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화
330화
44장 - 악의 마법사
일단 악마들의 은신처에 머물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해했다.
몇 번이고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나는 머릿속에 이해한 결론을 입에 담았다.
“마왕 주제에 일개 흑마법사한테 털리다니. ……창피한 줄 알아야지.”
“놀리는 거냐?”
“놀리는 거지.”
꼴좋다면서 크게 웃는 척 한 번.
뭐, 장난 같은 것이고 켈니오스도 그 의도를 뻔히 알기에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아니, 짜증을 낼 처지가 아니란 것이겠지.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돌아서면 상당히 아쉬운 입장이라는 건가.
“이해한 게 맞는다면, 지금의 흑철의 마왕은 검은 시조에게 그 존재를 강탈당한 상대라는 거지?”
“틀리지는 않을 거다. ……검만 휘두른 몸이라 마법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게 되나?”
“그 정도 흑마법사라면 가능하겠지.”
악마가 계약한 흑마법사의 육체를 빼앗는 위험성은 익히 잘 알려져 있지만.
반대로 일개 흑마법사가 마왕을 빼앗은 건가.
적만 아니라면 칭찬해 주고 그 방법을 배우고 싶다.
“요컨대 그 붉은 물을 마계에 흘려보낸 것도 검은 시조. ……그것을 어떻게 써먹은 것인지 몰라도 마왕을 지배할 정도까지 되었다는 거군.”
“붉은 물의 출처는 극히 일부의 악마들만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럼 왜 이 사달이 나기 전에 놈을 처치 안 한 건데?”
심지어 검은 시조는 흑철의 마왕의 영지에 숨어 있었다.
멋대로 숨어 지내는 것이었지만, 작정하면 못 찾을 것도 없었을 텐데.
뻔하다. 알고서도 방치를 한 것이다.
방심했거나. 혹은 이용하려 했거나.
“놈의 은둔을 묵인한 것도 흑철의 마왕이지? ……솔직히 내가 봤을 땐 그 꼴 난 게 자업자득으로만 보이거든.”
“끙……. 이 몸 역시 몇 번이고 각하께 말씀드렸지만, 같은 말을 다른 녀석에게 들으니 씁쓸하군.”
놈의 반응을 보아하니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알면서도 손대지 못한 건가.”
“놈의 골통을 부숴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그게 영 쉽지 않더군.”
“뭐 때문에?”
“놈이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었으니.”
마왕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는 이유.
“놈은 각하의 영지에 멋대로 은신처를 만들더니 먼저 찾아와 제안했다.”
“제안? 무엇을? ……아, 설마?”
악마가 혹할 만한, 하물며 마왕마저도 무시 못 할 교섭 재료라면 한정되어 있으니.
“격상의 열쇠.”
그것을 켈니오스는 그렇게 불렀다.
“…….”
“놈은 마계에 온 이유를 그리 말했더군. 마계와 악마를 이해하고 그 근간을 손에 넣어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겠다고.”
“꿈 한번 야무지시네.”
하지만 놈의 목표만으로 마왕이 편의를 봐주지는 않았을 테니.
“악마의 진화를 약속했지?”
“그것밖에 없지! 꽉 막힌 악마들에게는 그것 이상의 교섭 재료는 없을 테니.”
켈니오스는 시원스레 인정했다.
격상의 열쇠. 그것은 흑마법사인 검은 시조가 가장 마지막에 매달린 이론.
악마는 물론이고, 인간마저도 보다 다음의 단계로 나아가게 해 준다는 공상 같은 소리.
“마왕이 그런 것에 넘어가다니…….”
“마왕이라고 그 소망이 간절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애송아. ……오히려 마왕이기에 더욱 골치가 아픈 것이겠지.”
마계는 정체되어 있다.
마왕을 능가하는 악마는 나올 가망도 없었고, 하물며 정체가 계속되면 언젠가 쇠퇴할 터.
