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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지? 마법을 학문으로 생각하고 연구하려고 한다는 사람이?」
「푸훗…. 말이 되는 소리야!? 재능이 없어서 억울하니까 책이라도 한번 훑어봐야 겠다는
일종의 오기겠지. 룬어나 할 수 있겠어?」
주위의 시선과 비웃음 섟인 속삭임도 책에 빠져버린 청년을 흔들어 놓지는 못했다. 아무
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탐독하고 있는 모습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없다면 자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고요한 모습이었다. 마치 그의 주위만은 아무도 없는 그윽한 숲 속 같았다.
책을 들고 의자에 가서 앉는 시간조차 아까운 모양인지 아무데나 앉아서 읽어대는 그는 바
로 시즈였다.
「안녕하세요.」
시즈가 책에서 시선을 돌려보니 17세 정도의 소년과 소녀가 부드러운 갈색의 시선으로 바
라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동자 색
을 제외하고는 머리색깔이나, 외모 모두 달랐지만 묘하게도 쌍둥이같은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시즈가 〈무슨 일인가요?〉라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갈색 머리의 소
년, 피르트는 청년의 옆에 쌓여있는 책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이걸 모두다 보실 생각이세요?」
시즈가 옆을 보니, 어느 새 읽은 후 제 자리에 껴놓지 않은 책들이 앉은 그의 키가 넘도록
층을 이뤄서 언제 쓰러질지 위태위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을 껴놓지 않아서 그들이 질
책하려한다고 생각한 그는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읽은 것들 입니다. 지금 읽고 있는 것들만 마저 읽고 제자리에 돌려놓겠습니다.」
「그러세요…가 아니지. 이걸 다 읽었다고요? 모두?」
「정말이에요?」
미심쩍은 어조로 긴 청색의 머리를 드리우며 소녀가 물었다. 시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책들은 상당한 독서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시즈도 겁을 먹을 정
도로 엄청난 두께를 자랑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글보다 여백이 더 많아서 실제 내용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마력의 운용같은 활용적인 서적이 아니라, 마법
의 총체적 이론을 정리해놓은 것이었기에 책마다 겹쳐지는 내용이 많았던 것이다.
「역시 헤트라임크 님의 제자라는 소문이 맞는가봐.」
피르트는 자신의 단짝인 소녀, 에리나를 잡아끌고 귀에다가 속삭였다. 시즈가 마법원에
들락거린지 1주일도 안되서 원내에서는 그의 정체에 대한 수 많은 소문들이 떠돌고 있었
다. 대부분 노마법사인 헤트라임크와의 관계설- 제자, 손자- 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마
법원의 원장과 동급, 아니면 이상이라는 권위자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즈는
마법원의 화제거리였다. 하지만 대상인 시즈는 하루종일 책만 읽다가 몇 가지를 노트에 적
어 돌아가는 둥의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그런 일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왕궁 내
에서도 잘 모습을 비추지 않는 헤트라임크가 요 1주일 사이에 찾아오는 빈도가 부쩍 늘은
데다가 대부분 시즈가 독서하는 모습을 인자한 눈빛으로 눈여겨보고 몇 번 말을 나누고는
사라진다는 까닭으로, 평민이기는 하지만 감히 시즈를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무슨 성과라도 있나?」
드래곤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언제 나타났는지 노마법사는 잘 보여주지 않아 희귀하기까
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즈는 답례로 미소를 지었지만 질문에 대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제 마법에 대해서 좀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현자라고 불리우는 마법사가 앞에 있는대도 앉은 채 대답하는 시즈를 보며 주위에서 수근
거렸지만, 정작 헤트라임크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무례한 청년의 앞에 털석 앉았다. 아직
소년으로 보일 정도로 순수함이 깃든 눈 앞의 청년이 짓는 미소은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
던 그의 아들을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그 녀석도 뭔가에 빠지면 국왕 폐하가 들이닥친다
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지.〉하는 회상이 떠올리며 그는 시즈가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
다.
