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208화
30장 - 타락의 정령
폐정령계로 날려 왔을 무렵이었다.
전이에 휘말린 이들을 통솔하고 또한 그들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자 했다.
필요한 것은 거점을 지키거나 식량 등을 확보하는 것.
보호하지 못한 영지민을 수색하는 일은 레밀린 그리고 용병들이 맡았다.
당시 나는 조사 겸 식량을 찾겠다는 핑계로 여기저기 쏘다녔고.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일반인들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전투력이 없더라도 나름 일손은 보탤 수 있으니.
손상된 건물의 긴급 보수 혹은 여러 잡일들.
그들에게 나는 한 가지 일을 더 맡길 것을 주장했다.
“이것들을 조속히 만들도록 시켜야 합니다.”
내가 꺼낸 것은 어떤 물건의 설계도였다.
“대체 뭘 또 꺼낸 건가? 음……. 이건.”
“잠깐? 신입생? 이걸 영지민들에게 만들라고 시킬 거야? 진심이니?”
용병 한스는 물론이고, 학생회장 레밀린 역시 내가 보여 준 것을 보고 난처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별것 아니다.
정말로 별것 아닌 설계도다.
“거점 방위를 위한 함정이나 일부 수비용 장치의 설계일 뿐입니다만.”
몬스터 전용 함정.
예를 들어, 간단한 도르래 장치를 이용하여 적은 인력으로도 빠르게 죽창 등을 세워서 침입 저지를 위한 벽을 칠 수 있도록 하는 장치.
그리고 간략한 구조의 투석기 등등.
“전쟁이라도 대비하려는 것인가…….”
“이미 전쟁을 겪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닐스 백작은 이곳으로 날려 온 이들을 전부 죽이고자 할 것이다.
적어도 그 살의만은 내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여차하면 이곳을 지킬 방비책은 있어야죠.”
“……그렇겠네. 그건 이해해.”
레밀린도 그것만은 인정한다.
“다행히 대장간이나 목수 일을 하는 이들도 있으니 의논하면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이것만큼은 나 혼자서 만들기는 버겁다.
내가 할 일이 달리 없는 것도 아니고.
다행히 영지민들 중 이쪽 일에 종사해 본 경험이 있는 자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그들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는 뜻.
“재료가 조악해서 만든다고 해도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길.”
소재는 몬스터의 것을 사용할 생각이다.
애초에 이 설계 자체가 이곳에 존재하는 몬스터의 활용을 전제로 했던 것.
무엇보다.
“완성된 장치에 제가 뭔가를 부과할 생각입니다.”
“뭔가를? 대체 무엇을 할 셈입니까?”
“이런 것이죠.”
내 팔꿈치 길이 정도로 길게 펼친 양피지를 꺼내 보였다.
“스크롤입니다. 이 설계도의 마무리용으로 특별히 짜 둔 것이죠.”
일반적인 흑마법 스크롤과는 용도가 다르다.
일종의 소재 아이템 취급.
《설비 강화 스크롤》
이 스크롤을 거점 방위 설비에 조합하면 그 설비에 다소 보너스 효과가 붙게 된다.
예를 들어 투석기 같은 것에 쓰면 미약한 마법 대미지를 추가한다든가.
방어용 울타리의 내구성을 올린다든가.
익숙하지 않은 소재를 이용하여 마감이 어설픈 장치라도 나름 제 몫 이상을 해낸다는 뜻.
“그런 방법이…….”
“과연, 명망 높은 아카데미의 학생이군. 아주 신묘한 방법을 쓰는군!”
“그거라면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기술자들이 진심으로 놀라워하며 들뜨기 시작한다.
물론 복잡한 낯빛을 띠는 사람도 있었고.
예를 들면 학생회장.
“……잠깐, 나 좀 봐. 신입생?”
레밀린은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설계도를 가리켰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 설계도에 찍힌 직인은 아카데미 장인 클래스의 것 같은데?”
“당연히 아시겠지만, 돈을 쥐어 주니 신나서 그려 주더라고요.”
“그거 교칙 위반인 거 알지?”
“당연하죠!”
당당하게 외치는 나였다.
학생회장 앞에서 교칙 따위 개나 주라고 외치고픈 나였다.
“나, 진지하거든?”
“압니다. 함정은 제쳐 두고 투석기라든가 자칫하면 무기로 쓸 수 있는 설계도를 함부로 거래할 수 없죠.”
걸리면? 그냥 맴매 정도로 끝나진 않겠지.
당연히 암거래로 구한 것이다. 어디를 가나 학생은 돈이 고프다.
