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124화
예상대로 되었음을 확신한 것은 내가 캐스팅한 본 스피어가 새까맣게 물들어 가는 것을 알아챘을 때였다.
“……드디어 썼냐.”
골창의 새하얀 날이 검게 타들어 가고 있다.
내 의도가 아니었다.
“이런…….”
골창은 완전히 새까만 재가 되어 무너지고 그것을 휩쓸어 튕겨 낸 검은 무언가가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직접 보니 위력이 장난이 아닌데.”
저 멀리 길게 늘어져 있는 흔적. 지면에 새까만 재가 눌어붙어 있다.
“마치 불에 태운 거 같군.”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이런 현상이 생기지 않겠지.
정확히는 열로 태운 것은 아니겠지만.
“물질의 붕괴에 의한 발열 현상……. 그래! 드디어 썼냐. 리올레이트가의 전승 스킬!”
당연히 내가 그 스킬의 정체를 모를 리 없었다.
리올레이트가의 피를 이은 이들만이 이어받는 스킬.
종언의 피.
모든 물질을 강제로 파괴하는 고유 스킬.
“그게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재능이지?”
조금 전과는 달라진 엘시아의 기척과 모습을 확인하며 묻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하악…… 헉…….”
숨을 몰아쉬지만 지쳤기 때문이 아니다.
육신의 한계가 아니라 정신이 자신의 재능을 거부하고 있기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거부하고 있나.”
눈동자는 검붉은 마력에 잠식돼 있고, 그녀의 팔에는 검은 뱀의 형상을 한 마력의 잔상이 휘감고 있었다.
스킬의 강제 발동 상태.
‘역시 제어는 하지 못하는군.’
당연하다.
내가 아는 게임 당시의 설정대로라면 엘시아는 지금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거부하고 있으니까.
‘그래, 그 거부감을 떨쳐 내고 그것을 그저 이용해야 할 재능으로서 받아들이는 과정이 원래 네가 겪어야 할 일이니까.’
이 시점에서 엘시아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한다.
악한 공작가의 아이로 태어났지만, 그것을 혐오하고 거부하는 것이 그녀의 입장.
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설명하고.
“일단은 여기까지는 끌어냈는데…….”
계획한 대로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 상황. 타인의 눈이 닿지 않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엘시아의 조기 각성을 노린다.
리올레이트 공작가의 전용 스킬인 종언의 피는 본래 이 시기에 드러나는 힘이 아니었다.
그것이 암시되는 것은 이 무렵부터이지만, 그녀 본인이 직접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극복해 나가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뒤.
‘그때까지 기다려 줄 마음이 없어.’
그녀가 정체감을 느끼는 이 시기는 게임의 시나리오 중 엘시아 리올레이트 흑화 루트의 조건과 같다.
문제가 있다면.
‘그렇다면 엘시아는 머지않아 큰 사고를 칠 거란 말이지.’
정확히는 중간 평가 기간.
그 평가 기간의 마지막 날, 특별 실기 시험에서 엘시아는 큰 사고를 치게 될 것이다.
엘시아 리올레이트 흑화 루트의 첫 번째를.
‘사실 쟤가 뭔 짓을 저지르건 말건 아무래도 좋은데.’
내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엘시아 루트의 시나리오대로라면 가장 먼저 처맞는 게 나란 말이지.’
우리의 전투력 측정기 1호 시안.
게임에서는 한창 그녀에게 까불다가 처맞고 사경을 헤맸다지.
물론 지금의 내가 그런 일을 겪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 안 한다.
‘그래도 만일이란 게 있으니 막아야지.’
문제는 그것을 미연에 방지해 주거나 그녀를 제어해 줄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본래는 주인공. 요컨대 플레이어의 몫.
하지만 그 주인공은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내가 손을 써야지.’
내가 꾀하는 것은 엘시아의 조기 각성.
엘시아를 몰아붙여서 적절한 상황을 유도해 본능적으로 스킬을 쓰게 만든다.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본래 이것 또한 나 ‘시안’의 역할이었으니까.
‘게임에서는 고용한 용병과 몬스터를 풀어서 함정에 빠트리는 거였지만.’
어떻게 몰아붙여야 하는지는 잘 아니까.
도발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하면 본인의 의사는 제쳐 두고 몸이 알아서 힘을 쓰게 된다.
“그것이 리올레이트가의 업일 테니까.”
