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의문의 세력(3)
띠링-
[최영욱 플레이어님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크로노스의 축복이 최영욱 플레이어님에게 깃듭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화아악-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방의 중심으로 빛이 번뜩이는가싶더니.
“허억-”
한 사내가 깊은 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 사내는 다름아닌 최영욱.
최영욱은 정신을 차리곤, 바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마치 마약을 찾아 헤매는 중독자같은 모습이라고해야할까.
그러다 마약을 발견한 듯, 다급히 한 방향으로 기어갔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 정말 죄송해요. 흐···으···윽.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
최형욱이 우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곤 애원한다.
처절 하다못해 손까지 덜덜 떨며 두려워하는데, 처음 만났던 그때의 강인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귀환자가 아니구나.’
우빈은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자고로 엘리드에서 몇 년 구른 놈들이라 하면, 어느 정도의 독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당장, 정현태만 하더라도, 수백번의 죽음을 겪고도 차라리 죽이라며, 반항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녀석은 아니었다.
딱 1번이었다.
고작 1번의 시련에 이 정도로 정신이 흔들리는 지경에 도달하다니.
‘재미있네.’
확실한 효과가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누가 시켰어?”
우빈은 혹시 몰라 놓친게 있나 싶어 녀석에 물었다.
“몰, 몰라요. 저는 내려온 명령을 따른 것뿐이라. 진짜 몰라요. 한번도 만나본 적도 없다고요! 믿어주세요”
최형욱이 우빈을 애처롭게 올려다보며 애원한다.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애초에 저놈이 알고 있을 거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띠링-
[유황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때마침, 다음 시련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고,
“전부 말할게요. 잠시만요!!!!”
콰지직-
“으아아아아아악!!!!!!!!!!!!!!!!!!”
최형욱의 전신이 유황으로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머리카락이 벗겨지며, 근육이 오그라든다.
끼이익- 철컹-
우빈은 절규하는 최영욱을 뒤로한 채, 문을 열어 마이룸에 들어왔다.
장소를 옮겼지만, 작업실 특유의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며칠 정도 걸리려나.’
최형욱을 작업실로 데려온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배후가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칠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기억을 전부 들여다봤지만, 그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거기다,
띠링-
[종언 아드로스의 정기]
종류: 포션
등급: A
설명:종언 아드로스의 정기가 담긴 병입니다. 강력한 마기가 농축되어있습니다.
“이건 어디서 구한 거지.”
이세연이 연구하던 아드로스의 정기가 최형욱의 손에 있었다.
놓친 기억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최형욱에게 오더를 주던 놈이 선물이라며, 최형욱의 집 앞에 놔둔 물건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길래, 이 포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놓친 게 있나.’
우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엘리드 때를 떠올렸다.
이세현이 연구하던 시설을 시작으로 세이버의 비밀 아지트까지 싹 다 털고 왔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구한 걸까.
‘설마 유주는 아니겠지···’
굳이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배후를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될 일이었으니까.
그 첫 단추가 바로 최형욱을 충실한 노예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현태는 대략 하루, 이철영은 1시간 만에 충실한 개처럼 말을 잘 들었다.
과연 저 녀석은 몇 시간 정도면 마음이 꺾일까.
‘10분이면 되려나.’
우빈은 이세현의 연구자료가 모여 있는 곳에 아드로스의 정기를 올려놓은 뒤, 바닥에 널브러진 아이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최형욱에게 빼앗은 아이템이었다.
먹는 즉시 중독되는 독 포션을 시작으로, 나름 쓸만해 보이는 스킬 카드까지.
대략 30여 개의 아이템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아이템은 총 3개였다.
띠링-
[치명적인 한방]
종류: 스킬 카드
등급: S
레벨: 10
형태: 액티브
효과
-대상의 약점 공격 시 치명적인 한방이 발동됩니다.
*치명적인 한방: 치명타 공격력 1,000% 증가.
추가 효과
-치명적인 한방 데미지 10% 증가
-치명적인 한방 데미지 20% 증가
-치명적인 한방 데미지 30% 증가
-치명적인 한방 데미지 40% 증가
-출혈 효과 부여
-시전 속도 50% 감소
-치명적인 한방 데미지 50% 증가
-치명적인 한방 데미지 100% 증가
-0.1%의 확률로 즉사
‘쓸만한데.’
우빈이 크로노스의 던전에 갇히기 전, 10년 동안 사용했던, 급소 강타랑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즉사는 또 처음 보네.’
확률이 0.1%로 낮기는 하지만, 발동하는 순간, 즉사하는 옵션이라니. 너무 사기적인 효과이지 않은가.
