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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버림받은 주민(2) (54/107)

53. 버림받은 주민(2)

원형의 성벽이 웅장하게 치솟은 왕국의 모습이 드러난다. 

감히 부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특히, 피라미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우뚝 솟은 성이 눈을 사로잡는다. 

이곳은 5대 왕국 중 하나인 하몬. 

푸른 하늘로부터 거대한 그리폰이 모습을 드러낸다. 

후웅- 

그리폰이 지상에 내려앉자, 중무장을 한 기사 수십 명이 다가온다. 

“용사님이 돌아오셨다!!!” 

하선율을 알아본 기사가 소리쳤다. 

“고생하셨습니다.” 

“역시, 용사님이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수십 명의 기사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하선율을 띄어준다. 함락되었던 부신을 탈환했단 소식을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하선율은 그리폰에서 내렸다. 그러자 경비 대장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걸어왔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하선율은 경비대장의 뒤를 따르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떻게 하지.’ 

하선율은 우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부신의 멸망은 세이버가 벌인 일입니다. 월드 보스였던 아드로스로 여러 실험을 통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죠. 

뜬금없는 말을 해왔다. 

차주성이 아무리 재수 없는 놈이긴 하지만, 악한 인물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살린 주민을 세라고 하면 수천 명이 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세이버가 이런 끔찍한 짓을 벌였다고? 

차라리 아드로스의 정기를 가지고 있던 저 사내가 배후라는 게, 더 신빙성 있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성을 먹은 것도 그렇고, 갑자기 나타나 손쉽게 감염된 화민서를 처치한 것도 그렇고. 

하선율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던 그때였다. 

-들어와. 

사내의 부름에 한 여인이 하선율의 앞에 섰고, 하선율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 몰라. 일단 시키는 대로 해보자.’ 

아직도 긴가민가하지만, 지금으로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우빈이 말한 계획 또한 손해 볼 게 하나 없는 일이기도 했고. 

여러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샌가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하였다. 

끼이익- 

경비 대장이 문을 열곤, 손바닥을 펼쳐 들어가라는 듯 행동한다. 

하선율은 익숙하다는 듯, 방에 들어섰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금색 카펫. 붉은 타일과 황금빛 문양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방 중앙으로 기다란 식탁이 놓여있었다. 백여 가지의 진수성찬으로부터 침샘을 자극하는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서 오게. 용사여. 앉게나.” 

하선율을 본, 하몬의 국왕, 수메르 아카 하몬이 인자하게 웃으며, 손짓한다. 그의 뒤로 중무장한 기사 10명이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의 앞으로 투명한 장치가 보였다. 언제나 왕은 이런 식이었다. 

앞에선 허허거렸지만, 용사를 극도로 경계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전부를 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앞에 있다는 건,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식사는 됐습니다. 시간 없어서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하선율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달해줬다. 

부신에 있었던 일, 주민들의 상태와 감염된 용사. 그를 처치한 인물이 성을 먹었다는 것까지 전부 알려줬다. 

이야기를 듣는 국왕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부신은 하몬이 소유한 성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규모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 부신이 용사의 손에 넘어갔단 말이지.” 

국왕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주름이 가득한 미간을 찌푸린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소리들을 줄 알았다. 최악의 경우엔 성을 탈환해달라 부탁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왜일까. 

“수고 많았네. 내 오늘 특별히 그대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두었다네. 한술 뜨고 가게나.” 

의아함이 떠오를 만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식사를 권유할 뿐. 

“식사는 됐습니다. 그리고 아직 알려드릴 내용이 더 남았습니다.” 

원래라면 화민서를 데려와 증인으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띠링- 

[종언 아드로스의 정기] 

종류: 포션 

등급: A 

설명:종언 아드로스의 정기가 담긴 병입니다. 강력한 마기가 농축되어있습니다. 

하선율이 포션을 꺼내자, 국왕의 표정에 흥미롭다는 듯, 눈매를 좁힌다. 

“그게 무엇인가?” 

“부신을 멸망시킨 매개체입니다.” 

그 말에 국왕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하선율은 시선을 느끼며, 우빈이 했던 것처럼 하급 영체를 소환해 포션을 입에 쑤셔 넣었다. 

크르르르- 

푸른 빛으로 가득하던 고블린 영체가 사납게 으르렁 거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파스스 전신으로 검은 기운이 새어나오더니 두 눈으로 주황빛 광체가 떠오른다. 

-크아아악!!! 

주인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아가리를 벌려 하선율을 향해 달려든다. 

하선율은 그런 고블린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크아악!! 

고블린이 그대로 구속되어 이빨만 딱딱거린다. 