익명을 보장해 주고 금화만 좀 쥐어 주면 마구 팔아 주기 마련이지.
거기다 설비 제작용 스크롤도 제국에서 인가된 마법 물품이 아니다.
당연히 이것도 불법.
“회장님이 정말로 원칙을 고수하시고 인정 못 하겠다고 하시면 저는 눈물을 머금고 이걸 태워 버려야겠죠.”
태울까? 이거 쓰지 말까요?
손끝에 작은 흑염을 키우며 묻는다. 당연히 본심은 아니다.
레밀린도 정색하고 이걸 말리고자 한 건 아니겠지.
순수하게 출처가 신경이 쓰인 것뿐이리라.
“하아……. 못 본 척해 줄게. 대신 한 가지만 물을게, 신입생.”
“네. 얼마든지요.”
“……이것들, 설마 처음부터 상정한 거니?”
상정했다.
당연히 미리 준비하지 않는 게 바보 아닌가.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만일을 위해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것뿐입니다.”
“평소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고작 반년 넘는 동안에 여러 일들을 겪었잖습니까? 절로 준비성이 철저해지더라고요. 학창 생활, 참 힘들죠.”
이번 신입생들이 유독 하드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쳐줄게.”
레밀린은 내 뻔뻔함에 그만 질렸다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어처구니없어 하는 회장님.
그러나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준비성에 감탄하고 또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만은 내기를 해도 좋았다.
* * *
시간이 흘러 이닐스 백작이 보낸 괴물들과 대치해야 할 때가 도래했을 때.
“……설마 정말로 감사해야 할 때가 올지는 몰랐어.”
레밀린은 그때 시안이 제안한 방어 대책을 용인한 것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또한,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그 신입생의 혜안에 감사해야 했다.
“정말로 저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도시를 향해 돌진하던 몬스터들이 기습적으로 세워진 창에 그대로 들이박아 꿰뚫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레밀린은 탄복했다.
소형 투석기를 통해 날리는 돌에 몬스터의 군세가 일시적으로 흩어질 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심 간담이 서늘해졌다.
“……만약 저게 없었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싸움에 자신이 있어도 뭐든지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안이 제시한 저 방어용 설비의 존재만으로도 지금 이 방어전에서 희생자의 수가 극단적으로 줄어들 수 있었다.
“덕분에 집중할 수 있겠어.”
용병들이나 방어 설비로도 막을 수 있는 몬스터는 가능한 무시해도 된다.
레밀린은 그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괴물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하아아앗!”
전방에 돌진해 오는 거대한 뱀을 향해 레밀린이 대형 메이스를 휘둘러 찍어 눌렀다.
쿠웅!
묵직한 파쇄음과 함께 거대한 몬스터가 그대로 머리가 곤죽이 되어 죽었다.
“……굉장하군. 저걸 일격에 쳐 죽인다고?”
“과연 소문대로군.”
“전장에서도 저걸로 아군까지 때려죽였다지?”
“무서운 기세군.”
용병들 중 누군가 탄성을 지르는 자도 있었다.
“잠깐만요! 아군까지 때린 적 없거든요! 그거 누가 지껄인 거예요?!”
끔찍한 소문에 몸서리를 치며 레밀린은 차례로 다음 대형 몬스터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녀의 활약은 용병들과, 영지민들에게 사기를 드높여 주었다.
자신보다 거대한 둔기를 가벼이 휘두르며 괴물들을 간단히 쳐 죽이는 광경.
상식을 벗어난 활약은 나름의 희망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여러분께 버거운 몬스터는 제가 전부 맡겠어요. 여러분들은 잔챙이들만 맡으면 돼요. 쉽겠죠?”
메이스를 재차 휘두르며, 레밀린은 마치 도발하듯 묻는다.
“어렵다고 하면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니지!”
“걱정하지 말게! 우리도 나름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났네!”
용병들도 호쾌하게 외치며,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몬스터를 향해 덤벼든다.
‘당장은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태연한 척 메이스를 휘두르며 레밀린은 내심 걱정했다.
몬스터들을 가뿐히 죽이고 있지만, 실은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버거워.’
몬스터가 강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방어전이기에 앞뒤 생각하지 않고 마구 날뛸 수 있는 광화(狂化) 스킬은 못 쓰지만, 지금 상대하는 몬스터 정도면 그것 없이도 싸울 만했다.
장기전이면 곤란하지만, 적어도 반나절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여차하면 용병들에게 철저한 농성으로 전법을 바꾸도록 한 뒤 각오하고 뛰어드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고.
