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환생(1)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화민서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고지태가 한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야···.”
고지승은 고지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고지태.
그는 한국의 5대 길드 중 하나인 척결의 마스터이자, 한국 랭킹 3위에 오른 최고의 영웅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약소국 하나 정도는 가볍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을 초월한 존재였다.
그런 초월적인 존재가 충성스러운 기사처럼 한 사내에게 고개를 조아린다.
‘도대체 누군데 저렇게까지···.’
고지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다. 불안함을 넘어 답답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두근-두근-
지금 자신이 담그려고 했던 인물의 위험성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 삼촌 갑자기 왜 저래?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고우림이 소매를 당기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져왔다.
***
모두의 시선이 쏠린 방의 중심.
“어제 도착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해외 일정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지태가 과하게 자세를 낮추며 우빈에게 사과를 한다.
‘부담스럽게 왜 이래.’
우빈은 그 모습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고지태라 하면 화민서를 구해주는 조건으로 복종하겠다 계약한 인물이지 않은가.
막연하게, 계약한 건으로 부려 먹을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약속을 이행할 줄이야.
‘나쁘지는 않네.’
보아하니, 고지태의 영향력은 상당해 보였다.
당장, 여기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라. 침 삼키는 소리조차 조심할 정도로 고지태의 눈치를 보고 있다.
헌터 백화점의 김택문을 시작으로 협회 소속 김백청까지. 사회적 권력을 가진 녀석들의 명성은 도움이 됐다.
지금 역시 그래 보였다.
“뭐야, 저 사람도 귀환자였나 봐.”
“괜히 S등급 판정받은 게 아니었구나.”
“도대체 누구길래, 마스터가 저렇게 어려워하는 거지?”
고지태의 행동에 우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부터 달라져 있었다. 마치 소문으로만 듣던 유명 대기업의 창업주를 보는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흥미로움과 호기심 가득한 시선 속.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고지태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곤 물어왔다.
“지, 지태야. 아시는 분이야?”
굳이 답할 필요도 없이 사건의 원흉인 고지승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시와 경멸하는 표정으로 희나와 우빈을 바라보더니, 지금의 표정은 온순하게 바뀌어있었다.
“어, 형도 여기에 있었구나. 인사드려. 그쪽에 있을 때, 큰 도움을 주신 분이야.”
“그쪽이면···. 아, 이거 큰일 났네. 그런 분이신 줄도 모르고. 내가 큰 결례를 저질렀어.”
고지승이 능청스럽게 우빈의 앞으로 다가온다.
“서로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지태의 형인 고지승이라고 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악수를 청한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굳이 저 장단에 맞춰줄 이유가 없었다.
“인제 와서 인사할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네?”
“인사 말고, 저와 희나한테 할 말 없습니까?”
“·········.”
“없으면 말고요.”
우빈은 부들부들하며, 입을 꾹 다문 고지승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희나야.”
“어? 응.”
희나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 다급히 뒤따라온다.
“어디 가시나요. 보고드릴 내용이 많습니다. 그리고 저도 개인적으로 우빈씨에게 궁금한 게 있고요.”
고지태가 떠는 우빈은 급히 불러세운다. 우빈은 그런 고지태에게 냉담하게 답했다.
“저는 딱히 해드릴 말이 없습니다. 굳이 듣고 싶은 정보도 없고요.”
우빈이 고지태의 손에 복구된 포션 병을 올려놓는다.
“형이라면 친형 맞죠? 가족 관리 좀 하셔야겠어요. 가만히 놔두면 생사람 여럿 죽어 나가겠더라고요.”
“네? 그게 무슨.”
고지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포션 병과 형인 고지승을 번갈아 바라본다. 우빈은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끼이익-
굳게 닫힌 문으로 기괴한 소리가 들려오던 그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우빈의 등 뒤로 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사죄할 기회를 주세요.”
고지승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친다.
“아빠! 미쳤어?! 왜 그래!!!”
고우림이 그런 고지승을 일으켜 세우려 노력한다.
우빈은 만족스러운 행동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고지승의 앞으로 걸어가 읊조렸다.
“그래요? 뭘 잘못하셨죠?”
“그, 그게···”
고지승이 우빈의 질문에 당황한 듯 답을 못한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핀다.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는 모양이었다.
“모르시나 보네요. 그러면서 무슨 사과를 한다고.”
“압니다. 알아요!”
우빈이 그대로 걸어가자, 고지승이 다급하게 외쳤다. 눈을 질끈 감더니, 작게 조소한다.
“사실은 전부 제가 꾸민 일입니다.”
“······”
“저기 증거물로 나온 포션은 제가 희나에게 준 포션입니다. 게이트 현상 실습을 한다길래 걱정이 됐거든요.”