“뒤, 뒤로 물러서십시오! 폐하!” 

“아니, 저게 무슨!” 

그 모습을 본 기사가 검을 뽑아 들며 경계한다. 국왕 역시 당황한 듯, 몸을 움찔거린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평화에 찌든 귀족은 몬스터 한 마리를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대였으니까. 

띠링- 

[에뮤를 소환합니다.] 

하선율은 개의치 않고, 행동을 이어나갔다. 

“지금 보여주는 건 여러분한테도 적용되는 거니, 잘 봐두세요.” 

하선율은 손아귀에서 발버둥을 치는 고블린을 에뮤의 목에 가져다 댔다. 

-끼에엑!!! 

고블린이 날카로운 이빨로 에뮤의 목을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핏물이 솟구치고, 깃털이 흩날린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파스스- 에뮤의 전신으로 검은 기운이 치솟았다. 

이 광경을 본 국왕과 기사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는다. 심각한 표정을 보아하니, 충분히 알아들은 것으로 판단됐다. 

‘이 정도면 됐나.’ 

하선율은 그대로 감염된 에뮤와 고블린을 두 동강 냈다. 

파스스- 영체였던 고블린의 육신은 빛무리로 녹아내렸고, 에뮤는 차갑게 식어 바닥을 적셨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직접 보여드리는 편이 빠르게 이해하실 것 같아서 그런 거니, 이해 바랍니다.” 

“아닐세, 충분히 이해되었네. 저것에 물리면 우리도 이성을 잃고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건가?” 

“네. 1명만 감염돼도 번지는 건 순식간이죠.” 

“······.” 

하선율의 말에 국왕의 표정에 근심이 떠오른다. 

“부신의 생존자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얼마뒤면 도착할 테니. 미리 대비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선율은 그 말을 남기곤, 밖으로 나갔다. 

철컹- 

문이 닫히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아직도 식탁 앞엔 주황빛 눈을 번뜩이던 에뮤가 처참히 식어가고 있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눈치를 보던 기사가 움직이려 하자, 국왕이 오른손을 올리며 저지했다. 

국왕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꿀꺽- 

기사들의 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지독한 침묵이 감돌던 그때였다. 

국왕의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부터 왕국의 모든 출입을 제한하겠다.” 

**** 

후웅- 

푸른 하늘 위로 푸른빛이 가득한 용이 비행한다. 

그 아래로, 구우우우우- 수천 마리의 짐승이 대지를 두드리며 앞으로 쏘아졌다. 

절로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압도적인 행렬이었다. 

그 무리의 선두. 

후웅- 

우빈은 검은 불사조 위에서 따라오는 주민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주민에게 투자한 탈것은 전부 F급으로서 총 200만 룬 가량을 투자한 상태였다. 

제법 큰 지출이었지만, 투자할 만한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쿠우우- 

미친듯한 행렬에 지금까지 단 1번의 사소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던 몬스터도, 숲에 숨어있던 도적들도 감히 덤벼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규모였기 때문이다. 

지금 소환한 건 F급 탈것이지만, 저 개체 하나하나가 A급 영체라면 어떻게 될까. 

작은 성 하나로 5대 왕국의 전력을 씹어먹을 무력을 갖출 수 있을지도 몰랐다. 

‘쉽지 않네.’ 

우빈은 여유가 될 때마다 작업실에 들어가 부신에서 산 C급 영체를 업그레이드시켰다. 

그 결과는 이러했다. 

띠링- 

[로얄 고블린][S] 

[대마법사 샤논][S] 

[전투대장 자이언트 오크][A] 

[링링][A] 

........ 

..... 

.... 

C급에서 S급으로 올린 영체는 단 2개. A급은 무려 11개나 만들 수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어렵게 모아놓았던 작업실의 포인트를 전부 사용했다는 것 정도인데. 

‘어떻게 수급하지.’ 

전력을 빠르게 보강하려면, 포인트를 올릴 방법을 마련해야 할 듯싶었다. 

“으악! 도와주세요.” 

“잠깐만요! 배가···.” 

우빈은 행렬에서 뒤처지는 주민을 보며, 혀를 찼다. 

행렬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숫자가 숫자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종종 터져 나왔다. 

낙마와 같은 사소한 부상을 시작으로 인간 본연의 생리현상까지. 

전열에서 이탈하는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버리고 가도 상관없는 숫자였지만, 우빈은 오유주와 민주희에게 그들을 도와주라 일러두었다. 

그 결과. 

“그냥 부신에 있을 걸 그랬나 봐. 솔직히 남작님이 한 게 뭐가 있어.” 

