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206화
이닐스 백작이 경고했던 날이 되자마자 레밀린은 그가 이곳의 사람들을 어떻게 끝장내겠다는 건지 단박에 이해했다.
“몬스터 대군.”
엉망인 성벽 위에서 레밀린은 전방을 주시했다.
망원경 같은 것은 없지만, 작정만 하면 그녀의 역량만으로도 다소 먼 곳까지 볼 수 있었다.
……뭐, 저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는 없었지만.
도시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새까만 파도가 일렁인다.
몬스터의 파도.
마치 이 도시를 포위하듯 대규모의 몬스터가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용병 일을 하며 전장에도 가 본 적은 있지만, 저런 걸 보는 건 난생처음이군.”
용병 한스는 낡은 망원경으로 그곳을 바라보고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끔찍하군. 깡 없는 놈이 본다면 그 자리에서 지릴지도 모르겠어.”
“그런가요? 전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요.”
“레밀린, 자네가 공을 세운 건…….”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요.”
지금 보이는 태연한 모습은 그녀도 반쯤 허세에 가까웠다.
여기서 겁먹은 소리를 해 봐야 하등 이로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알기 쉽네요. 그야말로 몬스터 대군으로 남김없이 죽이겠다. ……고약하네요.”
뭐, 어떤 의미로는 상상하던 최악의 가정보다는 나은 상황이다.
대처 못 할 저주라든가 싸우지도 못할 수단을 쓰면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지나치게 정직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요. 그래도 몬스터면 쳐죽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죠.”
“아니, 그것만을 아닐세.”
한스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는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더 낫다는 듯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닐스 백작!”
당장이라도 그가 여기 있다면 짓뭉개 버렸을 정도의 분노가 끓어오른다.
몬스터들 사이에서 희미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사람.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아이들.
“……그러고 보면, 이닐스 백작의 의뢰로 왔던 아이들을 찾지 못했죠.”
공간 전이에 휘말리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 아이들은 평민이 아니니 조건에 맞지 않아서 휘말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인질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몬스터의 공격을 받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같은 편인 듯 자연스레 섞여 있다.
제정신으로 저 몬스터 대군에 합류한 상태는 아닐 터.
시안의 말대로라면 백작에게 협력하고 있는 사악한 존재는 인간의 정신에도 간섭할 수 있다고 하던데.
“무작정 몬스터를 날려 버리면 잘못하면 저 아이들까지 해칠 수 있다는 소리네요.”
“노골적으로 자네를 의식하고 있군.”
“영광이네요. 참나…….”
효과는 더할 나위 없다고 칭찬해야겠지.
레밀린은 자신의 애무기인 거대 메이스를 손에서 놓았다.
적들뿐이라면 자신만 뛰어들어 지칠 때까지 날뛰면 그만이지만…….
“같이 날려 버리면 되지 않나?”
“저기요? 그쪽분들부터 날려 드릴까요?”
“……그렇긴 하겠군.”
학생회장 이전에 인간으로서 그러면 안 되겠지.
……실은 레밀린 역시 일단 어떻게든 살려만 놓으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살짝 갈등하긴 했다.
“가능한 우선적으로 구출하도록 하죠. 용병분들은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아이들과의 충돌을 피하세요.”
“무슨 소린가? 제압이라면 차라리 우리들이 하는 게…….”
한스의 의견에 레밀린은 고개를 저었다.
“저 애들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쪽분들의 안위를 위해서예요.”
어리다고 해도 이 시점에서 신입생들은 어지간한 삼류 용병들의 실력으로는 제압할 수 없었다.
어중간한 실력으로 제압하려 들면 어느 쪽이든 죽게 된다.
“그리고 그걸 보면 제가 여러분들을 죽일 수밖에 없어요.”
“……농담인가?”
“농담처럼 들리나요?”
반절 정도는 해 본 소리에 가깝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되었겠지.
“버티기만 하면 돼요. 다행히 버틸 만한 일손은 있고. ……그렇지? 엔티?”
“전 역시 숨으면 안 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 같은 흑마법사가 있을 자리가 아닌데요.”
“안 돼. ……네게 직접 돌격하라고는 명령할 생각은 없어. 그저 시안이 시킨 대로만 하렴.”
“시안 선배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기대하는 것은 저 꼬맹이가 아니라 엔티의 뒤에 버티고 서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특제 언데드.
마스터 와이트.
자연적으로 존재할 리 없는 괴물.
‘저것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괴물이야.’
처음 저 언데드를 보았을 때, 레밀린은 내심 기겁했다.
시안은 알기나 하는 걸까? 저걸 열 살짜리 아이에게 맡긴다는 의미를…….
아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자. 덕분에 버틸 가망이 있다.