이 아이템을 보자, 방심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우빈은 바로 다음 아이템을 확인했다.
나머지 두 개의 아이템은 스킬 카드에 비해선 희귀도가 낮았다.
띠링-
[맹혈단도+4]
종류: 단검
등급: S
내구력: 123/145
공격력: 9(+4)
기량:+5
행운:+3
룬석: [출혈] [맹독] [절삭]
효과
-출혈 효과 부여.
-맹독 효과 부여.
-출혈/맹독에 감염된 대상 공격 시 공격력 200% 증가.
*세트 효과(0/2)
-출혈/맹독에 감염 시 모든 저항력 100% 감소.
[맹혈 수리검]
종류: 표창
등급: A
내구력: 110/120
공격력: 6
기량:+3
지력:+2
행운:+1
룬석: [맹독] [출혈] [맹독]
효과
-출혈 효과 부여.
-맹독 효과 부여.
*세트 효과(0/2)
-출혈/맹독에 감염 시 모든 저항력 100% 감소.
“세트 아이템이네.”
PVP에 있어선 상당히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우빈에겐 그다지 메리트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언젠가는 쓰려나.’
우빈은 대략적인 확인을 마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옮기려고 하는데.
끼이잉-
지금까지 우빈의 옆을 따라다니던, 레이가 주변에 널브러진 아이템을 보더니, 달려들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그냥 놔둘 법도 했지만, 레이가 달려드는 아이템이 문제였다.
[성검: 아클레이사+4]
종류: 대검
등급: S
내구력: 13/160
공격력: 8(+4)
근력:+3
기량:+5
체력:+1
룬석: [섬광] [정화] [심판]
효과
-빛 속성 생성.
-빛 속성 데미지 150% 증가.
-대상을 정화시킵니다.
차주성의 비밀 아지트에 있던 아이템 중 손에 꼽히는 희귀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우빈은 바로 레이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나뒹구는 아이템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건 안돼. 차라리 이거 먹어.”
널린 게 아이템인데 하필이면 왜 저걸 먹으려고 하는 것일까.
띠링-
[데몬 오우거의 각반]
등급: A
내구력: 93/120
방어력: 5
생명력:+3
근력:+2
기량:+1
룬석: [보호] [보호] [보호]
효과
-방어력+5
-물리 방어력 100% 증가.
지금 건넨 아이템 역시 꽤 준수한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레이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끼이잉-
물컹한 이마로 우빈이 내민 각반을 툭 치며, 먹이를 거부한다. 이내 다시 성검을 향해, 유유히 헤엄친다.
“안된다고.”
우빈이 나지막하게 경고했지만, 레이는 우빈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띠링-
[레이가 배고파합니다.]
그저 레이의 상태 창만이 눈앞에 떠오를 뿐.
‘귀찮네.’
성검을 향해 달려드는 레이의 꼬리를 붙잡곤,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원래 레이의 존재는 우빈에게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띠링-
[생명 창조]
종류: 특성
등급: EX
효과
-특별한 생명체를 창조합니다.
특성인 생명 창조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는 능력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본의 환생 시스템 통해, 레이의 진가는 확실해졌다.
그저 시스템의 힘을 섭취하는 것만으로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라니.
이 기능 하나만으로 레이를 키울 이유는 충분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제어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 역시 그러했다.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도록 교육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개랑 비슷하려나.’
문득 우빈의 머릿속에 오유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집에서 우빈만 보면 항상 짖어대던 강아지가 있지 않던가.
-앉아, 물어와. 기다려. 잘했어. 코코!
오유성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코코라는 포메라니안에게 이것저것 명령을 내렸다.
그때마다 포메라니안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유성의 명령을 전부 수행해냈다.
딱 그 정도 수준이면 충분했다.
보아하니, 오유성은 동물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침에 레이를 보곤 관심을 보이기도 했고.
‘나중에 한 번 부탁해야겠네.’
우빈이 레이의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끼이잉-
띠링-
[레이가 당신에게 실망합니다.]
[충성도가 하락합니다.]
우빈의 앞으로 불길한 시스템 창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끼잉-
앞으로 나아가려던 레이의 행동이 멈춘다.
아무래도 저 아이템은 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배는 고픈지, 우빈이 건넨 각반으로 시선을 돌린다.
우드득- 우드득-
한화로 수억 원짜리 아이템이 레이의 입속으로 사라진다.
“하아···”
우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세현의 연구 결과물인 수백 가지의 포션 병을 시작으로 이세현의 부하, 차주성의 개인 물품, 세이버 비밀 창고에 널브러진 희귀 아이템까지.
수백 가지의 진귀한 보물이 쓰레기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정리 좀 해야겠네.’
