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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 이제 그만 입 좀 다물게나. 그렇게 넋잃고 바라보니 내가 무안하잖아.」하고 2m
의 장신 사내는 주위를 보면서 안절부절했다. 신전을 찾은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을, 정
확히는 침이라도 흘릴 듯 입을 헤 - 하고 벌리고 벤치에 앉아있는 청년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헤모, 내가 바라보는 건 그대가 아니라 백색 거성 베르니우스란 말입니다. 무안
하려면 베르니우스가 무안해야지요.」
갑자기 눈빛을 날카롭게 세우고 정색을 하면서 대답한 시즈는 곧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왕
성을 보며 다시 넋을 잃어버렸다. 무릎에 놓인 찻잔을 쏟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끔 햇살에 나긋해진 고양이처럼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능숙하게 차를 홀짝거리는 모습은
20대의 청년이 아니라 60살은 먹은 노인처럼 보였다.
「이제 몸은 좀 어떤가?」
「파우텔 대승정님, 새벽에는 무례했습니다.」
이미 그들와 안면이 있었던 노신관은 헤모의 인사에 미소로 대답하며 턱끝으로 시즈를 가
리켰다. 시즈는 대승정이라는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며 찻잔을 안정된 자세로 받쳐든 채 만
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헤모는 기겁을 했고 파우텔은 고개를 두어번 졌더니,
혼란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저러나?」
「예? 예. 불행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방금 전에 깨어나서 계속 저 상태입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선 파우텔은 시즈가 놀라지 않게 어깨를 두들겼다. 스르르 하고
뱀이 고개 돌리는 듯이 시선이 노인을 향하자, 파우텔은 청년의 탈속한 듯한- 사실은 안경
이 없어서 눈이 잘 안보여 눈빛이 흐릿한 것이었다. - 시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멋지죠?」하고 대끔 던지는 한 마디, 온화하고 침착하기로 소문난 대승정은 자신을 보
자마자 무엇인지 모르지만 〈멋지죠?〉하고 내뱉는 한 마디에 당황하고 말았고, 다시 시즈
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헤모의 말에 따르면 지금에서야
왕성을 봤다는 말일텐데 그런 그는 지금 40년을 수도에서 살아온 대승정가 처음 베르니우
스를 본 사람인양 질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일, 파우텔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그렇군.」
「흠, 그러고 보니 깨어나서 아무것도 못 먹었군요. 헤모, 식당이 어디죠?」
「아아…. 따라와.」
〈그,그게 전부인가?〉하고 묻고 싶었지만 느릿느릿하게 걸어가는 그 둘의 모습은 어느
새 건물 안을 들어서고 있었다. 파우텔 대승정은 눈을 크게 뜬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즈가 앉아있던 벤치에 털썩하고 힘없이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가,강적이군.」
시즈의 상세는 잠을 위해서, 죽을둥 살둥 신성력을 쏟아넣었던 신관들의 노력에 힘입어 3
일도 못되어 완치되었다. 시즈는 생글거리며 한 주먹의 금화를 내놓았고, 그의 허름한 옷차
림에서 금화가 나올 줄 몰랐던 신관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받아들였다.
「레이모하의 뜻에 따라 헛되지 않게 쓰겠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는 한 사제의 말에 시
즈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레이모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겁니다.」
그 말에 사제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지만,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시즈, 왕립도서관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었지. 이것은 레이모하와의 관계를 증명하는 신
분증이네.」
「저는 신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모하를 믿는 이들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형제라네. 그런데 이제 어디
로 갈 생각인가?」
「우선 세이탄에 자리를 잡을 생각입니다. 한 여행객의 얘길 들으니 그곳이 제법 살만한
모양이더군요. 헤모 사제님, 파우텔 대승정님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하며 시즈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헤모의 듬직한 장신을 껴안았다. 주위의 신관들이 감동스러
운 듯 웃음과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시즈는 눈가에 눈물을 담고 물러서며 말했다.
「이것은 특별히 사제님께 드리기 위해 로나린 신관께 특별히 부탁해서 탄 차(茶)입니
다.」하고 그는 옆에 서있던 여신관이 준비하고 있던 차를 받아서 내밀었다. 로나린 신관은
시즈가 헤모에게 다가가자, 감동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시즈님께서 그 차를 끓이는데 꽤 고생하셨어요. 전 끓이기만 했는 걸요.」
은은한 보랏빛이 도는 액체는 담담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향기를 가지고 있었다. 찻잔을 열
자 풍기는 향기에 신관들은 부러운 표정을 지었고, 헤모은 시즈와 차를 번갈아보며 쑥스러
운 웃음을 짓더니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댔다.
「아니, 차는 음미하면서…!!」
「괜찮습니다. 마셔주시기만 해도 전 감사합니다.」
시즈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섭섭한 표정이었다. 그는 억지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신전을 떠났다. 그가 가려는 곳은 제플론에서 10 마일 정도 떨어진 마을, 세이탄으로 맞닿
아있는 멜라누 숲은 많은 호수가 곳곳을 장식하며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는 곳이었다.
혼잡한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고 경치까지 수려한 세이탄은 왕족들이 자주 이용하는
별궁지로도 이름이 높아 마을의 상업 또한 상당히 발전한 축에 속했다. 시즈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입지조건이었다. 그가 두시간쯤 지나서 마차로 세이탄에 도착했을 무렵, 그가 떠나
온 신전에서는 엄청난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신전을 떠나고 잠시 후….
「끄아아아아아아악!!」
「헤모 사제!! 정신 차리게! 누,누가 좀 말려봐!!」
죽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건물을 부숴대는 헤모의 모습은 검푸른 빛을 띄고 있어 광전사나
다름없었다. 파우텔 대승정이 손짓발짓하며 신관들을 동원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도망가기
바쁠 뿐이었다.
「그는 성투사입니다. 잘못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어요!」
「으아아아! 살려줘어어!!」
바닥을 구르고 벽을 부수고 분수대를 망쳐대는 그가 얌전해진 것은 수도에서 쉬고 있던 다
른 성투사들이 신전에 도착하고서 였다. 성투사 중에서도 특히 월등한 실력을 가진 헤모의
발광을 막아내는 것은 성투사들로서도 힘겨운 일이었고,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제압한 것이다. 땀을 흘리며 신관과 성투사들이 바라본 헤모의 손발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이건….」
「클러드낫이 아닌가! 게다가 과도복용이라니!」
성투사들이 놀라는 경악하는 동안, 파우텔 대승정은 멍하니 베르니우스를 바라보던 누군
가를 떠올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역시 〈강적〉이었어….
「그러고보면 조금씩 마실 줄 알고 독초량을 좀 많이 넣었는데 그걸 다 마시다니…. 기분
이 새롭겠군. 발악을 하지 않을까?」하고 세이탄의 음식점에서 스프를 마시고 있던 시즈
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신전 수리비는 충분히 주었으니까….」
그 미소가 어찌나 순진하게 보이는지 아르바이트를 하던 소녀는 천사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