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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 마법원의 사람들은 논란에 휩싸였다.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것이 사실로 들어났던 것
이다. 헤트라임크가 언제나 구석에 쳐박혀 책만 읽던 청년을 원장 앞에서 소개할 때는 많은
연륜과 경험으로 왠만한 일에는 흔들리지도 않았던 노마법사들까지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
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내 아들인 〈시즈 세이서스〉요. 시즈, 인사드려라. 너의 공부에
도움이 되어주실 분들이다.」
시즈가 경직되지도, 그렇다고 경박하지도 않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자 노마법사들은 그
에게서 알 수 없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왕국 최고의 마법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떠나
서 청년에게서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오
랜기간 자연의 기운을 느끼며 살아온 그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로티븐 궁정마법원장이
시즈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정말 재미있군. 마땅찮다는 〈시즈〉와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세이서스〉, 누
가 들으면 헤트라임크 자네 아들이 국가에 불만이라도 품은 줄 알겠어….」
「정말 그렇군, 어허헛」하고 그의 말에 마법사들이 박장대소했다. 하지만 헤트라임크는
갑자기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그렇겠지? 나도 걱정이네. 하지만 어쩌겠나!? 자기 이름이 맘에 든다는데…. 내가 성
을 바꾸던지 해야지, 휴우….」
모두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시즈는 약간 홍조를 띈 얼굴로 살짝 미소를 지었
다. 양아버지의 집에서 좋은 옷으로 깔끔하게 갈아입은 그는 누가봐도 명문귀족의 자제였
다. 전형적으로 유약한 학자의 얼굴인 시즈는 단정한 옷차림과 외모가 잘 어울리는 데다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독특한 분위기는 하나의 그림과 같은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법을 배우겠다고? 자네 아들은 이론만 공부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로티븐이 궁금한 어조로 묻자 헤트라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즈는 마법을 학문으로써 연구 중이지. 그런데 역시 마법을 잘 이해하려면 마법을 사용
할 줄 알아야하지 않겠나?」
「당연한 것이지. 그래서 자네가 가르칠 생각인가?」
「허허…. 불행히도 난 이 녀석을 가르칠 능력이 안되네.」하며 왕국 최고의 마법사가 고
개를 젓자, 앉아있던 노마법사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로티븐이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는 현재 활동하는 마법사 중, 엘시크에서 최고가 아닌가? 왕국
최고의 마법사가 가르치지 못한다면 누가…. 서,설마! 이 청년이 7클래스 마스터보다….」
「그것은 아니라네. 하지만 비슷할 걸세. 내가 그 동안 가르친 주문만 기억하고 있다면
….」
그의 말과 동시에 방 안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원장을 비롯한 마법사
들은 탐욕적인 시선으로 시즈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헤트라임크의 말대로라면 그저 독
특한 분위기를 가진 평범한 청년이라고 외견상 판단되는 시즈의 가치는 엘시크의 공작에
비해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에 시즈와 헤트라임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헤트
라임크가 시즈에게 자신이 직접 적은 주문책으로 마법을 가르친 것은 2달이 되지 않는 기
간이었다. 밤낮으로 열성을 다해 가르친 것도 아니었다. 시즈는 세이탄의 저택에서 주문책
으로 공부를 하던 도중, 모르는 것이 생기면 그에게 찾아왔고 헤트라임크과 함께 차를 마시
며 담소를 하듯 설명을 들었고 하룻밤 정도 자고 가는 정도였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
일지도 몰랐다. 시즈에게는 마법의 이론이 필요없으니까, 주문이 어떤 의지를 나타내는 것
인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 의지와 신념인지만 이해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도대체 이 곳에는 뭐하러 온거지? 배울 것이 없지 않나?」하고 원장이 의혹어린 음
성으로 묻자, 처음으로 시즈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고문(古文) 주문서〉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안돼. 볼 수 있다고 해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 문자네. 읽을 수 없는 주문인 것을 어쩌
겠나?」
그렇게 말하며 로티븐은 시즈의 눈치를 흘깃거리면 살폈다. 어떻하면 그를 궁정마법원으
로 끌어드릴까 고민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국왕에게 주청을 드리면 되는 것이었지만, 〈마
땅찮은 영광〉이란 이름이 왕족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즈 입장에서 보
면 유용한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시즈가 궁정마법원의 일원이 된다면 고문 주문서는 안되더라도, 금지주문까지는 보여줄
수 있네.」
하지만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시즈가 원하는 것은 강한 마법을 만들어내는 주문이 아니
었다. 주문의 언어가 그에게는 중요했다.
〈한국에서의 언어와 문자가 여기서도 사용된다는 것은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연관이 있다.〉
그 증거를 찾는 것은 포기했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언제나 시즈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헤트라임크와 지내며 마법을 연구하던 중, 하루는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한국에서 시즈는 한 사진집을 봤던 기억이 있었다. 물의 결정에 대한 사진이었는데, 결정
은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물컵에 〈죽음, 슬픔, 괴로움〉
같은 글을 써넣은 물의 결정은 마구 금이 가고 갈라져 있었고, 〈기쁨, 즐거움〉같은 글을
써넣은 물의 결정은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운 결정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의 문
자를 써넣어도 같다는 것이다.
〈언어 자체에도 의지가 깃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언어마다 차이가 있지는 않을
까?〉
시즈는 즉시 실험을 시작했다. 한 쌍의 화분을 사온 그는 양쪽에다가 〈죽음〉이라는 글
을 써넣었다. 하지만 하나는 문자의 역사가 오래된 〈엘시크의 문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만들어진지 300년도 채 되지 않는 〈실베니아의 문자〉. 결과는 확연히 나타났다. 놀
랍게도 엘시크의 〈죽음〉은 그 말대로 꽃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실베니아의 〈죽음〉은
식물이 시들거리는 정도였던 것이다.
「언어와 문자는 시간과 함께 뜻에 포함된 의지를 축척한다.」
결론을 그렇게 내린 시즈가 찾은 것은 바로 고문의 주문서였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모
든 고문의 주문서는 궁정마법원에서 보관,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하고 헤트라임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틴으로 가는 수 밖에
….」
「잠깐! 어째서인가? 시즈를 데리고 아스틴으로 가겠다고? 난 반대네.」
로티븐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시즈가 아스틴에서 아예 엉덩이를 붙일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헤트라임크는 20살이 갓 넘은 - 게다가 시즈는 깨끗한 외모로 동안이었다. - 시즈
가 7 클래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었을 때, 그의 성취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절대로 시즈를 엘시크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궁정 마법원장의 이름으로 마법사 헤트라임크 세이서스과 그 가족들의 출국을 금지하겠
소.」
「그러는 법이 어디있소!」
갑자기 방의 분위기가 파국으로 치달리자, 노마법사들은 깜짝 놀랐다. 엘시크 최고의 두
마법사가 다투는데 누가 겁을 내지 않겠는가. 로티븐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는 듯이 방
을 나가버렸고, 노마법사들도 헤트라임크의 눈치를 살피며 로티븐의 뒤를 따랐다.
「빌어먹을…. 겁쟁이 노인네 같으니라고…. 시즈,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 마법원을 그만
두고서라도….」
헤트라임크는 시즈가 분명 절대적인 마법의 경지에 오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쩌면 먼저 죽은
친아들에게 조금의 도움을 줄 수 없었기에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그의 아들의 몸에서 기분
좋은 바람이 흘러나왔다. 시즈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의지와 신념을 가진 이상, 세상은 저를 중심으로 마법을 펼칠 테니까
요….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청년은 자신감이 어린 어조로 그렇게 양아버지를 안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