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83화
게임과 현실은 고려해야 할 여건이 달라.
그야 그런 걸 따져 봐야 로망은 없잖아.
‘하지만 지금은 현실.’
이곳에는 그 뒤가 있다.
닥치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이것저것 방치하고 나서 무너진 세상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뭣보다 그 뒤에 종말을 겪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으니…….’
노멀 엔딩에서도 세계는 구하지만 그건 그것뿐인 일.
다른 무엇보다 현실적인 이유로 파멸을 겪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2장의 건으로 나는 확신을 했다.
‘가능한 개입을 해 줘야 해.’
이곳은 게임 속 세상이 아니다.
게임 당시처럼 전부 믿고 해결해 줄 주인공 따윈 없다.
리니아는 아무것도 모른다. 본래 주인공의 설정을 타고난 소녀는 2장에서도 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먼저 리타이어했다.
맡겨 봐야 노멀 엔딩.
세상이 상처 입고 민심이 흉흉해진, 한마디로 먹고살기 힘든 상상밖에 안 되는 세상.
결국, 그게 싫은 사람이 해야지.
(흐음? 그것뿐이니?)
‘뭐가?’
(단순히 결과만을 내는 거라면 시안, 네가 더 고생하지 않고 쉽게 해결하는 방안도 있잖니.)
‘…….’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최소한의 효율만 내자고?’
(당연히 알고 있구나.)
큰 피해만 내지 않으면 된다.
눈앞의 희생 하나에만 눈감으면 편하게 사건을 해결할 기회가 온다.
흔히 말해서 대를 위해 소를 버리는 선택.
‘거참, 악마다운 소리네…….’
(하지만 내키지 않나 보네.)
‘그 짓을 할 일은 없어. ……내 힘이 부족해서라면 별수 없겠지만.’
만능은 아니다.
불가능한 게 있다는 건 잊지 않는다.
하지만 먼저 버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어째서니?)
‘양심에 찔려.’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발 뻗고 잘 자신이 없다.
‘아는 사람이면 뭐…….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돕는다. 모르는 놈은 내 알 바 아니야.’
(이상적이면서 염세적이구나.)
‘차라리 애늙은이 같다고 하셔.’
뭣보다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아카데미에 오지도 않았다.
시안이 된 그날, 열차에서 내려서 다른 곳으로 잠적해 버렸겠지.
그것으로도 살아남을 방안만큼은 있었으니까.
‘하여튼 당분간은 큰일이 없어도 한가한 건 아니니까.’
(힘내렴.)
‘아니, 너도 힘내야 하거든? 사역마?’
슬슬 에밀리의 능력도 보다 향상시킬 방안을 고안해야 한다.
악마의 능력은 계약자의 한계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내 능력이 올랐으니 에밀리의 상한을 보다 높이는 방안도 고려해야 하지.
(어머? 괜찮니?)
‘……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할 거니까.’
지나치게 풀어 줬다가는 반대로 내가 이 악마 누나의 손아귀에서 꼼짝도 못 할 테니까.
어쨌든 할 일은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음?”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주변에 지나치는 학생들의 발길이 뜸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기척이 노골적으로 줄어 있다.
일부러 피한다는 느낌.
하지만 내가 원인은 아니리라.
“그…… 흑발, 당신이 시안이라고 생각되는데 맞나요?”
돌아보니 어느 여성이 내 쪽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주변에 있는 이들도 그녀와 무관한 자들은 아니리라.
“……호위.”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게 허용이 되는 아카데미에서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많은 호위를 거느리고 다니는 이들은 몇 없다.
하물며 엘시아조차도 이렇게 요란스레 사람을 몰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게 가능한 인물은 정말로 한정적.
하물며 못 알아볼 일도 없고.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황녀 전하 아니십니까?”
“지나치게 예를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용무가 있는 것은 이쪽. 거기에다 저는 황족이라고 해도 지금은 아카데미의 교수에 불과합니다.”
에타니올 제국의 황녀.
제국의 지배자.
그 황실의 이름을 가지는 것이 허락된 일족 중 한 명.
황녀이자 아카데미에서는 연금술 클래스의 젊은 교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녀가 나를 부른다.
미네이울 멜 델레우로스.
“하지만 지금은 교수로서 당신을 만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용건은?”
“나쁜 소식은 아니니 긴장할 것 없어요.”
온화하긴 하지만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는 말투로 황녀는 말했다.
나를 직접 찾아온 용건.
“폐하께서 지극히 개인적인 소망을 듣고 오라는 명을 하셨기에.”
“……예?”
그럼 적어도 나쁜 일은 아니리라.
* * *
아카데미의 휴식 터를 거의 전세 낸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 뒤, 황녀는 내게 맞은편에 앉도록 권했다.
“앉으시죠.”
“……하지만.”
“사양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하물며 당신을 세워 둔 채 이야기를 들었다간 나중에 폐하께 무슨 말씀을 듣게 될지 제가 더 난감해질 것 같군요.”
뭐, 튕기는 것도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상대가 황녀? 그래서 딱히 황송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군.’
쫄 필요는 없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없으니.
거기에다 분명히 말했지. 내게 상을 주기 위해 의견을 듣고 오라고.
그럼 어깨를 펴도 되겠군.
“그런데 어째서 황녀 전하…… 아니, 미네이울 교수님께서 직접?”
황녀이긴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어디까지나 연금술 클래스의 교수로서만 그 이름을 올려 두고 활동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황녀 신분을 과시하면서 아카데미 안을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교수로서의 입장보다 황실의 일원으로서의 신분을 먼저 내세웠다.
“본래라면 폐하께서 먼저 당신을 불러내어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모양입니다.”
“……저를 어째서입니까?”
“폐하께서는 시안, 당신의 재능과 활약에 몹시도 흡족해하시고 계신답니다.”
