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국경지대입니다.」
한 수행원이 지평선 부근으로 미약하게 모습을 드러낸 산등선을 가르켰다. 국가
에서 귀빈으로 대접받는 사람들이기에 푹신한 방석까지 깔린 마차를 타고 있긴 했지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랜 여행으로 달련된 수행원들을 제외하고는 허덕
거려야 마땅할 연약한 학자 일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만은 예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도 유약하기 짝
이 없는 평범한 학자의 유형이 끼어있었으니, 그는 힘겨운 감정을 함께 토로할 이도 없이 숨을 헐떡이는 아스틴 네
글로드 원탁의 7인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피브드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네요.」
마차 좌석의 맞은 편에 앉아 기분좋게 흔들림을 느끼고 있던 시즈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창백하게 굳어진 피브드닌은 산소가 부족한 것
처럼 팔다리를 허공으로 휘젖고 있었다. 엘시크는 기마이동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
다. 전국적으로 마차가 오가기에 알맞은 크기의 도로가 만들어져 있었고, 덕분에 정
보의 이동이 타국에 비해 월등히 빨랐다. 복잡하지 않은 영지는 육두마차의 사용이
가능했고 시즈들이 타고 있는 것 또한 육두마차였다.
「괘, 괜찮소. 이보시오, 마부. 이제 조금이란 것은 수치적으로 몇 시간 몇 분인지
알 수 있겠소?」
「4 시간하고도 차를 한 잔 끓여마실 시간 정도일 겁니다. 하하! 선생님은 정말 적
응을 못하시는 군요. 이제 흔들림이 익숙해질 것도 같은데….」
피브드닌도 자신의 형편없는 체력이 원망스러웠다. 눈 앞에 있는 청년 또한 출발
뒤 어느 정도 자신과 쓰러지는 보조를 맞춰왔지만 어느 새 적응하여 햇빛 쐬는 고
양이처럼 기분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피브드닌이 아스
틴의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마차의 흔들림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리라고 일행은 생
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레민트 님은 정말 기마실력이 뛰어나군요. 피곤한 기색 하나 안 보이니
말이에요. 종족의 특성입니까?」
멀미에 정신이 오락가락한 피브드닌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 것은 과묵한 드워프, 토루반이었다. 발이 마차바닥에 닿지 않아 심할 때는 뒤로
벌렁 넘어가기까지 하는 그 였지만, 전혀 피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
이 드워프라는 종족은 근육덩어리나 다름없는 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에
비하면 전투종족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그들의 무기는 힘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몸
의 근육에서 폭발하는 파워는 엄청난 속도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고, 뛰어난 도약력
을 가졌기에 보통의 드워프라도 웬만한 병사를 당해낼 수 있는 것이다. 토루반 역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답게 등에는 롱 소드를 메고 있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엘프에게 저것은 다른 동물과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아. 게
다가 엘프들은 싫증도 잘 내지 않지. 저 상태로 1년을 있으라고 해도 미소가 입에서
떠나지 않을 거야.」
그의 말대로 유레민트는 자꾸 부딪히는 바람에 날리는 금발을 넘기며 어머니의 품
에 안긴 듯 편안한 얼굴로 말의 갈기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자신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흑마를 거칠게
몰아대는 헤모가 보였다.
「바람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아무 일 없이 이대로 쉐인넬까지 갔으면 좋겠군요
.」
「자네는 여행이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상하군. 보통 미지의 장소를 가게 되면
모험심으로 들떠서 따분함을 못 참기 마련이던데…. 특히 자네 또래의 청년들은 무
슨 사건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하곤 하지.」
토루반은 말을 하던 도중, 시즈의 애수에 빠져버린 표정를 보고 말을 닫았다. 세
상에 대한 호기심에 차있는 눈이 아니었다. 청년은 끝없이 빠져들 것 같은 눈동자로 떨어져 내리는 가을낙엽을 스
쳐보며 미소지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막상 사건이 터지면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력한 어린아이인 것
은 깨닫지 못한 채….」
그 때, 마부석에 앉아있던 한 수행원이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민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저기….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대학자 피브드닌은 팔,다리를 허공에 젓던 것을 멈추고 그저 경련을 일으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미안하오. 오늘 안에 국경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일행은 모닥불에 비친 미소를 지어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모두들 지쳐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피브드닌이 고맙기도 했다. 그 방법이 약간 민망했지
만 말이다.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토록 서둘렀던 것인지 계속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익숙해지자, 멈추었다
가자는 말을 하는
것이 어쩌면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든 것에 관성을 가진 존재니까….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있습니다. 이것 좀 드시죠.」
헤모가 내민 마른 고기는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피브드닌은 묵묵
히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의 차가운 가을바람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부모
의 가지에서 떨궈댔다.
