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결전(3)
쾅!!!!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온다.
불길이 치솟으며, 주변의 식생이 처참하게 파괴된다.
아비규환의 전장 속.
최상위 용사 십여 명이 시선이 한 사내에게 쏠린다.
“형!”
저 멀리서 익숙한 사내가 손을 휘휘 저으며 다가온다.
“뭐야···”
“저거··· 정현태 아니야?”
십수명의 용사는 저 사내가 누군지 한번에 알 수 있었다.
정현태.
세이버의 자금을 담당하며, 꽤 큰 상단을 운영하는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시킨 대로 전부 끝냈다고?”
“뭘?”
자연스럽게 수십 명의 시선이 차주성을 향한다.
호기심이 섞인듯하면서도 경계 가득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 중 가장 당황스러운 사내는 차주성이었다.
늘 웃음으로 일관하던 차주성의 표정이 찰나지만 싹 굳었다.
‘현태가 살아있어?’
서희빈의 능력으로 이세현의 모습을 봤을 땐, 그저 무슨 속임수를 썼겠거니 치부했다.
그러나 정현태의 모습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배신한 건가. 어떻게 한 거지.’
현태도 그렇고 이세현도 그렇고, 쉽게 넘어갈 정도로 단순한 녀석들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태를 보아라, 완벽하게 우빈에게 돌아선 듯이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재미있네.’
딱딱하게 굳었던 차주성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차피 이번 회차는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목적.
‘어울려줄까.’
판단을 내린 차주성이 활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현태야! 고생했어.”
차주성이 두 팔을 넓게 펼치며 다가가자, 정현태가 당황한 듯 주춤거린다.
“어? 어.”
“세현이는?”
“세현이 누나?”
정현태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활짝 열린 던전의 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일렁거리는 공간으로 익숙한 두 여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긴 생머리를 흩날리는 이세현과 단발머리에 야생적인 포스를 풍기는 함지연이었다.
“안녕!”
함지연까지 나타나 당황할 법도 했지만, 차주성은 능청스럽게 손바닥을 올리며 인사했다.
“뭐야? 이세현에 함지연까지? 저기에 강우빈인가 뭔가 부신 박살 낸 놈이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뭐야. 세이버 놈들이 왜 저기서 나와?”
“내가 말했잖아. 차주성이 전부 꾸민 일이었다고.”
모두가 의구심을 품자, 하선율이 쐐기를 박았다.
“차주성이 전부 꾸민 일이라고?”
열댓 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변의 풍경에 시선이 갔다.
“위험해! 일단 뒤로 후퇴한다!”
“살려주세요! 으아!!!!!!!”
그 사내가 들어갔다고 보고된 던전에서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그 결과 사망자는 없었지만, 상처를 입어 전장을 이탈한 사람들이 30% 이상이다.
던전에 들어간 놈들이 함정을 판 것이다.
그런데 그 던전에서 세이버 소속 용사가 튀어나왔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것일까?
-주성이 형! 시킨 대로 전부 끝냈어.
거기다 정현태가 던전에서 나온 직후 한 말. 병신이 아닌 이상에야 하선율이 언급하지 않았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김강준이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자세를 낮춘다.
김강준뿐만이 아니었다.
랭킹 1위의 강범태를 시작으로 랭킹 7위의 가우희까지.
차주성에게 무기를 겨누며, 사냥을 하듯 자리를 잡는다.
“무섭게 왜들 그래.”
그 광경을 본 차주성이 양 손바닥을 보이며 씨익 눈웃음을 짓는다.
“너 뭐야.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뭐가?”
“저기서 왜 저 새끼들이 나온 거냐고. 뭘 시킨 거지? 제대로 말 못 하면 바로 제압하겠다.”
김강준의 경고에 차주성이 올린 손바닥을 회수하며, 검지로 볼을 긁적인다.
“그러게··· 저기서 왜 나온 걸까. 왜 배신한 거지.”
“뭐?!”
웃고 있던 차주성의 표정이 사늘하게 내려앉는다.
‘이번 회차는 여기까지인가.’
김강준의 저 물음에 답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최소한 어떻게 현태와 세현이를 세뇌했는지 알아내고 싶었는데.
‘역시 똘똘하단 말이야.’
차주성의 눈매가 가로로 길게 좁아진다. 투명하고 순수하던 빛이 살기로 가득 물든다.
이런 식으로 내몰려본 지가 얼마 만인지.
‘재미있어.’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쳤다.
다음을 내다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죽음의 잔향이 가슴을 짓누르며, 숨을 턱 막히게 만든다.
처음엔 절망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를 죽인, 나를 위기에 빠트릴 그 새끼들을 짓밟아줄 생각을 하면, 너무나도 재미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다. 저 새끼들한테 뭘 시킨 거냐고.”
“시끄러우니까 좀 닥쳐.”
“뭐?!”
차주성의 날카로운 대답에 김강준의 표정이 꿈틀거린다.