고지승이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나간다.
‘부성애라 이건가.’
고지승의 말을 듣는 우빈의 표정이 사늘하게 가라앉는다.
고지승의 말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게이트 실습 도중에 고우림의 호기심으로 보스 몬스터가 부활. 생각보다 중대한 범죄행위에 고지승 본인이 직접나서서 고우림을 돕기로 했단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직원을 매수해 검사 결과를 조작하고 고우림의 지문이 나온 증거물을 파괴했다.
“희나에게는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래도 나쁜 짓을 할 마음은 없었어요. 증거물을 직접 제 손으로 부수면 이 일은 여기서 딱 끝났을 테니까요.”
끝까지 자신의 변론을 잊지않았다.
‘나쁜 짓을 할 마음은 없었다···’
우빈은 고지승의 말을 꼽씹으며, 혀를 찼다.
저 말이 너무 거슬렸지만, 이렇게까지 무릎을 꿇고 비는 이상 우빈이 직접 손을 쓸 필요까진 없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러면 아까 보여준 행동이 전부 연기였다고?”
“와··· 소름 돋아, 싸이코 패스 아니야?”
고지승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표정이 경멸로 바뀐다. 고지태도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표정을 굳혔다.
우빈은 고지승의 폭로에 당황한 고우림의 앞으로 강희나를 데리고 갔다.
“너는 뭐 할 말 없어?”
“······”
고우림이 눈을 번뜩이며, 우빈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당장 욕이라도 튀어나올 표정이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꽉 다문 입술 너머로 핏물이 주르륵 흐를 뿐이었다.
“없구나. 아쉽네. 아빠는 저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우빈의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고지승을 가리켰다.
고지승은 양 주먹을 꽉 지곤 부들부들 데며, 멈춰있었다. 그 모습을 본 고우림의 표정에서 독기가 사그라든다.
깨달은 것이다. 지금 이 싸움에서 완벽하게 패했다는 것을.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상황 보고 마음에 들면 그때, 찾아뵙겠습니다.”
우빈은 상황을 지켜보던 고지태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곤, 몸을 돌렸다.
그대로 나가려는데, 상황을 파악한 고우림이 강희나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미안해···”
고우림의 떨리는 음성이 작게 흘러나온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고우림이 저항 없이 강희나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우, 우림아···”
강희나가 당황한 듯 고우림을 향해 다가간다. 우빈은 그런 강희나를 붙잡았다.
우빈의 단호한 표정에 강희나는 고우림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제발. 한 번만 봐줘. 다시는 안 그럴게.”
“가자.”
우빈은 기계적으로 사과하는 고우림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고,
“미안해. 미안하다고!”
“······”
“사과했잖아요! 받아주세요. 희나야!!!”
고우림의 악에 받친 절규가 방안 가득 터져 나왔다.
***
“죄송합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설마 이사님이 직원까지 매수해서 조작을 하실줄이야.”
지운성이 차에서 내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죄한다.
“피곤해서요.”
“오늘 하루 고생하셨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등 뒤로 지운성의 외침이 들려왔다.
우빈은 그런 지운성을 뒤로한 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희나와 우빈은 지운성의 차를 타고 집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물러.’
우빈의 시선이 강희나에게 향한다. 고우림이 절규하던 모습이 계속해서 맴도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고, 살인자로 몰아넣으려고 했던 인물을 보곤, 연민을 느끼다니.
마음에 안 들었다.
아무래도 오유성에게 심어준 것처럼 강인한 정신력을 불어넣을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우빈이 강희나의 정신 교육을 떠올리며 집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꼬르륵-
강희나의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앗!”
희나가 얼굴을 붉으며, 배를 움켜쥔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시켜줄 테니까. 골라봐.”
“먹고 싶은 거?”
“어. 많이는 못 사줘. 69만 원 이내로 골라.”
5만 원은 오유성의 몫으로, 1만 원은 척결 길드까지의 이동비로 사용했기에, 우빈의 수중엔 69만 원이라는 돈밖에 없었다.
“내가 돼지인 줄 알아! 69만 원어치를 어떻게 먹어!”
“돼지 맞잖아. 어제 보니까. 엄청 먹더만.”
“오빠!”
우빈의 농담에 강희나가 발끈하며, 소리친다.
“진짜, 이러니까. 좀 오빠 같네.”
옛날에 느껴본 비슷한 분위기에 강희나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들었다.
“오빠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나? 흠··· 치킨? 요즘은 어디 치킨이 맛있냐.”
“무슨 치킨? 양념? 후라이드?”
“치킨은 후라이드지.”
