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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악마 소환함-129화 (129/389)

제129화

129화

그 일 이후로 엘시아는 이틀째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상심한 것은 아니었다.

딱히 겁을 먹은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쪽은 기억 한구석으로 밀쳐 두었다.

‘아니, 신경 쓰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구체적으로는 그 흑마법사 소년의 언동이 떠올라서 일단 밀쳐 두었을 뿐.

‘아니, 아니, 그 녀석에 대해…….’

자신을 가차 없이 몰아붙이던 시안의 모습이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엘시아는 괜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그 기억을 한쪽으로 밀쳐 두었다.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일단은 추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엘시아가 틀어박힌 것은…… 뭐, 그때와 상관은 있지만 시안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

“……나의 재능.”

엘시아는 숨을 고르고는 책상 위에 놓인 양피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노려보며 약간 의식하자.

파스스스슥.

엘시아의 손에서 검은빛이 발산돼 일렁이자, 양피지는 재처럼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다시는 의식하고 싶지 않았거늘.”

자신의 재능을 모르는 건 아니다.

리올레이트가의 차녀인 그녀가 가문의 전승 스킬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뿐.

“악몽이나 다름이 없었거늘.”

지난 몇 년간 엘시아는 이것을 자의로 쓰려고 한 적이 없었다.

예외가 있었다면, 지난 외부 실습.

그땐 사사로운 감정을 운운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조차도 단 한 번 이것을 쓰고 난 뒤 며칠간 잠도 못 이룬 채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시안, 넌 이딴 것을 재능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그의 말은 이해한다.

가진 자가 부정해 봐야 기만밖에 더 되겠는가.

그녀 역시 한때는 이것을 긍지로 생각했다.

자신의 힘이고 이것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여겼다.

엘시아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칫.”

머리가 지끈거린다.

실제로 통증이 느껴질 리 없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고통스러운 것은 기억.

이 혐오스러운 힘이 남긴 끔찍한 과거.

엘시아의 눈동자 안쪽에 투영되는 광경이 있다.

통제하지 못해 무분별하게 퍼져 나가는 검은 파장과…….

그 끔찍한 빛과 함께 불타 사라져 가는 소녀의 모습.

‘이것은 악의 증거이거늘.’

리올레이트 공작가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관습이 한 가지 있다.

종언의 피.

이 힘을 각성할 나이가 되었을 때 한 가지 의식을 치른다.

처음으로 이 힘을 이용해 살아 있는 사람을 불태워야 한다는 것.

그 대상은 가장 친애하는 이를 제물로 삼을 것.

“큭.”

엘시아는 주먹을 움켜쥐고는 방출하던 스킬을 거두었다.

위험하다.

이래서는 끔찍한 실수를 반복할 뿐.

“……역시 쓸 수 없다. 시안.”

그녀를 억압하는 쐐기는 가주가 심어 놓은 능력 따위가 아니었다.

기억.

과거의 실수를 기억하고 후회하는 한, 엘시아는 이것을 자신의 의지로 다시 인정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고민해 봐야 소용없나.”

혐오하는 힘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참견해 준 시안에겐 미안하지만, 역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무엇보다 그녀가 바라는 건.

“리올레이트를 부정하는 내가 이 힘을 쓴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니까.”

가문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이 역겨운 가문을 부정하고 모든 대가를 묻게 하기 위해서일 뿐.

“시안은……. 그 녀석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에게는 어느 정도 설명을 해 주자. 엘시아는 그리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중간 평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가문의 의향을 따를 마음은 없지만, 가능한 지금의 입장을 놓을 수는 없다.

필로스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은 그나마 리올레이트가의 간섭이 적다.

시안 덕에 골칫덩이는 제거한 셈이니 잘됐다고 생각하자.

‘적어도 이것 때문에 누군가를 다치게 할 일은 없을 테니.’

엘시아가 그런 결론을 내리던 참이었다.

똑. 똑.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레이린인가? 아니……. 아닌가.”

전속 시녀인 레이린이 지금 그녀를 찾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이런 식으로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다른 아이인가.

그러고 보면, 최근 레이린이 뭔가로 바쁜 것은 이미 눈치챘다.

아마 가주가 무언가 지시했겠지.

“누구냐?”

“……벌써 잊다니 섭섭합니다. 아가씨.”

무언가 이상하다.

