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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폐하께 드릴 청이 있습니다.」
「어서 말해 보시오, 세이서스 후작 공자. 그대가 아스틴으로의 여정에 관한 것
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국왕은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이상하게도 마른 체구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
다.
대륙의 학문은 인도하는 주자는 고대부터 마법을 바탕으로 한 실용학문과, 전설
에서 이어지는 문학을 오랜 세월 다져온 아스틴, 그 중에서도 대륙 최대의 학문
연구기관인 아스틴 네글로드였다. 그에 비해 엘시크는 모든 분야에서 평균을 약간
웃도는 수준을 가지고 있었으나, 건국 초기 때부터 대륙 최대의 학문기관과 비
교할 만큼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문학가와 학자를 자주 배출했다. 그러나 요근래
에 들어서는 뛰어난 학자의 배출은 커녕, 군사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문이 뒷걸
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스틴 네글로드가 직접 모시러 올 학자의
출현은 국왕, 로타우노 벤치 에밀리오에게 큰 기쁨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세이서스가(家)의 출국금지 조치를 풀어주십시오. 현재 세이
서스가는 엘시크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시즈의 청을 상기된 표정으로 흥분까지하며 기대하던 로타우노는 이해할 수 없
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세이서스가는 후작가(家)가 아니오? 그런 세이서스가가 출국금지 조치를 당했
다는 것을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헌데, 난 그런 말을 전혀 듣지 못했소.」
일그러진 눈썹을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던 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는 중요한 것이지 아니지. 나 엘시크의 모든 이를 대변하는
자, 로타우노 벤치 에밀리오의 이름으로 지금부터 세이서스가에 대한 출금금지령
을 무효화하겠소.」
「폐하의 은혜가 끝이 없으십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며 시즈는 흘깃하고 로티븐 궁정마
법원장에게 눈을 돌렸다. 로티븐은 목이 타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물을 홀
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수행원으로는 얼마나 데려갈 생각이냐?」
연회가 끝나고 왕궁을 나온 세이서스 부자는 저택까지 느긋한 발걸음을 옮기며 이틀 뒤,
출발하게 될 아스틴으로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행원은 아스틴의 현자들이 데려온 사람들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 말동무
로 헤모 사제에게 동행을 부탁할까 합니다.」
「그래. 그라면 믿을 만 하지. 짐꾼으로도 쓸만하고…. 하지만 그는 정신이 이상
해져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고 하더구나. 얼마 전에도 네게 달려들지 않았느냐?
내가 옆에 있지 않았다면 네 허약한 몸은 그 거대한 주먹에 맞아 단숨에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
「저는 헤모 사제께 생명을 구원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일이 또 일어
나더라도 목숨을 구원받으면 구원받지, 그가 제를 위태롭게 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모가 난동을 부렸다는 대목에서 잠시 움찔한 시즈였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은은한 달빛 속에서 꿈결처럼 부드럽고 평화로운 미소으로 당황함을 가리는 청년
의 모습을 헤모가 보았더라면 그 가증스러움에 솜털까지 곤두섰을 것이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예상이다만 아스틴의 그 두통을 사랑하는 7명의 학자
들은 너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뭐든 상관없지만 댓가는 확실하게 뜯어오
도록 해라.」
고개를 흔쾌히 아래위로 젓는 시즈의 모습은 아스틴 네글로드의 불행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그렇고, 어떠냐? 오늘은 밤새도록 술이나 마셔보는 것이? 그 동안 공부한
성과를 한번 보고 싶구나.」
「아버지, 아스틴에 못 가신다고 심술을 부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전 내일, 다
음날 여행갈 차비를 해야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야 헤모 사제에게 맡기면 된다. 내가 집사에게 말을 전하도록 말해놓
으마. 후우…. 나도 여행삼아 함께 갈까 했는데, 그 놈의 노인네가 훼방을 놓다니
….」
로티븐은 흰자위에 핏빨까지 내보이며 헤트라임크의 아스틴 행을 부득부득 말렸
던 것이다. 가족이 엘시크에 있으면 그나마 시즈가 아스틴에 엉덩이를 깔고 앉진 않겠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오늘의 술과, 내일의 헤모가 고생할 것을 비교하던 시즈의
머리 속에서 헤모가 밀린 모양이다.
〈내일 이후에 아버님을 다시 뵈려해도 한동안 못 뵐테니….〉하고 자신을 설득한 시즈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헤트라임크는 아들의 대답을 예
상하는 듯 자신있는 표정이었다. 시즈 자신은 극구 부인했지만 사실 그는 세이탄
사람들이 엄지 손가락을 내미는 애주가였던 것이다. 체력이 좋으면서도 간은 약
한 탓에 강한 술은 잘 마시지 못했지만, 맛이 좋다고 하는 와인이라면 한잔이라도
마시기 위해 눈을 뒤집고 사력을 다했고, 정치 암투에서나 사용될 계략과 모략을
그 한 잔의 술을 위해 쏟아붙고는 했다. 양아버지인 헤트라임크가 그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는 모두 원인이 있는 밑바탕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흠, 2일 후면 한동안 뵙지 못할 테니, 오늘은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사제님께 미안해서 어쩌죠?」
「아스틴에 도착하면 이름있는 포도주라도 선물하면 되잖니.」
득도한 표정으로 시즈는 손바닥을 충돌시켰다. 헤트라임크의 눈에는 웬일인지
그날따라 깊이있게 보이던 시즈의 웃음가 싱겁고 멍청하게 비춰졌다. 〈단순한 면
이 있다니까…. 이런 녀석을 대학자라고 모셔가다니 아스틴 학계가 망할 날도 멀
지 않았군.〉하며 그의 입꼬리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고양이 어우르듯 시즈를 어우르는
노인의 말솜씨는 경험과 연륜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