“오우……. 그것 참 영광이군요.”
모르는 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던전에서의 일도, 혈목의 숲에서의 사건도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당연히 파악하고 있겠지.
노골적으로 천재 시늉을 하고 다녔던 터라 황제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지만 고작 두 번 만에 황제가…… 내 이름을 언급했다니.’
게임과는 다르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서? 혹은 그 외에 다른 뭔가가 있는 건가.
적어도 위험한 것은 아니리라.
“바로 묻죠. 시안.”
“예.”
“혹시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요컨대 뭐가 갖고 싶니?
묘하게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두려워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는 말.
“바라는 것이라니…….”
“무엇이든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폐하께서 내리신 명은 뭐든 좋으니 당신의 바람을 듣고 오라는 것.”
“고작 포상이라는 명목으로 말입니까?”
“예. 고작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어지간히 흡족해하시는 것 같더군요.”
황제는 기분파다.
내키지 않으면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기분이 좋으면 사소한 일에도 큰 상을 덜컥 내려 버리는 제멋대로의 표준 격인 존재.
“정식으로 포상을 내리는 것도 고려하셨지만, 당신의 입장을 고려하여 지금은 자중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건…… 다행이군요.”
황성으로 불려 가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적어도 지금은 바라지 않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맨입으로 넘어가기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듯 황제는 ‘그럼 개인적으로 뭔가를 주면 되겠군.’이라고 말하고 황녀에게 대뜸 듣고 오라고 시킨 모양이다.
거참,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신 황제님이시군.
“포상금이든 혹은 다른 것이든 가능한 의향을 듣고 오라는 명이셨으니 좋을 대로 말씀해 주세요.”
가능한 내가 말한 소망의 범위에 맞춰 주겠다는 뜻.
나 역시 가능한 선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설레네요.”
“좀처럼 없는 일입니다. 사양할 것 없어요.”
사양 안 합니다.
비유하자면, 복권 같은 것이다.
당최 황제가 무슨 변덕을 부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받을 수 있는 것을 사양하며 발로 걷어차는 건 한마디로 미친 짓.
당연히 말하라면 말하죠.
“혹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아뇨.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얻었다고 설레면서 파닥거리는 건 나답지 않은 일이다.
당연히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라고 싶은 것을 딱! 하고 정했지!
“맹약의 묘소의 방문을 허가받고 싶습니다만.”
“……네?”
조금 전까지 온화하게 말을 건네던 황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뭐라고?”
뭐든지 말하라고 해놓고 정작 말하니까 난처해하다니, 거참 쪼잔하시네요.
……라고 비웃을 수는 없었다.
충분히 예상외의 소망을 말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으니까.
(맹약의 묘소?)
‘그런 게 있어.’
굳이 돈이나 다른 것들을 제쳐 두고 내가 말한 그것.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
아니, 어쩌면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밑져야 본전이니.’
게임 당시에는 황제의 포상 이벤트가 생기더라도 받을 수 있는 선택지에 한계가 있었다.
금화나 경험치 혹은 아이템.
어느 쪽이든 유용하지만, 이젠 좀 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은 게임처럼 선택지가 뜨는 것도 아니니까.’
뭐든, 이라고 말했다.
아무 말 대잔치를 다 들어준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냅다 찔러 보는 건 내 자유잖아.
‘황제에게 청할 수 있는 소망이라…….’
짧은 순간, 고민했다.
가능한 게 뭐가 있을까.
최대한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줄타기를 하며 얻어 낼 수 있는 것.
그리고 이뤄진다면 내게 크나큰 이점이 될 만한 것.
‘역시 그것밖에 없지.’
그것이 바로 맹약의 묘소.
이 게임의 전체 시나리오를 통틀어 크게 관여하는 요소.
트루 엔드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들어가야 하는 곳 중 하나.
이걸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황녀의 얼굴을 보니 확률은 반반이군.’
지나치게 동요하고 있다.
그곳을 아는 자들이라면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고, 황녀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러니 놀라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곳을 출입할 허가를 받고 싶습니다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모른다면 감히 말을 꺼내지 않았겠죠.”
제국에서 관리하는 유적들 중에서도 오로지 황제의 허가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단순히 놀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출입하여 어떤 ‘의식’을 거치고 자격을 증명한다면 세계에 관여하는 중요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나니.
요컨대 이 세상에서 해피하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것.
“……별로 좋은 소망은 아닌 것 같네요.”
“일단 말이나 해 보자는 심산으로 꺼낸 것입니다만, 혹 과분하다 여기시면 다른 것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면.
맹약의 묘소의 출입 이벤트는 나로서는 달성하기 다소 골때리는 조건들이었다.
편법으로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궁리할 수밖에 없겠지.
“역시 곤란할 것 같습니까?”
“…….”
“그렇다면 다른 것을 바라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하게 그냥 금화나 달라고 할까.
돈은 많을수록 좋다.
도, 돈이 인생을 활기차게 해 주는 명약이야!
“그러면…….”
“아니, 안 될 건 없겠지.”
황녀의 입에서 나온 건 바로 조금 전까지 난처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게다가 어투 자체도 변하였다.
“짐의 허를 찌르는 소망을 입에 담는구나. 크하하하하하핫!”
황녀가 돌아 버린 게 아니었다.
마치 사람이 변해 버린 것처럼.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외모에 어울리지도 않는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음에도 측근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시안……. 이 여자…… 아니, 그는…….)
에밀리가 이해한 위화감의 이유를 듣고서야 확신했다.
저건 황녀가 아니다.
아니, 황녀의 껍데기를 강제로 뺏은 누군가라고 해야겠지.
‘황제.’
제국의 황제.
엘피로크 멜 델레우로스.
그가 황녀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