엘리드였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평화로운 대화를 이어나가자, 어느샌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치킨은 다음에 먹어야겠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위를 자극하는 강렬한 향기가 우빈을 맞이해줬다.
“형!”
오유성이 우빈을 향해 뛰어와 덥석 껴안는다.
“왔니? 빨리 씻고 와서 저녁 먹어. 엄마가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했어.”
엄마가 앞치마를 두르곤, 반갑게 우빈과 희나를 반겨준다.
우빈은 생각지도 못한 따뜻한 온기에 신발장 앞에 그대로 멈춰 섰다.
“오빠, 뭐해. 빨리 와.”
“어? 어.”
“우와-. 잡채에 불고기에 맛있겠다. 웬일이야? 엄마. 오늘 일 안 갔어?”
너무나도 평화로운 일상에 우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고,
“잘 먹겠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이라는 안락함에, 차갑게 굳어있던 마음이 작게나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식사는 빠르게 끝이 났다.
엄마는 오늘 하루가 고단했는지, 바로 잠드셨고, 희나 역시 생각이 많은지 방으로 들어갔다.
오유성은 계속해서 우빈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내일 있을 시험을 위해서 자라는 말에 바로 방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우빈은 다시금 찾아온 혼자만의 시간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투력 측정을 갈아엎은 천재의 등장!]
[복주머니에서 등장한 찬란한 유물의 값어치는? 최소 4천억으로 추정.]
[척결 길드에서 등장한 강우빈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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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기사 중 메인을 장식하고 있는 기사는 전부 우빈과 연관된 기사들이었다.
‘언제 또 찍었데.’
무의식적으로 누른 사진으로 척결 길드에서 나오는 우빈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처음엔 낯설고 귀찮았는데,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인기는 곧 힘이 되는 게 현대 사회이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명성을 쌓다 보면 귀찮게 앞을 가로막는 놈들이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 뭐하지.’
신분증 발급을 시작으로 엄마와 희나의 생활을 확인한 지금.
무얼 해야 할지, 딱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레벨은 올릴 필요 없어 보이고, 역시 돈인가.’
돈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해결될 거 같았다.
초등학생이 고작 몇 시간 만에 75만 원을 벌어들였다.
만약, 우빈이 마음만 먹고 던전을 클리어한다면 하루에 수백만 원 정도는 우습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굳이 사냥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정현태를 붙잡고 난 뒤로부터, 강탈로 빼앗은 아이템을 처분한다면, 평생 먹고 사는 데엔 무리가 없어 보였으니까.
그렇기에 우빈의 머릿속엔 딱 2가지 목적만이 떠올랐다.
-방심하지 마. 엘리드는 그 새끼들이 만든 시스템에 비교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는 세계였으니까.
앞으로 지구에 터질 위기를 대비할 힘을 기르는 것.
또 하나는
‘곽정수···’
완벽했던 복수를 방해한 곽정수. 그 새끼를 잡아 족치는 것.
무엇이 되었든, 우선은 현대 사회에 적응할 필요성이 있었다.
‘일단 운전면허부터 따야겠네.’
아침에 협회에 가는 길을 시작으로 강희나를 찾아서 척결 길드로 향하는 길까지.
순간순간 다크 피닉스나 블랙 펜리르를 소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럴수 없었다.
시선이 몰리는 건 둘째치고, 소환수를 뽑는 행위는 긴급 상황을 제외하곤 불법으로 정해진 일이라나.
앞으로 이동할 일이 많아보이는데, 그때마다, 택시나 남의 차를 얻어타고 다닐수는 없어보였다.
‘일단 자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우빈은 폭신한 침대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대로 내일을 준비하며 쉬려는데, 문득 확인하지 못했던 한가지 존재가 떠올랐다.
‘아, 맞다.’
그 존재는 다름 아닌 레이핀의 알이었다.
[레이핀의 알]
종류: 정령
등급: EX
레벨: 1
형태: 알
설명: 레이핀의 힘을 계승한 존재가 잠들어있습니다. 알을 부화시켜 레이핀의 피를 계승하세요.
우빈의 침대 위로 하얀 알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되려나?’
이 알을 부화 시킬 방법으로 떠오른 수단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크로노스의 작업실에 알을 넣은 뒤 부화하기만을 기다리는 방법이었고, 또 하나는 새롭게 얻은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띠링-
[엘리드를 정복한 자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빈은 바로 칭호:엘리드를 정복한 자를 활성화했다.
[대상의 시간을 제어합니다.]
이질적인 마력이 알을 뒤덮은 그 순간.
[대상의 시간을 가속합니다.]
화아아악-
강렬한 빛이 알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레이핀의 알이 부화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