“……방해하게 두지 않는다.”
“그래, 그래야지.”
엘시아가 중얼거리는 말을 대강 흘려듣는다. 저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다.
현재 그녀가 발동 중인 스킬은 두 가지.
하나는 폭주 중인 종언의 피.
그리고 또 하나는.
폭주의 원인.
“리올레이트가의 가주가 심은 장치인가.”
엘시아의 주위를 휘감은 듯한 마력.
검은 뱀 형상의 그 마력은 마치 별개의 의사가 있는 것처럼 나를 노려본다.
그것에 이끌리듯 엘시아의 육체도 뒤따라 움직인다.
누가 보아도 제 의사가 아닌 상태.
리올레이트가의 쐐기의 효과다.
“여기서 저걸 깨우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말이야.”
엘시아 리올레이트 관련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언젠가 상대하게 될 것.
궁지에 몰린 엘시아에게 강제로 스킬을 사용하게 만들어 위협하는 대상을 처리하게 하는 바로 저 힘이다.
정식 명칭은 없지만, 유저들이 말하길 흑화 엘시아.
본래라면 5장 중반쯤에서 이곳과는 다른 장소에서 싸우게 될 상황.
“의식을 빼앗아 힘을 남용시켜 위협 요소를 없애는 제어 장치……. 하지만 대놓고 저걸 처리하기에는 기회가 별로 없어.”
그렇다면 여기서 발동하게 하자.
목격자도 그다지 없을 곳이기에 적절하니까.
만일 저것을 심은 장본인이 의심하여도 대놓고 추궁하지는 않겠지.
“자, 그럼 바라던 상황도 만들었으니 할 일은 그것뿐이지?”
별것 없지.
나는 거만하게 웃음을 지으며 손을 까딱였다.
“덤벼 봐. 목격자는 처리해야지?”
고작 지배용 스킬이기에 의지가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마치 내 도발에 넘어간 듯 쐐기는 엘시아의 몸을 조종하여 내게 그 힘을 방사하기 시작한다.
폭주 엘시아와의 다소 이른 전투 이벤트.
‘여기서 끝내고 앞으로 사고 칠 싹을 아예 잘라 주지.’
더 귀찮아지기 전에 만만할 때 처리한다.
이게 바로 내 방식이다.
* * *
시안과 엘시아의 능력이 맞부딪치며 한창 불길한 기운을 여기저기 흩뿌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저건 상정했던 것 외인가.”
동굴의 입구 안쪽. 그곳에서 기척과 모습을 숨긴 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곤란하게 되었어…….”
시야를 가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얼굴을 가린 그 안쪽에서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개입은 재량껏 판단하라는 명이었으니.”
어디까지나 주어진 임무는 감시.
가능한 개입은 불허한 채 그저 지켜본 뒤 이를 보고하라는 것뿐.
하지만 고심 끝에 감시자는 이 상황에 끼어들기로 했다.
하필 이 시점에서 엘시아가 리올레이트가의 비전을 써 버린 것은 충분히 개입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우선은…….”
처리해야 할 상대를 눈여겨보며 감시인은 자신의 무기를 거머쥐었다.
채찍.
다만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게 그 날이 칼날처럼 예리한 형상을 하고 있는 무기였다.
노려야 할 상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정확하게 개입하기 위한 틈을 엿본다.
‘……지금 개입을!’
그러나.
감시인이 숨기고 있던 기척을 해제하고 은폐 중인 장소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던 때.
“후후……. 너였구나. 시안이 말한 구경꾼이라는 게.”
웃음소리.
고혹적이면서도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기이한 섬뜩함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목소리.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큭!”
몸을 뒤로 내빼는 것과 동시에 화염 덩어리가 떨어졌다.
“시안의 사역마!”
조금 전부터 보이지 않았던 시안의 사역마.
단순히 망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찾고 있었던 것인가? 그 사실에 그는 경악했다.
“설마 처음부터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인가?”
“정답이란다. 얌전히 구경만 한다면 내버려 두라는 명령이었거든. 하지만 움직였네?”
시안의 사역마.
에밀리라고 불리는 그 악마는 순순히 자신이 수행 중인 명령에 대해 말했다.
누구도 개입하지 못하게 할 것.
만약 끼어드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처리할지는 맡기겠다고 했지 뭐니.”
“꺼져라! 악마 따위가 어딜!”
