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144화
조금 전의 얼간이들은 총 일곱 명.
일단 그만큼의 점수는 벌었다.
‘와~! 겁나게 고마워라.’
다음에도 잘 부탁드려요, 윌로트와 떨거지들.
탈락하거나 기절한 녀석들은 자동적으로 시험장 바깥으로 전송되리라.
그렇기에 나는 녀석들을 적당히 숲 한구석에 던져서 모아 놓고는 그대로 내 갈 길을 가고자 했다.
“순조롭군.”
당장의 목적은 이 시험에서 적절한 점수를 벌어 두는 것.
그리고.
‘에밀리, 여전히 별다른 징조는 없어?’
(흐음, 미묘하네.)
에밀리의 모호한 대답.
역시 이 녀석이라고 해도 쉽게 알아차리기는 힘든가.
두 번째 할 일은 이곳에서 일어날 사건의 흐름을 알아채는 것이다.
2.5장.
이 시험에서는 5장의 메인 시나리오의 보스가 끼어들었고, 녀석의 존재로 인해 발생할 사건이 녹아들어 있다.
‘문제는 대체 뭐가 일어나느냐는 거야.’
목적은 알겠는데, 그 중간 과정이 아직 모호하다.
오늘 여기서 무엇을 저지르려는 건가.
결과적으로 83기수 학생들을 상대로 참극을 벌이려는 것은 알겠지만, 그 실행 방법이 여전히 의문이다.
(미래를 아는 거 아니었니?)
‘밀리안……. 그 녀석이 일으키는 사건은 크게 세 가지 중 하나야.’
메인 시나리오 5장에서 밀리안 보스전까지의 흐름은 크게 세 가지 사건으로 루트가 갈린다.
메인 시나리오의 공략도와 엘시아 리올레이트 루트의 공략도 등에 따라 발생할 사건이 나뉜다.
제국의 전복을 꾀하는 테러리스트들과 손을 잡고 아카데미를 점거하는 사건.
제국 귀족 무차별 테러 사건.
어느 도시에 저주를 걸어서 죽음의 도시로 만드는 사건.
이 세 가지 중 하나가 발생하고 그곳에서 메인 시나리오 5장의 보스전이 치러진다.
‘하지만 여긴 어느 쪽도 해당하지 않는 장소야.’
세세한 디테일은 달라도 결국 밀리안이 사건의 주도자이고, 그녀를 쓰러트리는 것으로 5장이 마무리되는 흐름.
(그럼 그중 하나가 일어나는 거 아니니?)
‘가장 유력한 건 첫 번째인데, 시험 기간이라는 조건이 맞지 않아.’
이 장소에서 제3세력을 이용한 테러를 벌일 수는 없다.
아카데미 부지와 이 시험장은 별개의 공간. 제삼자가 쉽게 섞여들기는 어렵다.
하물며 그게 다수라면.
‘뭘 이용하려는 거지…….’
일단은 시험을 치르면서 살펴볼 수밖에 없으리라.
위화감만 알아채면 답을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은 시험이 우선이야.”
(후후, 시안다운 말이네. 아, 또 누가 오나 봐.)
에밀리가 접근하는 학생의 존재를 알렸다.
적은 아니다.
평범한 학생이다.
그래서 쟤가 누구더라…….
“검은 머리……. 그래, 시안! 드디어 따라잡았다!”
“……너 누구냐?”
“벨딘 멜로스다. 오러 클래스의 기대주라고 불리는 몸이지. 아마 이름을 들은 적은 있겠지.”
“……뭐?”
몰라요. 그거 뭐야.
내가 멍하니 있자 어쩐지 녀석은 시무룩해한다. 아, 조금 불쌍하네.
“됐다. 이제부터 기억하게 해 주지.”
“그냥 관두지? 결말이 뻔한데. 딱히 기억해 둘 마음도 없고.”
“보통은 이럴 때 기억해 둔다고 할 텐데…….”
내 앞길과 상관없는 인간은 흥미가 없거든.
(시안도 참 너무하네…….)
음? 내가 나쁜 건가? 그렇군! 내가 나쁜 거군!
아무렴 어떤가.
“그래서 굳이 나라는 걸 알면서 나온 건 한판 붙을 생각이지?”
“이렇게 마주친 것도 운명! 여기서 내 실력을 보여 주마!”
용감하군.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호승심을 불태우며 경쟁하고 싶어 하는 의욕이 엿보인다.
‘귀찮아.’
이런 애들은 부담스럽단 말이지.
후딱 처리하고 점수나 챙기자. 지금 중요한 건 이 부담스러운 친구가 아니니까.
“이젠 도망 못 친다! 시안! 조금 전에는 놓쳤지만, 이번에야말로 승부를…….”
“……야, 뭐라고?”
신경 쓰이는 말.
일단은 먼저 승부를 내야 할 거 같아서 나는 흑염탄을 만들어 던졌다.