「대마법사 〈메키드라히우〉의 마법론 저술!? 그것은 마법이론학에서 가장 난이한 수준
의 책이 아닌가? 1주일만에 그것을 이해할 수준이 되었다는 건가?」하고 헤트라임크는 경
악에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고, 목소리 또한 아무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수
준에 불과했다. 시즈는 이미 마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학문이 〈현자〉 또는
〈명사〉라고 불릴 수 있는 지경에 달해있었던 것이다. 헤트라임크는 놀라웠지만 그저 심
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것 같군. 하지만 마법이론학은 아무리 연구해봤자, 실제로 마법을 구현해보지 않은
이상 제대로 알 수 없을 걸.」
이 말은 사실 〈가르쳐줄테니까 어서 가르침을 달라고 해라.〉라는 노마법사의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마법원에서 수재라 하는 마법사들이 가르침을 청해도 못본 척 무시하던 그가
오히려 가르침을 주고 싶어서 안간힘을 쓴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제자를 원
하는 마법사의 바램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산책이라도 같이 하시겠어요?」
「뭐,뭣? 아, 그,그러지.」
뜬금없는 산책이라는 말에 당황한 헤트라임크는 말을 더듬었다. 시즈는 비겁하게도 노마
법사를 존경과 경외가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년, 소녀에게 서적의 정리를 부탁하고는
헤트라임크와 마법원을 나섰다.
길을 잃어버릴 만큼 넓은 왕궁의 정원을 걸으며 아무도 없다고 느껴지는 곳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
「이제서야 제가 마법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흠흠, 뭐…. 설마 그런 말을 하려고 나를 이렇게 거동하게 만든 건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몇 번한 노마법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청년과 있을 때는 자
신이 평상시의 냉정한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뭐
나쁘지는 않겠지.〉하고 중얼거린 그는 시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보아주십시오. 아니, 느껴주시면 되겠군요.」
언제나 미소만 지을 것 같던 남자의 진지함에 놀란 헤트라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
히 눈을 감는 시즈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런
모습에 지켜보던 노마법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뭘 하려는 거지? 꼭 바람을 쐬는 기분좋은 여행객 같은 모습을 하고 말이야. 하긴 시원
한 바람이긴 하군. …바람이…! 빨라진다!?」
잔디도 힘겹게 흔들던 산들바람은 강렬한 돌풍으로 변해있었다. 나무가 비명을 지르며 꺽
여질 것 같은 바람 속에서 헤트라임크는 안간힘을 쓰고 몸을 가누며 시즈를 바라보았다. 중
심에 서있는 자,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회오리처럼 아래에서부터 말려든
질풍은 청년의 허름한 옷차림을 살짝거드리며 휘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그만! 그만해! 으악!」
노마법사의 말이 들었는지 시즈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
고 몸을 가누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던 헤트라임크는 평형을 이루던 힘이 사라지자 벌렁 넘
어지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황급히 달려온 시즈가 헐떡이는 헤트라임크을 일으켜주자, 숨을 거칠게 내쉬던 노인은 눈
을 부릎뜨고 시즈를 바라보았다. 경악이 넘치는 시선에는 알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연구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그것은 무엇인가? 주문조차 없었어. 게다가 그 범위, 주문이 없이 그런 거대한 마
법을 쓸 수 있다니, 자네의 정체는 도대체 뭐지?」
그들이 서있는 잔디는 어느 부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끝을 향하며 누워있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시즈도 놀란 얼굴을 하며 말했다.
「예전보다 바람이 강해졌군요.」
「무슨 뜻인가?」하고 묻는 헤트라임크의 눈동자는 핏발까지 돋아있었다.
「이걸 보십시오.」하고 시즈가 내미는 것은 한 권의 얇은 책자였다. 두터운 표지조차 어
그러져 반쯤 뜯겨나간 오래된 서적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안에는 단, 한 페이지의 글만이 적
혀있었다.
알고 있습니까?
의지가 바로 마법이라는 것을?
힘들게 외워서 주절대는 주문도
사실은 그대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그대는 아십시오.
세상에서 마법에 가장 유리한 종족은...
엘프도, 드워프도, 드래곤도 아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가장 감정이 풍부하고 희로애락에 자유로운
바로 우리의 의지야말로 세계를 바꿀 신비한 마법이 되는 것입니다.
노래 하십시오...
그대의 의지와 신념에 숲이 울고 바다가 춤을 추도록...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마법을 구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