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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저택 앞의 바위 위에 앉아있었다. 낮은 온도의 호수가에 아침햇살이
비치면 그의 저택 근처는 완전히 안개의 세상을 이루곤 했다. 그 가운데 무심한 눈길을 호
수를 넘고 산을 넘고 어딘가의 먼 하늘을 보고 있었다. 빌리는 말을 걸면 죄를 받을 것 같아
살그머니 부탁받은 것을 바위 옆에 놓아두고 살금살금 뒤걸음질쳤다.
「무슨 일이죠?」
「으악!」
소년은 그가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갑자기 질문을 하자, 놀라 발이 엇갈렸다. 털썩하고 엉
덩방아를 땅에 박자 눈물이 핑 돌았다. 바위에서 내려온 그는 쿡쿡하면서 웃음을 참으며 손
을 내밀었다. 얼굴을 미남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단정했고, 특히 그의 손은 허리에 찬 검이
장식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여자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예뻤다.
「빌리, 괜찮아요?」
「괜찮아요. 시즈님, 저기 누나가 음식을 남게 만드셨다고 가져다 드리라고….」라고 말하
며 빌리는 얼얼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는 손을 뻗어 빌리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가볍게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누나한테도 고맙다고 말해주세요.」
「네에.」
소년은 그의 미소에 아픔도 잊은 듯 밝게 대답하고는 손을 흔들면서 떠나갔다. 빌리가 떠
난 후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위 옆에 놓인 바구니를 열어본 시즈는 중얼거렸다.
「아침밥으로만 5바구니…. 고맙긴 한데 이걸 어떻게 다 먹지? 오늘도 역시 그 방법을 써
야 하려나?」
바구니의 음식을 이것저것 꺼내먹으면서 아침을 해결한 시즈는 자신의 바구니에 따로 음
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점심에 먹기로 하고…. 그럼 가볼까?」
시즈는 마을처녀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대부분은 저택이 완공되던 날,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왔을 때 그의 넬피앙 음률에 팬이 된 여인들이었다. 서로 모여 시즈를 대
화거리로 꺅꺅거리며 수다를 떨곤 했지만 시즈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여자는 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처음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아직도 연출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이유가 컸
다. 아무래도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오! 시즈군, 오늘도 제플론에 가는건가? 지금 갓 구운 빵인데 먹으면서 가게나.」
「어머! 시즈 씨, 오늘도 그 옷인가요? 왕궁에 들락거리는 사람이… 좀 바꿔보는 게 어때
요?」
「시즈님, 오늘도 책이세요?」
그 외에는 다들 시즈가 주위를 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미소만 봐도 기
분이 좋아지는 듯 하달까? 시즈는 마을에서 건실한 학자이자 젊은 현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서제에 들어간 마을 촌장님조차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엄청난 분량의 서적들에 질
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시즈가
엄청난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돈을 빌리러 올 때가 있었고, 이 고마운 청
년은 선뜻 돈을 내주곤 했던 것이다.
그보다도 마을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인기가 있는 것은 노을이 질 때쯤이면 바람을 타
고 들려오기 시작하는 시즈의 넬피앙 연주 때문이었다. 그 시간만 되면 마을 사람들은 일손
도 놓고 음악에 빠져들었고, 뛰어놀던 아이들도 한발 앞서 시즈가 넬피앙을 연주하는 바위
주위에 옹기종기 앉아서 눈동자를 동글동글 굴리며 얌전히 듣고 있는 것이다. 연주가 끝나
면 시즈는 아이들에게 달콤하게 구어진 쿠키- 물론 마을 처녀들이 준 것이었다. -를 나눠주
었다. 그럼 관객들은 쿠키를 토끼처럼 아껴먹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즈, 이제 오나? 오늘은 좀 늦었군 그래.」
제플론에 도착한 시즈가 찾은 곳은 세이탄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왕립도서관이었다. 왕립
도서관은 왕궁 안에 있었기 때문에 책을 절실히 원하는 청년은 왕궁의 정문을 통과해야 했
다. 문지기 병사들은 시즈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반겼다.
「오늘도 수고하시는 군요. 이거라도 드시면서 하시죠.」
「아하하, 매번 고맙군, 그래.」문지기 병사인 모바낙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그가 내미는
바구니를 받았다. 문지기들은 왕궁의 경비를 위해 밤에 교대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침도
먹지 못한 채 일자리로 나와야 했다. 경비병들의 절대적인 환대를 받으며 왕립 도서관에 들
어가자 그가 찾은 책은 우선 수학이었다. 한국에서 이과였던 시즈였다. 엘시크는 한국에 비
해 훨씬 수학적 수준이 떨어지는 곳이었고, 엘시크에서 최고라고 칭송받는 수학자들이 쓴
책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음은 화학이었는데…
「아직 연금술이라고 불리는 시기여서 그런지, 화학과 물리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군.」
그는 화학같은 경우는 한 때 경시대회에 출전한 적도 있었고, 대학교 화학과정인 일반화학
에도 손을 댄 적이 있었던 것이다.(사실 일반화학과 화학2는 깊이만 다를 뿐이지. 내용이
확 다른 것은 아니다.) 이렇듯 그는 엘시크 왕립도서관에서 대부분의 학문을 연구하는 동
안, 한 순간도 손을 떼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였다.
「세일피어론아드, 혼돈의 신과 순수의 신의 싸움에 의해 창조되고 지혜의 신에 의하여 조
화를 이루게 된 세계….」
시즈에게 원래의 세계와 세일피어론아드와의 관계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둘의 연관성은 머리카락만큼도 찾
을 수 없었다.
「…아무대도 없어.」하며 두 세계에 대한 연관성을 찾는 것을 포기한 시즈는 마지막으로
집어든 것은 한국에서는 연구하지 않는 신비의 학문이었다. 흥미를 떠나서 학자로서의 호
기심이 시즈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비의 학문에 대한 서적은 왕립 도서관
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그가 묻자, 왕궁 경비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왕궁 한 구석에 자리한 거대한 건물을 가르키며 말했다.
「마법에 대해 알고 싶으면 〈궁정마법원〉으로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