그러나 엘시아는 문밖에 있는 누군가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지적하지 못했다.

불길한 느낌이 든다.

익숙한 느낌. 굳이 따지자면 조금 전 자신이 혐오하는 그 힘을 시험했을 때…… 그 악몽을 떠올릴 때의 느낌.

“그날 죽지 못한 저따위를 간단히 잊어버리는 거야 간단하시겠지만요.”

“……말도 안 돼.”

틀림없으리라.

“그 반응은 조금 서운합니다. ……하지만 잊지는 않으셨나 보군요.”

“어떻게 네가…….”

“간단합니다. 그날 아가씨의 어설픔 때문에 죽지 못했을 뿐.”

문이 열린다.

그녀의 허가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하지만 그 무례함을 엘시아는 감히 지적하지 못했다.

“밀리안…….”

“다시 인사드리죠. 엘시아 아가씨. 당분간 레이린 씨를 대신하여 제가 아가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주님의 명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는 엘시아에게 그 신입 메이드는 그저 조용히…….

“부디 이번에야말로 리올레이트가의 기대주로서 합당한 면모를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엘시아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였다.

* * *

“시안, 이틀 뒤 드디어 고대하던 중간 평가가 시작됩니다.”

짝짝짝.

무슨 축제라도 벌어졌나요?

아니, 학생의 입장에서는 이건 장례식입니다만?

“이상하게 신나셨네요. 다니엘 교수님. 보통 이거 교수님께도 꽤 귀찮은 시기 아닌가요?”

“뭘 모르는 소리예요, 시안. 확실히 평가 기간은 지옥같이 바쁘네요.”

시험 문제만 낸다고 끝이 아니니까. 시험 감독도 해야 하고, 채점도 해야 하고, 그 외에 귀찮은 뒤치다꺼리도 있고.

학생만 시험 기간에 괴로워서 울부짖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거 아나요? 그보다 더 비참한 건 그 바쁜 일도 없는 경우예요.”

“……우와.”

“저도 일이 없는 건 아닌데……. 대부분 다른 클래스의 시험 처리의 보조를 했으니까요.”

평소처럼 하는 넋두리.

“다른 클래스의 교수들한테 ‘자넨 신경 쓸 일이 없어서 좋겠군.’ 하는 소릴 들을 땐 저라도 조금 울컥하거든요.”

“우와…….”

“……같은 교수만 아니었어도 확!”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니엘 교수의 말투는 다시 평상시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결과를 기대하고 있어요.”

“기대 한번 겁나게 부담스럽습니다만.”

벌써 내 성적을 두고 다른 클래스의 교수들 앞에서 자랑할 생각이 아닌가.

은근히 아닌 척하면서 속물이란 말이지.

그리고 쪼잔해!

“시안은 착실하게 지내고 있으니 분명 좋은 결과를 낼 거라고 믿어요.”

……착실하게 벼락치기를 하고 있는뎁쇼.

그것도 에밀리한테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며 편법으로 벼락치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그건 말하지 않아도 되니?)

‘하지 말자…….’

꿈은 꿈대로 꾸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은 법이니까.

그 뒤에는 다니엘 교수에게서 대략적인 일정에 대해 재차 설명을 들었다.

5일 동안의 필기 및 실기 시험 일정.

5일 동안 각 클래스의 필기와 실기 시험을 치르도록 하고.

6일 차에는.

“6일 차에는 모든 학생이 예외 없이 특별 실기 평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특별 실기라. 클래스 불문하고 공통으로 치르는 것입니까?”

“예. 어지간히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은 예외가 없어요.”

그렇겠지.

게임 시절에도 6일 차의 시험은 존재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게임 시절에 유저가 플레이하는 콘텐츠는 바로 이 6일 차의 시험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별도로 준비된 장소에서 시안을 포함한 모든 신입생이 그곳에서 시험을 치르게 될 거예요.”

세세한 규정은 6일 차 전에 통보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곳에서 모든 실력을 발휘하여 다른 경쟁자를 쓰러트리면 되는 거네요.”

서바이벌 전투.

거기서의 활동 내역에 따라 성적을 매기고 그것을 평가에 작지 않은 비중으로 반영하겠지.

알고는 있다.

“싸움이라, 거참 야만적이로군요.”

“실력을 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네요.”

힘이야말로 자신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

적어도 이 제국 사회에는 그런 풍조가 강하게 남아 있으리라.

