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211화
본래의 시나리오대로 3장을 진행한다면 순서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공간 전이에 휘말린 이들을 수습하여 거점을 꾸린다.
그 거점을 노리는 몬스터들의 공격을 방어하며 틈틈이 필드를 탐사하여 원흉이 있는 장소를 찾아내어 공략해야 한다.
‘내가 그 짓을 왜 해?’
방어는 다른 녀석들에게 시키면 그만.
길을 찾으려고 고생할 필요는 없어졌다.
저 녹의 시조와 만난 덕분에.
그를 만난 시점에서 잘만 설득하면 바로 샛길을 뚫어 줄 테니.
그렇게 나는 바로 목적지로 날아왔다.
폐정령계의 중심.
버려진 정원 성.
그 최상층까지 바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걸로 뵙는 것은 두 번째라고 해야겠군요. 이닐스 백작님.”
“……역시 자네가 시안이었나?”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와 레밀린이 이야기를 나눌 때 옆에서 듣는 시늉만 했으니까.
사실상 초면이나 다름이 없으리라.
이닐스 줄렛.
이닐스 백작이라고 불리는 그 사내는 제단 앞에 선 채로 나를 맞이한다.
마치 등 뒤에 있는 것을 지키려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의외로 차분한 소년이군.”
“그 어둠의 정령이나 원로가 무슨 소릴 지껄였는지 알 만하군요.”
나를 무슨 미친개처럼 보이는 건 죄다 물어뜯는 냉혈한으로 묘사했을까.
나는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데, 묘하게 평판은 다르단 말이지.
“그러니 먼저 권고하죠. 투항하십시오.”
나는 지팡이를 겨누며 경고했다.
의미가 없는 짓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의 눈빛을 보면,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거절할 것을 알고 있잖나.”
“그렇죠.”
처음 보았을 때와 비교하면 인상이 제법 초췌해졌다.
이곳에서 고생할 건 아니었을 텐데.
아마 정신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겠지.
“등 뒤의 그것 때문입니까.”
“…….”
지팡이를 겨누자, 그는 몸으로라도 막겠다는 듯 막아선다. 의미가 없을 텐데.
지금의 그에게 전투력은 거의 없다.
원로 로벨타스가 준 아티팩트 혹은 어둠의 정령에게서 나름의 방어 수단은 받았겠지만.
그게 내게 통할 리 없었다.
“피레일 줄렛. 그 선배의 이름인가 보더군요.”
“레밀린 밀디오른에게서 들었나?”
“아뇨. 회장은 끝내 제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황제에게 밉보일까 봐 배려한 거겠죠.”
묻지 않아도 대강은 알고 있다.
자세한 전말은 몰라도 인과 정도는 알 수밖에 없었다.
“어둠의 정령이 당신에게 피레일 줄렛의 소생 지식이라도 알려 주겠다고 약속한 겁니까?”
그것밖에 없겠지.
본래의 시나리오와 과정이 다르지만, 결국 그는 그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른 점이라면, 어둠의 정령의 관여가 좀 더 노골적인 된 것뿐.
본래는 어둠의 정령이 보낸 하수인에게 속아서 일을 저질렀던가?
“헛된 짓이라고 말할 셈인가?”
“예. 당연하죠.”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를 운운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가망이 없습니다만.”
“무슨 헛소리를?”
“허튼소리가 아니란다, 인간.”
나 대신 대답한 것은 멋대로 모습을 드러낸 에밀리였다.
“……악마인가?”
“안쓰러우니 지적해 줄게. 네 뒤에 있는 것은 단순한 흙투성이의 뼈에 지나지 않아. 거기에 영혼은 없단다.”
“……영혼인가.”
모르진 않을 것이다.
“죽은 자의 혼은 세계에 환원되어 순환하고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하죠. 이건 흑마법사이기에 보증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사령술조차 그 영혼 본인을 사역하는 기술이 아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죽지 않은 자의 영혼을 끄집어내 사역하는 지식 또한 존재하나 그것은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미 저 시체의 주인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니까.
“악마의 눈에는 그 혼의 흐름이 보이지. ……이미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딴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미 알고 있잖습니까, 백작.”
우리들의 지적을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우리들을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그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는 듯한 절망적인 눈.