감시인은 더는 듣지 않고 바로 채찍을 휘둘렀다.
공간의 제약이 따르는 동굴 안인데도 그 채찍의 날은 날카로운 바람을 휘감으며 눈앞의 악마를 배제하기 위해 뻗어 간다.
“그래, 그 채찍. 바로 너로구나. 그때 우리 시안을 불쾌하게 만든 침입자가.”
기억났다는 듯 반갑게 웃으며 에밀리는 채찍째 불태우기 위해 화염을 불러일으킨다.
“어림없다.”
무기째 녹여 버려 자신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알아챈 감시인은 그대로 팔을 크게 휘둘렀다.
기이한 궤도로 채찍의 방향이 틀어지며 에밀리가 펼친 화염의 장벽을 비껴간다.
“어머? 재주 좋네.”
“그대로 찢어발겨 주마. 악마.”
“어디 한번 해 보렴.”
주저는 없다.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속도로 올린 채찍의 칼날 끝이 에밀리의 등 뒤를 정확하게 꿰뚫는다.
인간으로 치자면 심장이 있을 곳.
“악마에게 인간의 급소가 유효할 리 없지만……. 그래도 비슷한 약점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죽이기는 어려워도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다.
악마에게는 육체의 손상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마기로 육체를 구성해도 감각이 있고 무엇보다 의식이 있다.
무엇보다 그 의식의 집중되는 부위가 존재한다.
대부분은 인체 구조에서 심장이나 뇌가 위치하는 부분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강력한 오러를 담아 꿰뚫으면 일시적 혼란 정도는 일으키겠지.”
인간으로 치자면, 기습으로 눈두덩을 얻어맞는 정도의 감각.
제아무리 몸을 단련한 고수라고 해도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다.
‘길지는 않겠지만 그사이 개입하는 건 충분하다.’
저 악마의 기척이 둔해진 것을 확신하며 바로 제쳐 두고 시안과 엘시아에게 개입하려 했다.
그러나.
“안이하네.”
움직임을 막은 것은 전신을 휘감은 마기의 장막.
마치 단단한 밧줄처럼 결박한 그것은 어지간한 발버둥으로는 끊어질 일이 없었다.
“통하지 않은 건가?”
“안이해. 확실히 네 말대로 마기로 육체를 구성하는 존재에겐 그런 결점이 있어.”
그럼 왜 통하지 않은 것인가.
그 생각을 뻔히 알겠다는 듯 에밀리는 멋대로 대답을 떠든다.
“간단해. 이 언니 정도가 되면 그런 결점이 존재하지 않아.”
“……뭐?”
“그건 마기로 육체의 구축이 서툰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단점 같은 거란다. 이 언니는 연습을 조금 많이 했거든. ……옛날에 고생했으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침묵하는 상대를 보고 에밀리는 시시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립네. 수백 년 전의 인간이 고안한 방법이잖니.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는 몰라도 진짜배기 악마에게 그런 재주는 안 통해.”
“네 녀석……. 시안의 사역마가 아닌가?”
“후후, 맞아. ……응. 적어도 지금은.”
화제를 돌리려는지 에밀리는 잠시 포박한 감시자를 훑어보았다.
“그 복면은 답답해 보이네. 모처럼 재회했는데, 얼굴이라도 제대로 마주하는 게 어때?”
“헛소릴…….”
정체를 보이는 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그러나 각오를 다진 감시자의 의표를 찌른 것은 기다리지 않고 에밀리가 말한 어떤 이름.
“숨길 의미가 없단다. 레이린……. 맞지? 저 아가씨네 하인이잖니.”
감전이라도 된 듯 감시자의 움직임이 딱 멈춘 순간, 에밀리는 가볍게 손가락으로 복면을 가리켰고 그것만이 불타서 떨어져 나간다.
드러난 얼굴은 이미 몇 번이고 마주친 엘시아 리올레이트를 모시는 전속 시녀.
레이린.
“그때도 너였지?”
“언제 알아차린 거지? 그것도 네 재주인 거냐?”
“오해야. 다른 건 몰라도 이 언니는 인간의 얼굴을 전부 구분하지는 못해. 귀찮아서 말이야.”
계약자인 시안이나 다른 특징적인 기척을 지닌 아이들은 알아보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에밀리.
“네 정체를 말해 준 건 시안이란다. 그래, 네가 설친 그 첫날부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