굳이 마계를 멸망시키고 있는 붉은 물이 아니라도 언젠가 몰락하는 것은 기정사실이겠지.
“바닥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는 존재보다 그 천장에 닿아있는 놈이 더욱 막막한 법이다.”
“배부른 헛소리야. ……그래서 흑철의 마왕은 검은 시조를 이용해서 마왕 이상의 존재를 꿈꾼 거고?”
그리고 뒤통수를 맞았다.
“각하는 놈이 수상쩍다 싶으면 골통을 두 쪽을 내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방심한 거네. 설마 인간 흑마법사가 실력으로 마왕을 제압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
자업자득이고, 내가 비웃을지언정 거기에 참견할 필요는 없었다.
자기들이 망하지 내가 망하나.
“그건 솔직히 웃기는 소리네? 후후후훕! 마왕이 인간 흑마법사한테 당하다니.”
봐라. 에밀리도 듣고 뒤에서 꼴좋다는 듯 폭소한다.
쟤 진짜 마왕을 싫어하는구먼.
당연히 마왕의 권속 악마들은 그런 반응을 보고 우리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지만.
“그래서 어쩌자는 거니? 마왕의 비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한심이들아?”
어쩐지 에밀리가 위협하자, 고개를 돌린다.
……악마의 미래는 저걸로 괜찮은 건가.
켈니오스조차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계약한 악마의 성격 한번 걸작이군. ……하긴 저거라면 당연한가.”
“무슨 소리야?”
“아, 네 악마가 노려보니 말 안 하련다. ……그것보다 이쯤 되면 무슨 말을 할지 알겠지?”
“협력하자고? 안 할 건데?”
“이 자식이…….”
보통은 거기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겠지만.
정의감도 없고, 솔직히 마왕의 안위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었다.
거기다 너희 때문에 고생한 적도 있고.
“생각해 보니 협력보다는 마왕의 몰락을 축하라도 해야 하나?”
“……이봐, 애송이. 농담할 상황이 아니라 이대로라면.”
“마계가 끝장난다고?”
“……큭.”
“마왕을 손에 넣고 노리는 건 틀림없이 마계를 완전히 붕괴시키기 위한 거겠지.”
알고 있다.
비록 마왕이 검은 시조에게 패한 것은 게임에서는 없었던 사양이지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게임에서도 언급되었기에.
“이미 정보는 충분히 알고 있어. 내가 궁금한 건 마왕과 검은 시조의 관계뿐.”
“알고 있었냐…….”
“마왕을 손에 넣어서 마계의 중추로 향하고자 하는 거겠지. 그리고 놈은 그 통로를 찾느라 영지 내를 파헤치고 있었겠지?”
도중에 내가 찾아오자, 나를 척살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은 모양이지만.
결국, 노리는 것은 그것이다.
검은 시조는 마계를 멸망시키고자 온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해 얻을 무언가를 위해서.
“근데 말했다시피 나는 인간이야. 악마들이 몰락을 하든 말든…….그게 나랑 뭔 상관이냐?”
일부러 비열하게 웃는다.
“이봐, 거기 누님? 네 계약자가 이리 말하는데, 악마로서 한마디 안 해 주냐?”
“으음~. 조금은 매정하다고는 생각하는데, 시안 말이 맞거든. ……그리고 나도 솔직히 이 바보들이 어찌 되든 아무래도 좋고.”
악마인 에밀리 역시 마계에 별다른 애착은 없나 보군.
“오히려 이 누나는 그 중추라는 게 신경 쓰이는데? ……소문은 들었어. 마왕에 도달한 악마만이 출입할 수 있는 마계의 근간.”
“아, 그거? 존재해.”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마계의 약점의 존재를 인정했다.
마계의 얼마 남지 않은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마왕 셋.
마왕이라는 것은 결국 마계 관리자의 위치까지 오른 존재라는 것.
그 경지에 도달한 악마는 마계의 어떤 핵심적인 장소의 존재를 알게 된다던가.
중추라 불리는 곳.
마계의 심핵.