“넌 항상 입이 문제야. 멍청한 주제에 나 댈 줄 이나 알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이 새끼가.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푸하하하하”
김강준의 대답에 차주성이 웃음을 터트린다.
“어떻게 맨날 하는 대사가 똑같냐.”
“뭐?”
“그때도 딱 이랬었는데.”
차주성의 표정이 마치 과거 돌아간 듯, 허공을 응시하며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소진씨가 왜 죽었는지 알아?”
“걔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알아야지. 그 주둥이 때문에 죽었는데.”
순간 김강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다.
“뭐? 소진이가 나 때문에 죽어?”
최소진.
김강준의 오랜 동료이자,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연인의 이름이었다.
최소진은 아드로스를 공략하면서 사고로 사망했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죽었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말하면 입만 아프지. 말해도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텐데.”
차주성의 너스레에, 김강준의 우람한 팔로 핏줄이 솟구친다.
“개새끼가!!!”
분노에 가득 한 발길질을 내지르며 펑! 쏘아진다.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후웅- 거대한 손아귀가 차주성의 목을 향해 쏘아진다. 하지만 김강준의 손은 차주성의 목을 움켜쥘 수 없었다.
차주성의 손이 김강준의 손바닥을 후려쳐 밀쳐낸 뒤, 그대로 김강준의 틈을 비집고 앞으로 튀어 나간다.
“어?!”
차주성의 손아귀가 김강준의 목을 짓누르며 쾅!!!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찍는다.
순간 시야가 하얗게 번쩍일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뒤흔든다.
“내가 아무리 약해도 너한테는 안 맞지.”
차주성이 여유롭게 히죽거린다. 하지만 상황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목으론 날카로운 날 칼이 번뜩인다. 목뿐만이 아니었다.
심장과 명치, 양쪽 눈과 후두부까지.
차주성의 움직임에 반응한 십여 명이 차주성을 에워싼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차주성의 목을 겨눈 하선율의 검이 차주성의 연약한 목을 그대로 벤다.
붉은 핏물이 날 칼을 따라 흐르며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칼날이 조금씩 깊게 베이며 방울로 흐르던 핏줄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적당히 하시죠. 알아내야 할 게 많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우희가 하선율의 손을 움켜쥔다.
‘젠장···’
하선율은 입술을 잘끈 씹으며, 칼을 거두었다. 당장이라도 저 새끼의 목을 치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왜 부신을 멸망시켰는지, 왜 이태양을 죽였는지 이유를 알아야만 했으니까.
“아야야야. 적당히 해. 아프다고.”
“이거 안 놔?! 이 새끼들이.”
정현태와 함지연이 목을 눌린 채 구속당한다. 이세현 역시 아무 말 없이 속박당하며, 입을 다문다.
차주성도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주성이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지금 모인 인원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르지 않았으니까.
차주성의 양손을 시작으로 목과 다리 전신으로 구속 장치가 입혀진다.
“씨발 놔봐! 놓으라고!!!”
정신을 차린 김강준이 사납게 차주성을 향해 다가간다.
“다시 한번 말해봐. 아까 한 말 무슨 말이야.”
“뭐가?”
“이 새끼가!!! 나 때문에 소진이가 죽었다며! 무슨 개소리냐고!”
“아, 그거.”
차주성이 실소를 흘리며 미소 짓는다.
전신으로 구속 장치가 강렬한 빛을 내뿜는다.
최상급 장비로써 시스템의 힘을 99% 이상 짓누르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즉, 지금의 차주성은 NPC보다도 못한 육체를 가졌다는 소리였다.
벌벌 떨어도 모자랄 판에, 능청을 부린다.
“개 새끼가! 똑바로 말 안 해?!”
“말하면 뭐가 바뀌나?”
“뭐?”
“알겠어. 말하면 될 거 아니야.”
차주성은 김강준의 강압에 못 이긴 척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순간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차주성에게 쏠렸다.
“아드로스 공략 1차 선발대였나? 내가 약간 손 좀 썼지.”
“뭐?”
저 말에 표정이 변한 건 김강준뿐만이 아니었다.
아드로스 1차 선발대라면 공략에 참여했던 전원이 전사한 최악의 사건이었으니까.
“뭘 그렇게 놀라. 민망하게, 별로 한 건 없어. 살짝 방해했을 뿐이야. 도망치지 못하게 발을 자른 정도? 그렇지, 지연아. 네가 직접 했잖아. 맛있어 보이는 녀석이 있다고.”
순간 십수 명의 시선이 함지연에게 향한다.
“어?! 어··· 그, 그렇지.”
“맞지? 답이 됐나?”
차주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이 새끼가!!!!!”
김강준의 주먹이 차주성의 얼굴을 향해 쏘아진다.
구속 장치로 시스템의 힘을 잃은 지금, 전력을 다한 주먹이 꽂히면 즉사할 것이 분명했다.
쑤걱-
“커헉···”
주먹을 내리꽂던 김강준의 주먹이 멈춘다.
“이게 뭐야···”
김강준의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굵은 대검에 명치를 그대로 꿰뚫어, 우뚝 솟아있다.