이곳은 그런 세상이니까.

“물론 6일 차 평가가 전부는 아니고, 일반적인 실기와 필기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는 것으로도 충분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어요.”

“모두가 싸움을 잘하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역시 높은 평가를 받으려면 6일 차 평가가 중요하단 말씀이죠?”

“그렇죠. 적어도 수석……은 하지 못하더라도 순위권에 들려면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거예요.”

다니엘 교수는 내가 3위권 이내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본래는 장학생 특권을 얻기 위해서 우수한 학생이 되려는 거였지만.

“까짓것 동급생을 몇 명 두들겨 패면 내가 정점이라고 인정해 주는 거잖아요. 응! 쉽네요!”

어려운 걸 참 간단하게 하는 개소리.

PVP를 잘하면 내가 최우수생이라고? 거참, 꿈만 같은 조건이구먼.

좋아. 무쌍을 펼치자꾸나. 이미 대책은 제대로 생각해 두었다.

‘아마 평범하게 시험으로 끝나지도 않을 테니.’

메인 시나리오 정도의 난이도는 아니지만, 이것 또한 하나의 이벤트.

당연히 평범하게 계획대로 진행될 리는 없을 것이다.

“기대하고 있어요, 시안.”

“교수님…….”

“그간 우리 흑마법 클래스를 무시했던 이들에게 갚아 주죠. 끝나고 나서 마음껏 비웃어 주는 거예요.”

“그건 교수님의 개인적인 원한 같습니다만.”

보아하니 개인적인 원한도 적잖이 쌓였나 보다.

“가능한 결과는 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조건 낼 것이다.

그래야만 내 인생도……. 이 빌어먹을 세상의 앞날에도 호재가 될 테니.

* * *

시험 전날 놀자고 생각할 만큼 정신이 나간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는 모양이다.

시험 전날, 모든 클래스가 수업과 훈련이 없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험 대비를 위해 모두 돌아간 상태.

평소에 마주치는 녀석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칫……. 나도 돌아가서 공부나 해야 하나.”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니?)

악마가 공부하라며 재촉한다.

아니, 뭐, 이미 시험 범위 내의 지식은 꼼수로 압축해서 머릿속에 다 새겨 뒀고.

실기는 자신 있고.

그럼 남은 건 느긋하게 놀아야 하는 거잖아?

놀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것.

“할 수 없지. 돌아가서 밥이나 얼른 먹고 잠이나 자자.”

(끝까지 공부하겠단 말은 안 하네.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나태하네. 시안은.)

“그런 거 칭찬하지 마. 내 버릇 나빠진다.”

이런 바보 같은 헛소리를 적당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는 일단은 엘시아네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며칠간 그 아가씨랑 이야기한 적이 없었네?)

‘아마 생각할 게 많겠지. 걔도 시험 때문에 바쁠 테고.’

내가 며칠 전에 한 일도 있으니 아마 엘시아 쪽에서 내게 거리를 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사고 칠 조짐만 없으면 돼…….’

6일 차의 시험에서 사고를 치는 건 엘시아 관련 퀘스트의 내용.

하지만 내가 기회를 봐서 그 원인을 미리 처리했다.

그러니 엘시아의 능력이 거기서 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겠지.

‘대신 뭐가 일어날까.’

적당한 핑계라도 대서 지금 그 녀석의 상태를 확인해 두는 게 좋을까 생각하던 때였다.

(어머, 그 아가씨네.)

마침 엘시아도 저택에 있었던 모양이다.

대충 낯짝 상태라도 확인할 겸 에밀리가 말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어? 어어어어어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마구 난사하고 싶을 만큼 강한 의문을 토해 내야 했다.

엘시아가 문제가 아니었다.

뭐, 며칠간 어지간히 깊은 고민을 했는지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낌새를 보이는 거만한 아가씨.

거기까지는 예상한 대로였다. 아마 아직 제대로 각성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의문을 표한 건 그 엘시아의 뒤를 따라오는 시종.

레이린이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얹혀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던 메이드.

다른 메이드와 같은 복장이지만,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얼굴을 반절 가린 가면.

“왜 저 녀석이…….”

누군지 알고 있다.

“밀리안?”

메인 시나리오 5장의 보스.

그녀가 지금 엘시아의 시종으로 동행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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