“그 정령의 말대로 해 봐야 당신은 더욱 후회할 뿐입니다. ……거기서 태어나는 건 당신의 딸이 아니라 결국엔 그 정령이 만들고 싶어 하는 괴물일 뿐이니.”
과정은 세세히 달라졌으나 결과는 같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중단을 촉구했다.
포기하기만 하면 상관이 없을 테니.
하지만.
《제1조건 이닐스 줄렛의 처치》
변하지 않는다.
변할 수 없다.
“그렇다면 후회하고 파멸하겠다.”
“제정신입니까?”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 끔찍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이용하여 황제에게 보여 주겠다.”
“……바보 같긴.”
결국은 복수.
평민들을 향한 증오와 황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각오를 굳힌 것이다.
심정은 알지만, 공감해 줄 순 없었다.
“그럼 별수 없군요.”
더는 설득할 생각은 없다.
주인공이라면……. 아니, 게임이라면 몇 번을 끈덕지게 설득하려 하겠지만.
현실은 달라.
이미 각오한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으니.
“힘으로 막을 수밖에 없겠군요.”
겨눈 지팡이에서 흑염을 쏘아 낸다.
막을 수단이 없는 이닐스 백작은 끝내 눈을 감으면서까지 물러나지 않는다.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듯.
“……칫.”
나는 혀를 찼다.
저 사내의 고집 때문이 아니다.
쏘아 낸 흑염을 가로막은, 검은 안개 같은 물체 때문.
“역시 있었나?”
[본체를 도발한 건 좋지만, 잊으면 안 되지. 흑마법사 시안.]
어둠의 정령의 분신.
백작이 끝내 물러나지 않은 것은 이곳에 분신들을 심어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분신 따위로 지금의 나와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해? 망할 정령?”
[어림도 없겠지. 감탄할 정도야. 설마 고작 반년도 못 되어서 이 정도로 성장할 줄이야.]
고맙지 않은 칭찬이다.
분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주변에 족히 수십 마리의 분신이 꾸물거리며 기어 나온다.
시간 벌이.
“이닐스 백작, 마지막 경고야. 거기서 떨어져. ……파멸하기 싫다면.”
“걱정은 이해하나 소용없네. ……이미 내 인생을 파멸했다.”
“멍청하긴!”
골창을 쏘아 내나 역시나 분신들이 막는다.
메인 시나리오 3장의 보스전의 시작되리라.
[그럼 어쩌겠나, 이닐스 줄렛.]
“물을 것도 없다. 사악한 정령이여. 네가 나를 속이려 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래, 모든 것은 거짓이야. 저 소년의 말대로지.]
“상관없다. 그렇다면 약속해라.”
[무엇을?]
히죽이는 어둠의 정령의 악의 앞에서 이닐스 백작은 초췌한 얼굴로 오로지 눈빛만을 광기로 번뜩이며 말했다.
“파멸시켜라.”
[어떤 것을?]
“전부.”
그의 허락에 어둠의 정령의 건방진 웃음기가 멈춘다.
그 괴물은 인간을 조롱하는 악의를 이 순간만큼은 거둔다.
일부러 파멸을 택한 인간에게 최소한의 경의라도 보내듯.
[그럼 그 선택을 이루어 주마. ……가엾은 인간.]
그 순간.
어둠의 정령의 분신 중 하나가 이닐스 백작의 심장을 꿰뚫는다.
“크흑!”
[고통스러울 것이야. 후회하겠지.]
“……상관없다.”
그 말만을 남기고 절명한 백작에게서 어둠의 정령은 어떤 것을 거둔다.
“……혼이네.”
흩어지지 않도록 인간에게서 회수한 혼.
폐정령계에서 사망한 자의 혼은 더 이상 세계에서 환원되어 순환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곳의 주인인 어둠의 정령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
“역시 필요한 건 인간의 혼인가.”
[맞아. 숫자는 부족하지만. ……뭐, 차츰 늘려 가는 것도 즐겁겠지?]
분신이 몇 개의 혼을 더 꺼낸다.
거점에서 농성 중인 자들의 것을 회수한 것은 아니리라. 지금 그들을 죽이지 못해서 고전하고 있으니.
그렇다는 건.
“로벨타스나 그의 제자들의 것이겠군.”
[정답이야.]
인과응보.
사악한 의식을 하려던 이들은 반대로 자신의 목숨과 영혼이 그 금기에 이용되었다.
그것만큼은 동정할 가치도 없으리라.