“그건 그렇긴 하지. 세금만 왕창 뜯었잖아. 결국 성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용사라면 치를 떨던 주민들이 조금씩 우빈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흐름이었다. 

‘신경이 쓰이게 하네.’ 

우빈은 시선을 돌려 등 뒤를 응시했다. 

후웅- 

다크 피닉스의 바로 뒤, 검은색 와이번이 우빈의 뒤를 바짝 따라온다. 

와이번 위론 고지태와 화민서를 포함 총 7명의 무리가 올라타 있었다. 

하선율이 화민서를 감시하기 위해, 붙여놓은 신화소속 길드원들이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계속해서 우빈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러고 있는 지금도 길드 메신저로 보고를 하고 있겠지. 

‘그나저나 어디 있는 거지.’ 

우빈은 영체를 나눠주며 계속해서 백발의 NPC를 찾았다. 

민주희 역시 백발의 NPC를 포함, 같이 전이된 윤지아, 조기훈, 김호준을 찾는 듯 보였고.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차라리 척결 길드 사옥에서 시체라도 나왔으면 시원하게 포기하겠는데, 거기서 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고 다닐 걸 그랬나.’ 

우빈이 시스템창이 나오지 않는 주황빛 파편을 보며, 생각에 잠긴 그때였다. 

“하몬이에요! 도착했어요!!!!” 

“저기가··· 하몬.” 

“직접 가보게 될 줄이야.” 

숲이 가득한 산을 넘자, 광활한 평야의 중심, 우뚝 솟아오른 하몬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잘 전달했으려나.’ 

기뻐하는 주민들을 뒤로한 채, 우빈은 하몬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 

하늘 위로 떠 올라있던 거대한 용이 사라진다. 수십 명의 주민을 태우고 이동했던 블랙 펜리르 역시 모습을 감춘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우빈의 말에 주민들의 시선이 쏠린다. 

“탈 것은 선물로 드리고 싶지만, 저와 함께할 분들을 위해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돌려받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었다. 

저들에게 준 탈것은 F급으로 하나당 100룬에서 500룬정도면 살 수 있는 싸구려 아이템이었으니까. 

하지만 주민들에겐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당장 저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주기 싫어서 아쉽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를 증명하듯. 

띠링- 

[2,460개] 

4천 개를 넘게 나눠줬는데, 되돌아온 건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빨리 돌려드리세요! 이봐! 거기! 주머니 속에 있는 거 안 빼요?” 

그나마 양심적인 사내가 주민들을 다그쳐 몇 개의 탈 것을 더 가져왔다. 

그 사내는 전 부신의 기사단장인 쿠반이었다. 

“죄송합니다. 다들 잃은 게 너무 커서 그런 거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쿠반이 우빈에게 F급 탈것 10여 개를 주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이것 말고도 2천 개가량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오려면 어느 정도의 물량은 들고 있는 게 좋을 테니까. 

“지금까지 의심했었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쿠반에 우빈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처음엔 불만으로 가득하던 표정에선 더 이상 적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우빈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을 보면, 불만을 품는 것 자체가 양심이 없는 일이었다. 

그 어떠한 조건 없이 탈것까지 빌려주며 하몬에 데려다주지 않았던가. 

“잘 썼습니다.” 

쿠반이 손에 들린 푸른빛 구체를 우빈에게 넘겼다. 

저건 지금 받으면 안 되는 물건이었다. 

“그건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위험할 때, 도움이 될 겁니다.” 

“네?” 

우빈은 의아해하는 쿠반을 뒤로한 채, 검은 불사조 위로 올라섰다. 

수천 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우빈에게 쏠린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부신은 언제나 열려있으니, 생각 있으신 분들은 찾아오세요.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웅- 거대한 새가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고, 펑!! 어느샌가 우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몇몇 주민들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냥 다시 돌아갈까?” 

“미쳤어? 오면서 못 봤냐? 괴물이랑 도적들이 우글우글하더만.” 

감히 돌아가겠단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길이 험했다. 

그런데도 주민들이 하몬에 들어가기 꺼리는 이유는 바로 타지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막상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불안했다. 

아무리 부신이 하몬 왕국 소속이라 해도, 저 성에 있는 주민에게 있어, 여기 있는 우리는 난민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성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줄까? 

불안감과 기대로 미묘한 감정을 느끼던 주민들은 하몬의 성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하몬은 부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이렇게 멀리 있는데도, 성의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로 높이 솟은 위용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와···” 

감탄과 함께, 성과의 거리가 가까워져 갔고, 성문에 도달하자 주민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뭐, 뭐야···” 

“······” 

활짝 열려있어야 할 문이 굳게 닫힌 건 물론, 수백 명의 기사가 날카로운 검을 들곤 입구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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