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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없어졌군. 노리스, 그 녀석 어디 갔는지 아나?」
「멍청할 정도로 세삼스러운 질문이군. 언제나 있을 곳에 있겠지.」
츠바틴은 덩치만 커다랗고 뇌는 비정상적으로 미발달한 -츠바틴의 생각으로-노리스
에게 멍청이 취급을 받는다는 것에 목을 매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자살할 생각으
로 성벽으로 통하는 계단을 밞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그는 언제나 성벽에 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돌처럼 앉아 있었다. 바랜 돌색처럼
묽어진 듯한 검은 눈동자는 정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시선으로 멀리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츠바틴이 다가가 천천히 몸을 밀어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인형처럼 그가 앉아 있었다. 가끔씩 깜박이는 눈꺼플이
없었다면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낮게 한숨을 내쉰 츠바틴은 약초 냄새가 코가 지릴 정도로 베인 손으로 청년의 어
깨를 짚었다. 시즈의 무미건조한 얼굴이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부드럽게 스르르 돌
려졌다.
「멜란에서 혼자 숨어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렇게도 자네를 괴롭히는가?」
「그럴지도….」
「그렇다면 그냥 여기서 떨어져 버리면 되겠군.」
「그들을 희생시키며 살았습니다.」
「시즈, 너의 말은 핑계일 뿐이야. 느끼고 있지 않은가. 알고 있을 텐데!? 마음 속
에 느끼는 것을 입에서 변조하려 하지 말아. 솔직하게 말하게. 자네 때문에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건가?」
시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촛점없는 눈으로
츠바틴의 뒷편을 보던 그는 미약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핑계라는 것을…. 희생되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제가
살고 싶어서 였음을…. 그러고나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토록 저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사람은 모두 자신을 먼저 위하는 거야. 멜란의 사람들도 자네와 마찬가지로 모두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고 했을 거야. 그리고 그들은 지키지 못한 거지. 왜 그들이
너를 위해서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마을 사람들의 죽음에 의미라도 부여해
주겠다는 거라면 이기적이라는 말 따위는 입에 붙일 자격도 없어. 휴우…. 그것이
아니라면 쓸모없는 자기비하에 빠진 것일테지. 하지만 그런 자기비하나 비판
따위는 아름답지도 고결하지도 않다는 것을 기억해둬.」
「그 말은…?」하고 시즈는 힘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카롭고 명확한 빛을 발하
던 시선은 안경이 부서진 후, 더없이 감미로운 것으로 변해버렸기에 그런 행동은
귀엽게까지 보였다. 츠바틴은 키득 웃으며 겉옷을 벗어 시즈에게 걸쳐주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고민하는 네가 멍청이라는 거야. 참고로 말하자면 난 방금
전에 노리스에게 멍청이라는 말을 들었지.」
그 후, 츠바틴은 성벽에서 뛰어내리려는 시즈를 말리려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결국 〈이런 사태를 예측 못한 내가 멍청이였어.〉하고 타협을 본 후에야 성벽을
내려온 그는 심벌튼 경비대실의 방바닥을 뒹굴거리고 있던 거구의 사내에게 말했다
「노리스, 심심하지? 시즈에게 검술이나 가르쳐.」
「엥? 무슨 소리야?」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노리스가 묻자 츠바틴은 수염이 말끔하게 깍여 맨질
거리는 뺨을 쓰다듬으며 다른 한손으로 시즈를 가리켰다.
┌몸이 다 나았어. 이제 곧 떠나야 할텐데…. 저 상태로 보내는 것은 불안하지
않아? 다시 멜란과 같은 일이 생기면 언제 또 아무 성벽에나 올라가서 멀뚱히 앉아
있을지….」
시즈가 성벽에 앉아있던 모습이 보기에 굉장히 불안했었던지 노리스는 즉각 그의
거구만큼이나 거대한 검은 어깨에 맺다.
┌넌 이미 꽤나 재미있는 검술을 몸에 익히고 있는 것 같다. 난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과 임기응변식의 검술을 가르쳐주마.」
성격이 급한만큼 그의 검술 수업은 바로 시작되었다. 노리스와 시즈는 목검을 들고
대련식의 훈련을 했지만 겉보기에는 노리스가 일방적으로 시즈를 두들겨패는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 그러했다.
「맞는 것도 훈련이야. 아픔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살을 주고 뼈를 깍는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리스의 말 만큼이나 훈련은 혹독하여 티플들에게 쫓기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고되었다. 그러나 시즈의 고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너를 의사는 되지 못하더라도 약사의 수준은 되도록 가르치겠다. 그저
죽어가는 사람조차도 자신의 탓으로 돌릴 것 같으니까. 그러면 네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줄어들 수 있을 거야. 혹시 정말로 너 때문에 죽는 사람이 한명 생길
때마다 이 의술로 100명의 사람을 구하면 되지 않겠나?」
수 많은 약초들을 일일히 외우는 것은 개미가 산의 바닥을 일일히 핥는 것과 별다
르지 않았다. 여행자는 약초를 몸에 많이 지니고 다닐 수 없었기에 츠바틴은 고작
약간의 효능이 있는 것이라면 잡초라도 가르쳤다. 그 마음을 알고 열심히 외어보려
는 시즈였지만, 인간인 이상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이 있다고 버리지 마. 사실 인간의 피도 다른 어떤 생물에게는 독이 돼.
어떤 것도 한 쪽을 보는 것은 그릇된 거야.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만 있는 게
아니라 육각형의 6면도, 8면체의 8면도 될 수 있다.」
「싸움은 인생에 있어서 순간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인생이 사라질 수도 있지.
그런 순간의 싸움을 이기려면 그에 맞는 찰나적인 힘의 폭발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폭발한 힘의 분출을 자연스럽게 공격과 방어에 내포시켜야 해.
시즈, 넌 체격적으로 나 같은 거구에게 이길 수 없어. 너의 검술 중에서 힘의
폭발이 두두러진 것은 발도술과 비연참, 비천세의 내려베기 등이다. 이것을
승부처로 발달시켜!」
「약은 절대로 과도하게 쓰면 안된다. 질병도 약에 적응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인간의 몸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좋은 약도 계속 복용하면 몸은 포화가 되어버려.
그리고 포화를 넘어서면 해가 되어버리지.」
「힘의 폭발로 공격의 준비를 최소화해라. 검의 빠르기는 준비자세의 안정세와
속도가 기반이다. 이것을 할 수 있다면 공격의 타이밍을 자유자제로 조절할 수
있고, 상대의 방어에 혼란을 준다.」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지쳐버리는 훈련과 수업이었지만 시즈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성벽을 올라가 노을진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했다. 어느 새 알 수 없던 촛점은 곱게 뭉쳐,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
보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 세 달이 되어갈 무렵 노리스와 츠바틴은 성벽에
고요하게 앉아있는 시즈에게서 불안감 대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애수에 빠져
든 채 잿빛의 날개를 접고 앉은 천사는 날개를 펴 두 은인을 끌어안는 듯한 편안함
이 담긴 미소로 그들에게 보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