“내가 말했잖아. 너한테는 안 맞는다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릉- 명치에 박힌 대검이 그대로 위로 호선을 그린다.
철벅-
하나였어야만 하던 머리가 두 동강으로 쪼개지며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뭐, 뭐야?!”
“강준 씨!!!”
십수 명의 시선이 당혹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대검을 든 사내에게 쏠린다.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김강준을 죽인 사내는 아주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띠링-
[강범태 용사님의 악행 수치가 일정 수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수배가 떨어집니다.]
[강범태 용사님을 처치하세요.]
그 사내는 다름 아닌 랭킹 1위이자, 엘리드 최강이라 불리는 사내, 강범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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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최상급 발목 구속 장치를 해체하였습니다.]
[능력치를 10% 회복하였습니다.]
[최상급 손목 구속 장치를 해체하였습니다.]
[능력치를 10% 회복하였습니다.]
[최상급 상의 구속 장치를 해체하였습니다.]
[능력치를 10% 회복하였습니다.]
........
.....
....
.
탈력감으로 가득하던 육신으로 힘이 들끓어 오른다.
“후아··· 역시 괴물이라니까. 고생해서 작업한 보람이 있어.”
차주성은 찌뿌둥한 듯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억···허억···”
자신감 넘치게 차주성을 내려다보던 십수 명의 용사가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허덕인다.
“씨발! 너 미쳤어!”
작은 이마로 검은 뿔이 솟구친 여인, 하선율이 붉은 눈을 번득이며 한 사내를 올려다본다.
그 사내의 모습은 특별했다.
전신으로 은은한 황금빛이 감돌았으며, 머리 위론 괴상한 황금빛 링이 원을 그리며 떠올라있었다.
원래라면 믿음직스러운 아군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텅 빈 듯 공허한 눈과 기계적인 움직임이 마치 조종당하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강범태! 정신 차리라고!”
“고작 말 몇 마디로 돌아올 거였으면 시계를 3번이나 써가면서까지 노력하지도 않았지.”
하선율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차주성이 방패까지 버리곤 터덜터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개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하선율처럼 강범태에게 제압당한 랭커들이 울분을 토한다.
“시끄럽다. 전부 죽여.”
차주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으악!!!”
“제발, 살, 살려줘! 으악!!”
강범태의 검에 상위 랭커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고 소멸해간다.
“미쳤어···”
하선율은 절망적인 상황에 허망하게 고개를 떨궜다.
비명과 절망으로 가득한 전장의 중심.
차주성의 시선은 오직 한 장소로 향했다.
“·········.”
그 장소엔 세 명의 배신자가 있었다.
“현태야. 왜 그랬어?”
“·········.”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현아, 죽은 줄 알았잖아. 괜찮아? 지연이 너는 또 왜 그래? 뭘 그렇게 무서워해?”
“·········.”
역시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질문이 잘못됐나.”
화를 낼 법도 했지만, 차주성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강우빈 그 새끼 어디 있어.”
그 말에 정현태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무미건조하던 이세현의 표정이 꿈틀거린다.
함지연은 놀라는 걸 넘어, 눈가로 촉촉한 눈물이 고인다.
도대체 뭘 어쨌길래, 이름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것일까.
‘궁금해.’
차주성의 표정이 사늘하게 내려앉는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고문이라도 해서 입을 열게 만들고 싶었지만, 굳이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다.
“이리 와봐.”
서희빈이라는 아주 간편하면서도 쉬운 수단이 존재했으니까.
“살, 살려주세요···”
“죽일 거면 진즉 죽였지. 안 죽일 테니까. 특성으로 저 새끼들 기억을 봐.”
“네? 하지만 저분은 동료잖아요.”
“그래··· 동료였었지.”
차주성의 사늘한 표정에 서희빈이 흠칫 놀라며, 행동에 나선다. 정현태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놓는다.
띠링-
[심안의 주인이 발동하였습니다.]
심안의 주인.
[심안의 주인]
종류: 특성
등급: S
효과
-대상과 접촉 시,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주의! 대상이 심안의 주인을 거부할 경우, 치명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접촉하는 것만으로 대상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기적인 효과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특성이 활성화되는 순간, 특성을 거부하기 마련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체를 보는 것 이상으로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위였으니까.
하지만 정현태는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띠링-
[화마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강렬한 내면이 필터 없이 서희빈으로 흘러들어왔다.
“꺄악!!!!”
띠링-
[심안의 주인이 해체되었습니다.]
서희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떼곤, 바닥에 주저앉았다.
양 손바닥을 펼쳐, 몸을 확인했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러나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신이 불타 전신이 익어 숨조차 쉴 수 없던 고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으니까.
“뭐야, 왜 그래? 빨리 보여줘.”
“죄, 죄송합니다.”
“뭐? 왜?”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차주성의 사늘한 시선이 서희빈을 압박하던 그때였다.
“이런 악취미도 있었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차주성의 시선이 그 장소로 향했고, 그러자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강우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