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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 하나요?」
갑자기 얼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낀 시즈가 눈을 뜨자, 모닥불에 곱게 물든 금발
을 살풋 드리운 채 유레민트는 호기심있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
는 몇 십 년이 넘도록 살아온 엘프였지만, 커다란 연두빛 눈동자에 말똥거리는 순수
함은 시즈의 눈에 어리광쟁이 소녀처럼 귀여운 모습으로 비쳤다. 소녀의 금발을 한
껏 쓰다듬고 싶다는 욕망을 싱긋 웃으며 억제한 시즈는 고개를 미약하게 저었다.
「엘프는 자존심이 굉장해서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던 모
양이네요. 유레민트 님을 보고 있으면 엘프라는 종족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아하하. 아니에요. 외모만이라면 엘프는 아름답지만 종족 자체가 아름답다고 하기
에는 부족해요.」하고 유레민트는 남자라면 안아주고 싶을 슬픈 표정을 짓자 〈춤추
는 칼〉의 메네이나를 제외한 대원(?)들은 이유없이 얼굴을 붉히고는 -모닥불에 비
친 착각일런지도 모르지만- 주먹으로 애꿎은 땅을 쿡쿡 쥐어 박았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거지. 하지만 아름다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더 소중한 것
을 바치는 바보들은 세상에 널려있지. 안 그런가, 바보들?」
구르는 돌처럼 묵묵한 음성을 내뱉은 토루반은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을 들어내
아픈 주먹을 쓰다듬고 있는 바보들을 쓸어보고는 시즈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도 모든 것을 미학(美學)과 결부시켜 판단하는 건가?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본
것 같군.」
「저 역시 바보입니다. 하지만 엘프를 아름답다고 한 이유, 외모 또한 그 안에 들어
가거든요. 그들은 어떤 것과도 조화로울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외모 또한 조화
로움의 한 부속품처럼 완벽해요.」
「그것은 아닙니다.」
피브드닌가 내장을 탈탈 털어내고 헬쓱한 안색으로 양고기를 씹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가와 앉았다.
「유레민트 님은 특별합니다. 보통 엘프들은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죠. 그들은 조화
로운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순수의 자존심은 인
간과 같은 다른 종족을 배척하죠.」
유레민트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종족이 고집하는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정치와 학문에 뛰어든 것도 그것을 타파해보
려는 심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래요. 우리 엘프들은 조화롭지 못해요. 어쩌면 가장 조화롭지 못한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이렇게 멸망해가고 있잖아요?」
실제로 엘프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강한 마법과 자연,정령 친화력 등
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비스러웠던 고대 종족으로 되어가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두
려움 때문이었다. 환경에 맞추어 변화하는 종족 엘프, 그들에게 자연을 이끄는 능력
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다른 종족들은 자신들의 변신과 함께 환경또한 바꾸어 가고
있었다. 엘프는 이미 모든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족이었기에 사실상 변
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종족을 두려워하고 시기했
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다채로운 형태의 진화를 보이는 인간을 혐오스러워까지 했다
. 엘프들은 인간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 바다의 섬으로 떠나갔다.
「엘프를 순수하다고 보았을 때, 가장 혼돈스런 존재는 인간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그로인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일 겁니다.」
피브드닌은 힘있는 미소를 지었고, 곧 토루반에게 얻어맞아 짜증스런 울상을 지어
야 했다.
「왜 때리는 겁니까, 토루반? 제 나이가 벌써 30세을 넘었다고요. 젊은 사람들 앞에
서 그렇게 구박하시면 전 뭐가 됩니까?」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로군. 난 네가 기가막힐 정도로 뻔뻔스러운 말을 지껄
이기에 부끄러움 같은 것은 절대로 타지 않는 철면피인줄 알았다. 네 말대로 인간은
가장 혼돈스럽지만 그 안에서 혼돈의 질서를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이 조화롭기 위해 다른 생물들에게 혼돈을 가져다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그, 그렇기는 하지만….」
「뭐가 그렇기는 하지만이냐! 이 세상에 진정한 조화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진정
한 아름다움 또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모닥불의 주위는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길을 잃고 헤매
는 소리만 애처롭게 들려왔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아 거구의 신관에 의해 바닥을 드
러냈다. 헤모는 종족의 슬픔을 간직한 엘프, 종족의 자부심을 간직한 인간, 그리고
대화에는 신경도 안 쓰고 열심히 고기를 먹어대는 메네이나를 쓴웃음을 지으며 쳐다
본 후 입을 열었다.
「과연 진정한 조화가 필요한 것일까? 이 사제의 눈으로 보기에는 모두 존재하기에
아름다운 것을…. 깨끗함을 가진 엘프, 불 같은 열정의 드워프, 다채롭고 화려한 인
간, 뿐 만 아니라 수십 개의 면을 가진 생물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변화의 아름
다움, 순수의 아름다움, 혼돈의 아름다움.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지 알 수 없을 거
야. 하핫! 이거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군. 이러니 세상이 멋진 것이 아닐까?」
어색하게 웃는 헤모 사제의 미소가 잠깐이지만 성인(聖人)과 같다고 느낀 것은 착
각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어딘가 푸석하면서도 눈이 내린 것같은 포근함을 풍기는 분
위기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게 물드리고 커다란 손바닥으
로 시즈의 등을 퉁퉁 두들기며 책임을 넘겨보려고 노력했다.
「이 좋은 세상에서 만난 것 자체가 레이모하의 축복이 아닌가 싶군요. 기념을 하고
싶은데 뭔가가 없을까, 시즈?」
「보잘 것 없는 노래라도 된다면….」하고 시즈는 가방에서 넬피앙을 꺼내 품에 안
고 키득거렸다. 그가 미천한 음유시인들이나 쓰는 악기를 손에 잡자, 아스틴의 사람
들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잠깐이었다.
「쉿! 노래을 듣길 원한다면 조용히 해요.」하며 줄을 고르는 모습에 달빛이 비추자
, 가슴마저 두근거리게 하는 분위기가 고요하게 피어나 사람들을 감싸안았다. 사방이 작은 음악회처럼 조용하게 부
드러운 눈으로 시즈는 약간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 희고 긴 손가락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넬피앙의 현을 건드리자, 넬피앙은 가녀린
떨림을 내어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음과 함께 피어나는 투명한 음성이 순수의 엘프,
열정의 드워프, 혼돈의 인간, 모두의 귀에 살며시 속삭였다.
달빛은 누구에게 비출까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면 알 수 있을까요?
모를테죠.
달의 감미로운 미소가...
그 고요하고도 싱그러운 미소가
당신을 향해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부끄러운가요?
그 과분하지만 충분치 못한 빛발을 받는 것이...
오... 아름다워요.
달빛의 오오라 쌓여 수줍음에 몸을 떠는 그대가...
바로 그대 자신이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인답니다.
그러니 울음을 멈춰요. 사랑스런 그대여...
연인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한 맑은 음성은 허공에 작은 울림을, 사람들의 마음
에 물방울같은 파문을, 그들의 얼굴에 달빛 일렁이는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미소를
만들고 있었다. 시즈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은은한 음율에 늦가을 밤의 찬바람조차
따스한 햇살 속 아이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숲 속을 일렁였다. 정령에게 들려주는 자
장가처럼 감미로운 목소리에 메네이나의 눈이 사르르 감기고, 뒤를 이어 유레민트,
그리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 속에 푹신한 침대에 기댄 것처럼 잠에 빠져들
어갔다.
잠시 후 노래를 마친 시즈는 잠들어 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달빛과 같은 미소를 띄
고 투덜거렸다.
「모두 자면 보초는 내가 서라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