견제용.
녀석도 그것을 알기에 검을 쥔 손이 아니라 맨손에 오러를 두텁게 둘러서 그것을 쳐 낸다.
“겁도 없군.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섀도우 무브를 발동.
녀석의 뒤까지 이동한 순간, 녀석도 알아챘다는 듯 그대로 몸의 방향을 틀어 검을 휘두른다.
“뻔해. 그대로 튀었어야지.”
검이 부딪히는 순간, 기다린 것은 내가 이미 꺼내 든 단검.
단검이 깃든 마기의 칼날이 녀석의 오러를 받아 낸다.
“고작 단검으로?!”
“고작 단검이지.”
경악하는 눈초리도 이젠 익숙하다.
봐줄 필요는 없다.
그대로 녀석을 있는 힘껏 걷어찬다.
내 근력은 어지간한 오러 클래스의 녀석들 정도는 가볍게 짓누를 정도.
“크악?!”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녀석.
녀석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녀석의 등을 밟고는 흑염을 일으켜 녀석에게 겨누었다.
“끝이야.”
“……졌다.”
순순히 인정하는군. 좋군, 좋아.
“마무리를 지어.”
“딱히 봐주려고 탈락시키지 않은 건 아니야. ……조금 묻고 싶어졌거든.”
본래라면 딱히 상관없는 녀석들은 마주치면 바로바로 탈락시킬 방침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자리에서 봐줄 수 있어.”
“…….”
“너도 시험 시작하자마자 바로 탈락되는 건 싫잖아?”
“뭐가 궁금하지?”
말이 통하는 녀석은 싫지 않아.
“아까 전 네가 한 말이 신경 쓰이는데……. 내가 도망쳤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단순한 도발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별것 아닌 말 같지만, 이상하잖아. 내가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이 녀석과 마주친 건 방금 전인데.
‘혹시 시험이 시작되고, 이 녀석이 내 근처에 있었나?’
(그건 아닐걸? 적어도 이 누나가 봤을 때 이 애송이는 시안 근처에 없었단다.)
에밀리도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의미도 없는 헛소리를 이 녀석이 할 이유가 없다.
“무슨 소리야? 시안, 넌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나랑 마주쳤어.”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런 적 없다.
“승부를 내자고 말하자마자 바로 달아났잖아. 설마 유인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
“뭐냐……. 거짓말이 아니다만.”
“됐어. 이해했어. 의심하는 거 아니야.”
나는 가볍게 숨을 고르고는 녀석을 풀어주었다.
약속은 지킨다.
“가 봐.”
“……설마 이대로 뒤돌아서자마자 펑! 터지는 건 아니지?”
나를 뭐라고 생각하냐. 뭐, 그것도 재미있긴 하겠군.
“그런 거 아니니까 후딱 가. 다음에 마주치면 그때는 봐주는 건 없어.”
“고, 고맙다.”
녀석은 그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도망쳤다.
가늘고 길게 살 녀석이구먼. 이름은……. 됐다, 까먹었다. 역시 흥미 없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시안, 뭔가 마음에 걸리니?)
‘저 녀석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하긴, 이 누나가 듣기에도 그런 것 같네.)
다만 에밀리와 다르게 내가 녀석의 말을 사실이라고 확신한 건 명백하게 게임 시절의 지식 덕분이다.
“……녀석이 있었군.”
짐작하고 있던 또 한 명의 악당.
누군지 깨닫게 되었다.
“제일렌. 그 망할 연금술사로군.”
무엇보다 무엇을 할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낭패라고 느끼기보다 나는 불길한 웃음을 짓는다.
“그럼 간단하네.”
뭘 해야 할지 확실해졌으니까.
“우선 찾아야 할 게 있어.”
* * *
성녀 알피네.
성녀회의 말석이자, 대성녀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이해하는 소녀들 중 한 명.
“자! 사양 말고 덤벼 주세요!”
자신 있게 큰소리치나 주변에 들리는 것은 침묵뿐이다.
“후우……. 아쉽네요. 주먹과 주먹을 맞부딪치며 경쟁할 사람이 없는 걸까요.”
당연히 듣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니……. 없으면 곤란한데요.”
알피네는 진땀을 흘리고 난처해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험이 시작되고 수 시간은 경과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피네는 아직 그 누구와도 싸워 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가 도망친다.
(아니, 성녀는 좀…….)
(왠지 벌 받을 거 같아.)
(그것보다 그 성녀회잖아!)
(아버지가 그랬어! 성녀와는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어째서인지 조우하는 동기들마다 부리나케 도망쳤다.
특히 마지막에 도망친 녀석은 마치 무서운 거라도 본 것처럼 진심을 다해 달아났다.
실례잖아! 성녀가 뭐 어떻다고! 왠지 이때만은 살짝 울먹거린 알피네였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는데요…….”
