지 않았으며 A급 영체는 20개 채 되지 않았다.
그중 S급 영체는 고작 8개가 전부.
‘C급부터 모아야겠네.’
판단을 내린 우빈은 지금 보유한 룬을 확인했다.
띠링-
[보유 룬: 14,575,700]
이번 히든 퀘스트로 얻은 룬은 무려 600만 룬. 실험실에서 이세현과 부하에게 뜯어낸 룬과 합쳐지자, 보고도 믿기 힘든 룬이 인벤토리에 들어온 상태였다.
C급 영체 정도는 수백 개를 사도 여유로울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지 않은가.
띠링-
[레드 오크를 구매하였습니다.]
[샤먼 고블린을 구매하였습니다.]
[다크 메지션을 구매하였습니다.]
[중견 마법사를 구매하였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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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빈은 경매장에 올라온 C급 영혼석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계속 사다 보니, 7,000룬이면 구할 수 있던 레드 오크의 가격이 27,000룬까지 올라가 버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우빈은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쌓여버린 영체를 보자기에 감싸곤, 그대로 작업실로 들어가려 했다.
“뭐하냐?”
우빈을 구경하던 고지태가 말을 걸어왔다.
“보면 몰라요? 영체 사잖아요.”
“그러니까, 하급 영체 같은데, 그런 쓰레기를 왜 사냐고.”
당연한 의문이었다.
괜히 하급 영체가 경매장에 쌓여있는 게 아니다.
당장 F급 영체 10마리와 E급 영체 1마리를 싸움 붙이면, 그 성능을 바로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효율적인 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여줬으니까.
하지만 민주희의 특성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뭐부터 할까?”
우빈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고지태가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왔다.
“애초에 뭘 도와줘야 하는지 말해줘야죠.”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이 뭘 원하는지 알았지만, 되물었다.
“부탁할 건 두 가지다. 마스터, 아니지. 민서 씨를 구해줘. 하선율이 하몬 왕국으로 데려간 거 같은데. 이대로 가면 처형을 면치 못할 거야. 나머지 부탁은 마스터를 구한 다음에 이야기하지.”
예상했던 부탁을 해왔다. 조건이 두 개라는 게 약간 거슬렸지만, 평생 복종해야 하는 데 저 정도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약속 잊지 않으셨죠?”
“한 입으로 두말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뭘 하면 되지?”
우빈이 하선율이 있던 길드 사옥에서 나온 지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선율이 아무리 빨리 이동했어도, 아직 부신 부근을 이탈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엔 구경만 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지태 씨가 할 일이 아주 많아질 거거든요.”
우빈은 판단을 내린 듯 인벤토리에서 검은 깃털을 꺼냈고,
띠링-
[다크 피닉스를 소환합니다.]
검은 불사조가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