거기다 후방에 대기하고 있는 정령술 클래스의 학생들까지.
며칠간의 적응 훈련 덕에 지금은 계약된 정령을 폭주시키지 않는 정도까지는 도달하였다.
싸울 수 있다.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마지막에 그 소년만 제때 돌아온다면.
* * *
녹의 시조가 알려 준 정보 덕에 방어전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장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버틸 방책을 알려 주었고, 무엇보다 거기에 버티고 있는 게 레밀린이니까.
‘본래는 방어전을 회장에게 맡겨 두고 나는 바로 핵심 공략을 하려고 했는데…….’
적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그러니 내가 올 때까지 대비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온다.
“로벨타스 그 할배, 그때 당한 게 어지간히 분했나 봐?”
설마 회복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쳐들어올 줄이야.
“그뿐이 아니네. 시안. 그 늙은 마법사의 기척이 달라졌어.”
“나도 알아. ……보아하니 단기간에 복귀하기 위해 뭔가 했나 보네.”
그것도 마법사로서 썩 좋지 않은 방법을.
그의 기운에 불길하고도 삿된 것이 느껴진다.
“밀레이토스의 짓이군.”
무슨 방법으로 꼬드겼는지는 눈에 선하다.
“……타락시켜 이용해 먹고 버릴 패로 삼은 건가.”
“어떻게 할 거야, 시안?”
셀리디아가 묻는다.
“위험한 마법사지? 싸울 거면 도울게.”
“아니. 셀리디아, 넌 먼저 돌아가서 학생회장 쪽을 도와.”
의도는 명백하게 시간 끌기.
그럼 둘 다 여기에 발이 묶일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셀리디아를 먼저 돌려보내는 게 도움이 되리라.
“괜찮아?”
“상관없어. 어차피 나한테 한 번 당했던 할배야. ……그때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으니 만회해야지.”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
“거기다 잘됐어.”
“잘됐다고?”
“아니꼽지만 7서클의 고수야. 지난번처럼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이겼다는 건 영 찝찝하거든.”
“시안, 은근히 지기 싫어한다니까.”
사내놈들이라면 다 그런 법이다.
재차 붙으러 와 준다면야 내심 환영이다.
“내가 더 세다는 걸 증명해야지.”
확실히 이긴다고 보장하니 그제야 셀리디아는 안심한 모양이었다.
“……응. 그럼 맡길게.”
“그래, 그래. 금방 처리할 테니까 넌 먼저 가서 거기 잡몹들이나 청소해.”
나는 셀리디아의 뒷덜미를 붙잡고는 녹의 시조가 열어 주는 문을 향해 휙 던졌다.
어쩐지 너무하다는 외침이 들린 것 같지만 기분 탓이다.
“시안, 너도 함께 가도 되는데?”
대화를 듣고 있던 녹의 시조가 묻는다.
“지금 저까지 따라가면 전장에 저 노인이 난입해서 난리를 칠 텐데요? ……아니면 시조님께서 처리해 주실 겁니까?”
“불청객이라면 그래도 되겠지.”
의외로 녹의 시조는 순순히 말했다.
부탁하면 대신 처리해 줄 수 있다고.
“끌리네요. 하지만 시조님께는 부탁하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너는 꽤 영악하게 일 처리 하는 걸 좋아하는 듯 보이는데.”
“전 떠넘길 상대를 가리는 편이거든요.”
“……그렇구나.”
이해한 듯 녹의 시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를 신뢰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비슷하다고 해 두죠. ……그리고 그자는 마침 딱 좋은 연습 상대이거든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녹의 시조는 순순히 관망하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알던 친구와 비슷한 말을 하는구나. 그래, 그거면 어쩔 수 없겠어.”
“……잠시 기다려 주시죠. 금방 처리하고 올 테니까요.”
이번에는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나는 가볍게 고갯짓을 하고는 바로 로벨타스가 나타난 방향으로 향했다.
“시작하자. 에밀리.”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렴. 시안.”
작은 상태를 유지 중이던 에밀리의 모습이 한 차례 사라진다.
재소환.
《진마빙현제의 완성에 따라 페널티가 무효화되었습니다.》
이미 비술의 개량에 성공한 시점에서 내 흑마법 구사 능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거기다 이제는 다섯 번째 원에도 적응하였고.
다시 본래의 성인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온 에밀리가 손짓하자, 내 주변을 검은 바람이 휩쓸더니 그대로 나를 목표 지점까지 옮겨다 준다.
상공에서 내려다보자, 아래에 로벨타스로 추정되는 자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우선은 재회의 인사라도 해 둘까.”
-라이트닝 인페르노.
그대로 상공에서 지팡이를 아래로 향하고는 흑염과 뇌격이 섞인 파도를 쏟아 낸다.