시안 덕에 필기와 실기는 아슬아슬하게 턱걸이했다.
특별 시험의 성과에 따라 대성녀의 질책이 따를지 말지가 결정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나 붙잡아 두들겨 패야 하는 걸까요.”
성녀답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를 갈등을 하는 순간, 알피네는 기척을 느꼈다.
“오! 드디어!”
누군가 다가온다.
점수가 온다!
주먹을 불끈 쥐고 기다리는 알피네에게 드디어 상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안?”
시안이었다.
최근 자주 알고 지내는 흑마법사 소년.
“설마 저랑 승부를 하러 온 건가요? 아니면…….”
시험 중이기에 저 소년 역시 어떤 의미로는 명백한 경쟁자다.
뭐, 가능하다면 싸우고 싶지 않은 경쟁자이지만. 실력이든 다른 의미로든.
“아! 혹시 협력이라도 하자는 걸까요? 후후, 그것 또한 나쁘지 않겠네요.”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피네는 방심하며 충분히 얼굴을 마주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섰다.
“혹시 이번에도 뭔가 꾸미고 있나요? 좋은 방법이라면 저도 거들었으면 하는데요.”
알피네는 안심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고는.
“……뭐, 당신이 진짜라면 말이죠.”
평상시 성녀의 모습을 아는 이들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
시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알피네의 모습이 잔상처럼 흔들렸다.
파앙!
단단한 육편이 파열하는 듯한 괴기한 소리.
언제 내질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뻗어 나간 알피네의 오른팔이 시안의 가슴을 꿰뚫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꿰뚫어 버린 것이다.
“불쾌한 장난이네요. ……누구죠? 아니, 누구 짓이죠?”
필로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동기들 중 어느 누구도 들은 적이 없는 성녀의 짜증스런 목소리.
“적어도 저한테 가짜 시안을 보인 건 실수였어요. 어리석고요.”
당연히 그 시안이 대답할 리 없었다.
생기를 잃고 무너지는 시안이었던 것.
알피네는 팔을 거두고 싸늘한 시선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무서워! 겁나게 무섭잖아!”
마침 딱 맞춰서 이 자리에 난입한 또 다른 시안이 새파랗게 질린 채 외쳤다.
“아! 이번엔 진짜네요.”
“진짜고 뭐고 너무 무섭거든?!”
안심했다는 듯 싹 태도를 바꿔 반갑게 손을 흔드는 알피네에게 시안은 가까이 접근해도 될지 조금 고민했다.
* * *
우선 할 일은 아까 그 녀석이 보았다던 ‘나’를 찾아야 한다.
‘아마 데올킨에게 협력하는 녀석은 제일렌, 그 연금술사야.’
(아……. 그 기괴한 인간 말이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바로 확신해?)
‘그럴 이유가 있어. 뭐, 설명은 제쳐 두고 일단 찾아야 할 건 녀석이 봤다던 나야.’
내 가짜가 있다.
정확히는 내 가짜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놈이 뭘 할지 알고 있으니까 일단 내 가짜부터 찾아내서 막아야 해.’
만약 내 가짜가 있다면 어디로 갈까?
뻔하다. 속일 만한 녀석이 있는 곳이겠지.
다행히 내 인간관계는 무척 협소하기에 찾아야 할 범위를 좁히는 건 어렵지 않다. 친구가 적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냈다.
(어머? 그 성녀 아가씨랑 있나 보네. 과연…… 저게 가짜 시안이구나. 잘 만들었네.)
에밀리도 감탄할 정도로 똑같이 생긴 내가 그 바보 성녀에게 접근한다.
“칫! 일단 저것부터 처리하고 보자.”
(이 누나에게 맡기렴.)
바로 에밀리를 보내서 내 가짜를 공격하려던 참이었다.
(어머?)
놀란 듯한 에밀리의 목소리. 그리고 동시에 알피네의 주먹이 내 가짜의 심장을 꿰뚫는다.
말 그대로 즉사.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를 정도의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고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쪽을 발견하고 먼저 손을 흔드는 알피네에게 다가갔다.
진지하게 도망칠까 고민한 건 비밀이다.
“야, 알피네. 혹시 내가 평소에 너한테 뭐 섭섭하게 대한 게 있냐?”
“없는데요? 늘 감사하고 있답니다.”
“감사…….”
심장 부근에 구멍이 뻥 뚫린 내 가짜를 보고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혹시 성녀회는 감사를 표하는 상대에게 살의가 담긴 정권 지르기라도 먹이는 교리가 있나.
무서운 녀석들이네.
“뭣보다 저게 가짜라는 걸 바로 알았어요.”
“그렇겠지. 아니까 때린 거지? ……그렇지?”
“그러니까 슬쩍슬쩍 거리를 벌리지 말아 주세요. 시안.”
이 성녀에 대한 믿음을 되살리기까지는 약 3분의 고민하는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