[그럼 만들어 보자.]
“……무엇을?”
[알고 있지, 소년?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
[몰랐다고 해도 그 가증스러운 시조에게 들었을 거야. 그렇지?]
알고 있고, 직접 듣기도 했다.
어둠의 정령이 원하는 것.
그토록 미련을 가지는 것.
“동족이냐? ……아니, 네 존재를 긍정할 근거.”
[그래!]
어둠의 정령은 녹의 시조의 그릇된 소망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탄생하고도 그 존재 의미를 부정당했다고 한다.
정령왕에 속하면서도 결코 인정받지 못한 이유.
자연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무엇보다 미쳐 있었기에.
[나와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가득해지면 싫어도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까?]
“멍청한 소릴.”
[너희 인간에게 듣고 싶진 않아.]
“인간이니까 욕하는 거지. 멍청이는 멍청이를 알아보거든.”
어둠의 정령이 바라는 것은 자신과 동격의 존재를 만드는 것.
비참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너희 인간은 잘도 그런 끔찍한 것들을 생각한단 말이지.]
분신이 몸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낡은 책이나 아티팩트 같은 것들.
전부 인간이 만든 것들.
“……금지된 지식.”
[긴 시간 동안 너희들이 하는 일을 지켜봤어. 그리고 그 지식을 훔쳤지.]
금기를 학습하며 더욱 비뚤어져 갔다.
인간을 조소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게 바로 어둠의 정령 밀레이토스.
[덕분에 만들 수 있게 되었어. 나와 마찬가지로 인정받지 못할 금기된 존재를.]
타인의 증오에 편승하여 유도하고 그때를 노린 것이다.
인간의 혼을 이곳에서 모아 괴물을 만들기 위해.
[시안, 네 혼도 제물로 삼아 줄게.]
“거절하지. 난 종족을 변경할 마음이 없거든.”
흑염을 재차 쏘아 내나 당연한 듯 어둠의 정령의 분신들이 뭉쳐서 막아 낸다.
무리하면 억지로 뚫어 낼 수 있겠지만, 보스전을 생각하면 지금은 힘을 아껴 두는 게 좋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
[탄생하렴. ……나의 아이.]
인간의 시체에 원망을 품은 혼들을 흘려보낸다.
그리고 어둠의 정령의 분신 일부를 뭉쳐 빚어내고.
또한, 납치한 정령과 정령사에게 빼앗은 요소를 심겠지.
그것들을 엮는 것은 녀석이 수집한 금기된 지식들.
어둠의 정령의 웃음소리가 사라진다.
만들어 낸 결과물이 모든 분신의 에너지를 먹어치운 것.
본체는 아마 셀리디아가 있는 쪽에 집중하고 있을 테니.
“탄생했네. 괴물.”
“알아.”
《증오의 정령》
바뀐 3장의 보스.
과정은 세세하게 달라졌지만, 결국에는 이곳에서 탄생한 괴물을 두고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조건이 갱신됩니다.》
《제1조건 증오의 정령 토벌》
이닐스 백작이 사라지고 대신 남은 저 괴물을 없애라는 뜻.
“처리하자.”
우선은 흑염탄을 몇 개 날려 반응을 보도록 하자.
아직 제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는 증오의 정령.
녀석이 끊임없이 형상을 바꾸는 사이, 내가 쏘아 낸 흑염탄이 날아든다.
본래의 녀석이라면 지금 내가 쏘는 마법에 대미지를 입을 터.
그러나.
[캬아아아아아악!]
증오의 정령의 몸체에서 수많은 입과 이빨이 돋아난다.
그것을 갈며 녀석이 괴성을 지르자, 녀석의 주변에 여러 마법진이 전개된다.
“마법?”
내가 중얼거리는 순간, 그 괴물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수많은 마법의 탄환들이 내가 쏘아 낸 흑염탄과 부딪쳐 상쇄시킨다.
“……그래, 그 정도의 능력이라는 거군.”
본래 게임 시절, 저 괴물의 능력 사양은 약 35레벨 정도.
하지만 지금은 더욱 막강해졌다.
어둠의 정령의 직접적인 개입 덕인가.
약 50레벨 수준으로 짐작이 되는군.
“역시 내가 직접 처리하러 온 게 정답이었어.”
정석적으로 공략하려 했다면, 틀림없이 애를 먹었을 테니.
“여기서 토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