만약, 정리되어있었다면, 레이에게 무려 A급에 달하는 아이템을 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마이룸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악취가 너무 심했다.
엘리드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현대로 돌아와, 청결함을 맞보자, 냄새를 참을 수 없었다.
직접 치우기는 귀찮고, 그렇다고 청소부를 고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민하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러 가볼까.’
우빈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굳게 닫힌 문중 하나를 활짝 열었고,
“으악!!!!!!!!!!!!!!!!!”
처절한 비명이 우빈을 맞이해주었다.
***
띠링-
[화마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으악!!!!!!”
미칠듯한 열기가 방안을 가득 메운다.
피부가 녹아내리며, 시뻘건 근육이 드러난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고통이었다.
고통을 피해, 움직인 발버둥에 발바닥이 지면에 들러붙는다.
뜨거운 열기에 발바닥이 익으며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통증이 전신을 후벼판다.
무의식적으로 발버둥을 칠 때면, 콰지직- 지면에 들러붙은 발바닥이 근육째 뜯겨나가며 중심을 잃는다.
“으악!!!!!!!!!!!”
불에 달궈지는 지렁이처럼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죽여줘, 차라리 죽여줘.’
애원하고 처절하게 간청할 때면,
파스스-
순식간에 열기는 사그라들어있었다.
‘죽여줘···’
이 순간이 가장 끔찍했다.
차라리 죽어서 처음으로 돌아가면, 고통은 덜할 텐데.
애매하게 죽어가는 육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선사해줬다.
허억-허억-
아무리 열심히 숨을 들이켜 마시어도, 이미 기능을 상실한 폐는 호흡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제발··· 죽여줘.”
고통에 허덕이며 죽을 시간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띠링-
[지옥 겁화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이번 시련을 끝낼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으악!!!!!!!!!!!!!”
이세현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생각했다.
‘내가 왜,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지.’
벌을 받는 것일까.
집히는 일을 많이 저지르긴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실험으로 죽인 인원이 수천을 넘어갔다.
동료였던 유주를 실험용 쥐처럼 가지고 놀았으며, 가족같이 지내던 우빈을 사냥을 끝낸 개 마냥 던전의 제물로 바쳤다.
‘제발···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충분히 이해되었다.
저 일을 전부 차주성이 시켰다고는 하지만, 모두 스스로 판단해서 내린 행위.
‘제발··· ’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으악!!!!!!!!”
하지만 벌에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심했다. 차라리 죽으면 이 고통을 이어나가지 않아도 될 텐데.
‘제발···.’
이 지옥은 이세현을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몇 번을 죽었을까.
백번? 천 번? 알 수 없었다.
죽음의 횟수가 2천이 넘어가는 시점부턴 숫자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곤 세는 걸 포기했다.
“제발···”
어느샌가 의식이 흐릿해지며, 고통에 힘이 들어가던 근육이 풀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띠링-
[이세현 용사님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크로노스의 축복이 이세현 용사님에게 깃듭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어김없이 그 메시지가 떠올랐다.
“허억-”
끔찍했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편안했다. 아무리 숨을 쉬어도 해소되지 않던 상쾌함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분명 몸은 평온한데,
“흑···흑···”
이세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제발···그만”
이세현은 애원했다.
“제발··· 누가 좀. 도와줘.”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고 이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제발···”
하지만 이세현은 알았다. 이 지옥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세현이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목놓아 울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네.”
절대 들릴 리 없는 사내의 목소리가 이세현의 귓가에 맴돌았다.
이세현은 울음을 뚝 그치곤, 앞을 바라봤다. 우빈이 이세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 우빈아!!!!!”
이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우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 뭐든 할게.”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할 수 있는 건 비는 것뿐이었다.
“시끄러워.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말 걸면, 다시 넣을 거니까. 닥치고 따라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희망적이었다.
저 말을 다르게 풀이해보면, 말을 잘 들으면 이 지옥에서 꺼내준다는 의미였으니까.
“으··· 응!”
이세현은 입을 꾹 다물곤,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문으로 향하는 우빈의 등 뒤를 따라 걸어 나갔다.
화아악-
어둠에 익숙해진 이세현의 눈으로 빛이 가득 차올랐다.
수백 가지의 아이템이 나뒹구는 방이 나타났다. 예전에 실험에서 쓰던 자료도 보였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끼이잉-
세계수의 정령과 유사하게 생긴 생명체였다.
“다른 건 아니고, 해줘야 할 게 있어서.”
우빈의 말에 이세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된다.
뭘 부탁하려는 걸까.
[연금]
종류: 특성
등급: S
효과
-대상과 대상을 혼합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합니다.