우습게도 이 마계는 마왕에게 삭제 스위치까지 줘 버리고 말았다.
“마왕을 지배하면 당연히 인간이라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겠지. ……그건 흥미롭네.”
“네놈 성격 참 걸작이군.”
그야 나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악행에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걸 위해서 들인 기술력에 흥미를 갖고 참고하고 싶은 욕구가 먼저 든다.
……성격이 썩었거든.
이렇게 말해도 정말로 멸망까지 시킬 마음은 없지만.
지금 하는 발언도 대부분은 연기에 가깝다.
놈의 말에 무작정 수긍하며 부탁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내가 위, 놈은 아래!
이런 상하 관계를 확실히 굳혀야 한다.
“직접 고개 숙이고 부탁이라도 하길 바라냐, 애송이?”
“설마~. 그래 봐야 누가 좋다고? 그것보다는 확실하게 보수를 정하자고.”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의외로.
“너희 마왕님을 아주 친절하고 난폭하게 구해 줄게. 대신 이것저것 내놔야 할 거야.”
“인간이 악마를 수탈하겠다는 거군. 거참, 아주 걸작이구먼.”
“싫으면 돌아갈 거야.”
아쉬운 게 누구냐?
응? 실은 나네.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했고, 그 망할 시조는 마왕과 붙어먹은 터라 처치하기도 어려워졌다.
거기다 선견의 마왕과 약속도 했고, 어기면 뒤탈이 상당하겠지.
그렇다고 그런 걸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리 말한다고 해도 저 데스나이트가 나를 쫓아낼 일은 없었다.
“……쯧. 당연히 이렇게 말하나. 좋다! 어지간한 건 지불해 주마!”
“오~! 통이 커서 멋진데, 그거 네 멋대로 정해도 돼?”
“괜히 흑철 각하의 밑에서 오래 머리를 숙인 게 아니다. 애송아.”
“과연 2인자다운 말인가.”
지금 마왕이 저 꼴이 된 이상, 그다음 가는 힘을 지닌 것은 정작 악마가 아닌 일개 해골에 불과한 저것.
악마들도 이 대화를 들으면서 감히 참견하지 못한다.
힘의 차이에 굴복하여 모든 결정권을 떠넘기는 것.
“마왕의 등골이 휠 정도로 요구하지는 않을 거야.”
“원하는 건 뭐냐?”
“바라는 걸 조금 챙겨 갈 수 있는 권리랑…… 이번 일을 계기로 나한테 향후 적의를 보이지 말 것.”
“적의? 하하, 그렇군. 하긴, 이런 일이 아니라면 마왕님은 네놈을 후려쳤을 테니.”
“혈목 사건 때문에?”
그게 그렇게 분했나? 게임에서는 딱히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쪼잔하다고?
“뭔 개소리냐. 하아……. 원래는 이것부터 말하려 했다만, 마왕님이 그 흑마법사에게 패배한 건 네가 한 짓이 결정타였다.”
“응?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언제 마왕의 뒤통수를 후려갈겼지? 마계에 온 지 이제 일주일 좀 넘었거든?
게임에서는 몇 번이고 팼던 마왕이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초면이거든요?
어이없어하는 내 머릿속에 스친 것은 다른 이유.
“설마……. 혈마력?”
“정답이다.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하더군.”
흑마법 클래스의 졸업생.
모니아.
그 흑마법사가 만든 비기, 진마빙현제.
최근에는 쓰지 않고 있었지만, 한때는 몇 번이고 거듭해서 썼을 정도의 강화 스킬.
“그게 그렇게 치명적이라고?”
“몰랐군. 상당한 양을 빼앗아 갔다고 들었다. ……망할 자식.”
검은 시조의 건이 아니었다면 내가 마계에 오자마자 흑철의 마왕과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을 거라고 한다.
“단순히 힘을 일방적으로 빌리는 비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몰랐군. ……그 비술. 정작 마왕님 본인은 이리 설명하더군.”