“드디어 왔느냐! 사악한 애송이여!”
기운도 넘치시는군.
이젠 귀에 익다 못해 딱지가 앉을 듯한 지긋지긋한 노인의 고함과 함께.
치솟는 벼락이 내 흑마법과 충돌한다.
꽈르르르릉!
상쇄.
반대되는 성질의 마력이 서로를 철저히 불태우며 소멸한다.
“실력을 키운 것이냐. 마력의 사용이 능숙해졌군.”
“칭찬 겁나게 안 고맙네요. 지긋지긋한 노인 같으니.”
“건방진 것.”
아니, 이전에 조우했던 그라면 나름 7서클에 오른 선구자로서 예우라도 해 줬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당신 제자들도 지금의 댁을 보면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안 들겠어.”
짐작은 했지만, 로벨타스의 타락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욱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꼴이었다.
잃은 팔다리를 대신하는 것은 사악한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촉수와도 같은 물체.
다른 신체 역시 언제 인간의 형태를 잃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듯 부풀거나 녹은 상태였다.
“밀레이토스의 권속 계약이라도 받아들이셨나? 아니, 어중간하게 고집을 부려서 아주 흉측하게 변했군.”
“받은 굴욕을 갚기 위해서다!”
“어지간히 분했나. ……그깟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그는 원로로서의 앞길을 버렸다.
제아무리 마탑이 돈과 정치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그들은 최소한 마법사로서의 오만한 긍지라도 지니고 있다.
저런 꼴이 된 그를 마탑이 용인할 리 없었다. 돌아간다고 해도 축출 혹은 그보다 못한 꼴을 보게 되겠지.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원로 로벨타스?”
“모든 것은 탑을 위해! 타락하더라도 탑을 위한 공헌이 되리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도다!”
“탑……. 아니, 마탑주를 향한 충성심인가.”
“네가 뭘 안다고…….”
“알지.”
너무나도 잘 알지.
왜 마탑이 끼어드는지, 무엇을 꾀하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탑주의 욕심을 위해. 마탑은 금기된 지식을 모으지.”
“정체가 뭐냐, 어린 흑마법사! 어떻게 그것을?! 설마? 그럴 리가…….”
두루뭉술한 말이지만, 로벨타스에게는 전해졌으리라.
이걸로 놈은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입을 막아야 할 테니까.
“로벨타스. 댁은 여기서 끝난다. ……에밀리.”
“준비되었으니 언제든지 써도 괜찮단다. 시안.”
짧은 대화의 사이, 에밀리는 새로 습득한 비술의 재검토를 끝냈다.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
나는 품에서 흑약의 나침반을 꺼냈다.
그것을 본 로벨타스가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또 사악한 것에 기대는 것이냐.”
“당연하지. ……뭐, 이번엔 조금 방식이 다르지만 말이야.”
똑같으면서 같지는 않으리라.
“진정한 흑마법사의 방식을 보여주마.”
나는 씩 웃으며 꺼낸 아티팩트를 에밀리에게 던졌다.
“아티팩트를 악마에게 양도한다고?! 정신이 나간 것이냐?”
“머리가 돈 게 아니야. 이거야말로 진정한 흑마법사의 방식이라는 뜻이지.”
유능한 흑마법사는 사역마의 배신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다.
진마빙현제.
아티팩트를 받아 든 에밀리가 그것을 사용하자, 에밀리의 모습이 사라진다.
능력의 제어를 위해 흑약의 나침반에 깃든 것이다.
다시 내게 돌아온 아티팩트는 그대로 내 안으로 파고든다.
심장에 위치한 원 안으로 파고든 아티팩트가 본격적으로 힘을 끌어낸다.
화르르륵.
불길과도 같은 붉은색 마기가 내 발치 아래에서부터 일어나더니 온몸을 감싼다.
힘이 차오른다.
(어떠니?)
“괜찮아. 의식을 강탈당할 징조는 없어.”
마왕의 의식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의 의식도 뚜렷하고, 사물도 제대로 보인다.
힘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재주를 부렸나 보군. 하지만 그때와 같은 귀기는 느껴지지 않는군. 힘을 억제해 봐야…….”
멋대로 떠들던 로벨타스의 말이 끊겼다.
“크허억!”
“말이 많아. ……들을 마음도 안 생기고.”
그의 몸이 꺾이며 허공으로 떠오른다.
놈은 자신이 무엇에 얻어맞은 것인지 인식도 제대로 못 하는 모양.
“약해졌는지 아닌지는 직접 처맞고 말해 봐!”
내가 손을 움켜쥐자, 그의 머리를 붙잡은 붉은 혈마력의 손이.
그대로 그를 바닥에 내리찍어 짓눌렀다.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 실수였어. 영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