자신의 특성인 연금? 그게 아니라면, 세이버의 정보라도 물어보려는 걸까.
“말만 해, 뭐든 할게.”
뭐든 상관없었다. 당장, 노예로 팔려나가도, 가랑이를 벌리라고 해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이세현의 표정에 결의가 차오른다. 말만 한다며 혀라도 깨물고 죽을 표정이었다.
“여길 좀 깨끗하게 치우고 싶어서 말이야.”
“어?”
“아이템은 등급, 종류별로 정리하고, 방도 깨끗하게 치우려고 하는데, 할 수 있어?”
결의에 찬 각오와는 다르게 허무한 부탁이 들려왔다.
“왜? 어려우려나? 못하겠으면 어쩔 수 없고, 현태한테 시켜야겠네.”
“할, 할 수 있어! 내가 할게, 제발 시켜줘!”
우빈의 말에 이세현이 다급히 소리친다.
“그래, 다행이네. 현태는 정리정돈을 못 해서 걱정됐거든.”
“나 이런 거 잘해, 당장 치울까?”
이세현이 다급히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집어 든다.
우빈은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정신상태는 마음에 드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뭐?”
“제대로 방을 치우려면 청소 용품이 필요할 거 아니야. 사러 가는 김에, 선물 하나 주려고 했지.”
“괘, 괜찮아.”
“그래. 치우고 있어 봐.”
우빈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철컹-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렇게 5분이 흘렀을까.
철컹-
우빈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흠칫-
이세현은 우빈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세현은 다급히 우빈의 모습을 살폈다.
우빈의 손엔 오랜만에 보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각종 세제를 시작해서, 바닥을 닦을 때는 청소도구까지.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케이크 상자였다.
“초코케이크를 좋아했던 거 같은데, 먹으면서 설렁설렁 치워. 깨끗이 치우면 또 사다 줄 테니까.”
“어? 어···”
이세현은 그제서야 우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 정돈된 머리. 고급스러운 흰 티와 푸른 청바지 세련된 신발, 손목에 있는 시계가 눈부실 정도로 이뻤다.
특히, 몸 전체로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우빈의 모습도 그렇고, 지금 가져온 물건도 그렇고, 지구에서나 볼법한 물건들이지 않은가.
‘설마 엘리드에서 탈출한 건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던 이세현의 눈빛이 미약하게 반짝인다.
궁금했다.
엘리드를 클리어하고, 전부 지구로 돌아간 걸까. 너무나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빈이 그러지 않았던가, 허락 없이 말을 했다간 다시 저 지옥 속에 처넣겠다고.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호기심 때문에 망칠 수 없었다.
“나는 일이 있어서. 가볼게.”
“어? 어! 다녀와 우빈아.”
철컹-
이세현은 우빈이 떠난 문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밑에 있는 케이크 상자로 눈이 갔다.
“진짜··· 지구로 돌아간 건가.”
이세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상자를 열었다.
손바닥만 한 초코케이크 한 조각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 있었다.
분명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믿기지 않았다.
‘정말, 돌아간 거야?’
이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곤 작은 입속에 집어넣었다.
알싸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입안 가득 차올랐다. 차가운 충만감이 목으로 들어오며 갈증이 해소된다.
얼마만의 음식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이세현은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케이크를 입에 쑤셔 넣었다.
꿈만 같던 1분이 지나갔다.
“맛있어···”
이세현은 초코가 묻어 끈적끈적한 손가락을 핥다, 문득 앞에 있는 거대한 방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제대로 씻지 못해, 떡진 머리카락 하며, 떼가 껴, 얼굴을 검게 찌들어있었다. 그야말로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흑···흑···”
이세현은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분해서일까? 아니면 억울해서? 모르겠다. 알 수 없었다.
그저, 하나의 장면만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깨끗이 치우면 또 사다 줄 테니까.
친절하면서도 따듯한 말이 답답하던 가슴을 눈 녹듯 풀리는 것만 같았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깔끔한 풍모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왕족을 마주한 느낌을 선사해줬다.
두근-두근-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심장이 뛰었다.
왜일까. 분명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 화가 치밀어 올라도 모자를 사람인데.
어느샌가 이세현은 울고 있지 않았다.
그저 우빈을 떠올리며 볼을 발그레 붉힐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우빈의 말이 떠올랐다.
-못하겠으면 어쩔 수 없고, 현태한테 시켜야겠네.
‘치워야 돼.’
우빈이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방을 치우는 것보다, 케이크를 먼저 먹은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엔, 다시 그 지옥으로 버려질지도 몰랐다.
판단을 내린 이세현은 다급히 물건을 치우기 시작했고, 하수구 같던 마이룸은 조금씩 깨끗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