“……뭐라고?”
조금 흥미가 생겨서 내가 대답을 채근하자, 데스 나이트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마왕을 죽이기 위한 비술.”
아무래도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터무니없는 의도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 * *
비슷한 시각.
제국 필로스 아카데미.
흑마법 클래스의 담당 교수 다니엘의 개인실.
“잠깐?! 잠깐만요, 모니아 선배?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다니엘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면서 방금 들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 반응은 뭐야, 다니엘? 네가 물어봐서 정직하게 말했거든. ……보통은 흑마법사한테 연구 의도를 캐묻는 건 실례잖아.”
그녀를 경악시킨 사실을 알려 준 것은 현재 다니엘과 마주하고 있는 흑마법사 여성.
전 아카데미 졸업생.
모니아.
탁하게 물든 금발을 대충 쓸어 넘겨서 정돈하며 그녀는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것보다 모처럼 선배랑 재회한 후 한다는 게 고작 그딴 질문이냐?”
“그딴 질문이라뇨? 애당초 모니아 선배가 제대로 치우지도 않고 간 것 때문에…….”
“아, 진마빙현제 초안 말이지. 확실히 그거 내가 쓴 거고, 의도도 지금 말한 게 맞아.”
“마왕을 죽이기 위한 거라니…….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 마왕의 힘을 분산시켜 약화하기 위한 이론으로 구상한 거거든. ……뭐, 나는 정작 못 익혀서 처박아 두고 잊어버렸지만.”
“……그걸 잊어요?”
다니엘은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마왕을 죽이기 위한 아이디어라니. 평범한 흑마법사가 할 수 있는 발상이 아니었다.
“그걸 묻는 건 혹시 썼냐? ……넌 아닌 거 같고, 여기 재학 중인 학생이군.”
모니아의 눈동자가 흥미를 머금고 번뜩인다.
“그놈은 못 봤는데, 어디에 있어?”
“아카데미에는 없어요. 유감스럽게도.”
“그러고 보니 분명 여기 올 때 자료에…….”
모니아는 적당히 근처에 내팽개쳐 둔 서류를 집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명목은 흑마법 클래스의 임시 보조.
당연히 학생의 현황을 알아야 하기에 서류로 받았을 터.
“마계 원정? 하하하핫! 진짜냐! 걸작이네! 설마 졸업 전에 마계까지 기웃거리는 놈이 있을 줄이야.”
“웃을 일이 아니에요.”
“좋잖아. 마계. 너도 나도 상상도 못 한 일이고. ……이야, 더럽게 부럽네. 이럴 줄 알았으면 졸업 후에 너처럼 교수로 남을 걸 그랬나?”
“저 화냅니다?”
모니아는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들고 흔들었다.
“……하아, 그런데 왜 그런 걸 연구하셨죠?”
거기다 진마빙현제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시안에게 듣기로는 말도 안 되는 연구를 거듭하던 모양이고.
의도를 물어야 한다.
“뻔하잖아. 흑마법의 진취를 위해.”
“무슨 뜻이죠?”
“흑마법사는 어떤 식으로든 보다 높은 경지를 노리지. 그건 너도 다르지 않을 거야.”
“아하하……. 그러네요.”
다니엘은 뭔가 찔리듯 시선을 피한다.
진취?
최근에는 아카데미 업무에 치여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요?
“모니아 선배의 목표랑 무슨 상관 있어요?”
“악마의 약탈.”
“……네?”
멍하니 이해하지 못해서 아니, 상상하기 싫었기에 반문하자.
“악마에게 모든 것을 빼앗는다. ……그게 내가 한때 지향하던 목표였거든. ……어떤 자가 남긴 것을 우연히 입수해서 얻은 영감이지.”
“누구죠?”
“흑마법사라면 모두가 아는 자.”
모니아는 손아귀에서 검은 마기를 피워 올린다.
검은색.
“검은 시조. 체피네올 인더닐. ……그 위인이 포기했던 이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