하지만 무엇보다 곤란한 건 저런 괴물들 따위가 아니었다.
“……이런.”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레밀린이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자, 검은 잔상이 턱을 아슬아슬하게 스친다.
“83기생 양 페이. ……과연 양 가문의 비전 무예는 성가셔.”
기습적으로 발차기를 날린 소녀를 훑어보며 레밀린은 중얼거린다.
곳곳에 포위하듯 숨어 있는 학생들의 존재 역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올딘 켄스, 리니아 벨튼, 미켈 알로스.”
그 외에도 정신 지배를 받고 있는 신입생들을 확인하며 그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이 아닌 본래 회장으로서 파악해 두고 있는 것.
“흥, 애들을 이용해서 덤비면 내가 주저할 거라고 생각했어?”
발끈하듯 조금 전 기습을 걸어온 양 페이가 재차 덤벼들었다.
전신에서 날카로운 검은 바람을 휘감으며 기이한 움직임과 함께 연거푸 주먹을 뻗어 온다.
“약해.”
그것을 레밀린은 간단히 맨손으로 받아 낸다.
날카로운 권풍이 레밀린의 손바닥 안에서 굉음을 일으키다가 소멸한다.
“……!!”
“학생회에 도전하는 건 아직 2년은 일러.”
여유롭게 말하며, 레밀린은 살짝 떠밀 듯 막은 손을 놓아 주었다.
재차 양 페이가 덤벼들려는 순간, 그녀의 머리에 떨어진 것은 레밀린의 발뒤꿈치.
“얌전히 있어.”
콰앙! 그대로 정수리를 강타당하며 양 페이는 지면에 얼굴을 처박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아카데미 학생을 무사히 보호하는 게 자네의 의무라고 하지 않았나?”
“이게 보호예요.”
압도적인 힘으로 때려눕히는 보호.
“일격에 제압하면 위험할 것도 없을 테니까요.”
레밀린은 그대로 기절한 소녀를 포박하고는 적당히 걷어차 후방으로 보냈다.
정신 지배를 당장 풀진 못해도 한나절쯤 물리적으로 꼼짝 못 하게 해 두면 되겠지.
“바쁘니 한꺼번에 덤벼. 햇병아리들.”
의지는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그 도발에 넘어가듯 나머지 신입생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가장 먼저 리니아가 내뻗은 검은 일부러 피하지 않았고.
무려 이빨로 깨물어 그 검을 받아 내었다.
“흐으려.”
느려, 라고 새는 발음으로 놀리듯 말하고 리니아를 걷어차 위로 날려 버린다.
동시에 좌우에서 들어오는 공격 역시 일부러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 한 손만으로 그 협공을 전부 막아 내고는 각각 일격씩 되돌려 준다.
의식을 잃은 채 공중에서 떨어지는 리니아를 가볍게 받아 내려놓는 사이, 이미 포위했던 아이들은 더는 꼼짝도 못 한 채 그대로 뻗어 버렸다.
“유감이야. ……거기에 애들이랑 싸우는 건 익숙하거든.”
만약 뒤탈 없이 가장 잘 팰 수 있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카데미의 철부지들이라고.
“회장 자리에 앉아 있으면 말이야. 신기하게도 주먹이 나갈 때가 많아요. ……진짜.”
아무래도 한창 혈기가 왕성한 나이대이기에.
거기다 레밀린의 출신을 고려하면 그녀를 우습게 보거나 도전 정신을 불태우며 그녀에게 덤비는 바보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마찰을 피하겠지만.
레밀린은 학생회장의 임기 동안, 그 도전을 시간이 허용하는 한 전부 받아 주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주먹이 더 빠르다는 걸 깨달았거든.”
덕분에 이 나이대의 아이들 정도라면 후유증 없이 무자비하고도 무탈하게 패서 기절시키는 것 정도는 숙달되어 있었다.
“애들을 이용하면 내가 방심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거기다 백작에게 넘어간 아이들을 확보하는 데 집중할 여유도 있었다.
레밀린이 아이들의 확보를 우선시하는 사이, 그 틈을 노리듯 몬스터들이 덤벼들고자 했지만.
그 순간, 모든 몬스터가 산산조각이 났다.
주변을 활보하며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것은 한 마리의 언데드.
어린 흑마법사 엔티가 사역하고 있는 특제 언데드.
마스터 와이트.
“……무심코 공격할 뻔했네.”
명령대로 몬스터만을 도륙하는 언데드를 흘겨보며 레밀린은 식겁한 듯 중얼거렸다.
저것 또한 이 방어전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요긴한 전력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