「누구냐!?」
주점에서 호스트를 하면 어울릴 미청년 수행원이 갑자기 검을 빼어들고 수풀을 향
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인기척을 느낀 일행이 모두 무기를 잡았다. '검을 잡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라는 편견을 가진 학자는 아무래도 피브드닌 혼자 같았다. 엘
프와 드워프는 무기를 굳게 쥐고 소리가 곳을 노려봤고, 시즈는 예도에 손을 얹은 채, 헤모는 너클을 쥔 채 작은 움
직임이라도 감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이런, 이런! 이렇게 마중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척보기에도 거친 용모를 가진 사내가 하나, 둘 씩 어둠 속에서 고개를 내밀기 시
작했다. 14~16명 정도되는 그들의 손에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달빛을 받아 살벌하게
광채를 내는 무기가 들려있어 쉽게 정체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산적인가? 마을에서 이렇게 가까운 지역에서 당당히 산적질을 하는 인간들이 있었
다니….」
어이가 없는 듯 헤모는 고개를 저었지만 산적들에게는 그가 겁을 먹은 것으로 보인 것 같았다. 산적질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 소녀도 직업의 영향인지 곰도
찔끔거릴 만큼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장 쓸만해보이는 놈이 덜덜 떠는 군, 그래. 다른 녀석들은 칼 잡기에는 손목부
터 불안해보이는데 얌전히 무기를 내려놓고 돈이 될 것은 조목조목 찾아서 내놓으
시지.」
시즈 일행은 〈그러는 너는 어떻고!?〉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16~17세 정도 될 것같은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텁텁한 목소리와 주위를 둘러싼 무기들의 예기에
긴장으로 찬 침만 삼켰다.
「한 마디로 돈이 될 것을 내놓으면 살려주겠다, 이말 입니까?」
「그… 그래!」
온천에서 들릴 것 같은 차분한 목소리에 소녀는 순간 당황했다. 엉겹결에 대답한
그녀가 말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자신보다 약간 나이가 들어보이는 청년이 유원
지에 유람온 표정으로 꺼냈던 칼을 집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시,시즈! 뭐하는 거야!? 어서 칼 꺼내!」
시즈를 제외한 일행과 산적들은 놀라 입이 쩍 벌어졌고, 헤모는 산적과 시즈를 번갈아 흘끔거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시즈는 온화한 미소를 걸친 채 소녀 앞으로 걸
어나갔다.
「미안하지만 저희는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 금전적인 것과는 거리가 많습니
다.」
「거짓말! 너희가 타고 온 마차만 봐도 알 수 있어. 육두마차가 아무나 타는 것인
줄 알아? 잔말 말고 돈이 될 것을 내놔.」
눈에 힘을 주고 소리치는 소녀였지만 황당한 일을 겪은 나머지, 냉정이 풀어져 소
녀다운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급히 입을 막았지만, 시즈의 미소는 이미
짙어져 있었다.
「그것은 저희가 나라의 부름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차와 수행인들은 모
두 마법국가 아스틴의 소유죠. 저희를 함부로 공격했다간 이 곳에서 4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자리한 국경경비대
가 여러분을 토벌하러 달려올 것입니다.」
「흥…! 4 시간이면 우리는 너희를 죽이고 주변 마을로 숨어들 수 있어.」
「그럴까요?」하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는 시즈의 모습은 소녀와 산적들을 불안하
게 만들었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청년은 갑자기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
「그럼 이것은 어떻습니까? 지금 돈이 될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만들어드릴 수
는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시즈는 주위의 사람들이 등 뒤로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아
는지 모르는지 가방에서 잉크와 얇은 백지의 책자를 꺼냈다.
「유레민트 님, 여기에 시를 한 구 써주시겠어요? 사인과 지장도!」
「유레민트? 아스틴 네글로드의 유레민트 하미렌님?」
산적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경악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유심히 유레민트를 살펴
보던 남자는 그녀가 엘프라는 것을 알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즈는 마음 속으로
박수를 쳤다. 아무리 유명한 아스틴 네글로드라지만 서민들은 잘 모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글읽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시
즈의 계획을 완성시켜주는 포석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아는 분이 계시는 군요. 유레민트 님의 친필 시라면 매니아들에게 어느 정
도의 가격으로 거래되는지도 아십니까?」
「값을 따질 수 없지….」
「알고 있군요. 그렇다면 왜 동료들에게 검을 내릴 것을 권하지 않습니까?」
그의 속삭임과도 같은 나직한 한 마디에 사람들은 무기를 든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절대적인 마법과 같은 그 목소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