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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침을 시작이라고 규정지은 바가 없지만 대부분의 인식 속에서 아침은 하
루의 시작이다. 밤은 12시를 기준으로 새벽의 밤과 저녁의 밤, 2 차례로 나뉘어 찾
아오건만 어느 책에나 하루는 하나의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다. 잣대를 변화시킴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진화와 퇴화를 반복하고, 탄생과 멸망을 되풀이한다. 하지
만 그런 세상의 법칙을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중에는 자신들을 멸망과 탄생으로
이끄는 변화를 경계하는 이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가 오고 있다는 건가? 바로 그가?」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한 힘과 함께 잔떨림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마주 앉은 상
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이는 것이 이해가 서지 않았다. 한층
힘이 빠져버린 남자는 무거운 한숨을 몇 차례 내쉬고 물었다.
「그대는 〈그〉가 두렵지 않은가 보군?」
「두렵긴요.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제 머리를 만족시켜주는 몇 안되는 즐거움
이니까요. 비록 〈그〉가 몰고 올 바람과 그로인해 뿌리째 흔들릴 대륙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것〉들은 너무나 흥미로워요.」하고 상대는 어둠으로 드러난 입가에 미
소를 띄웠다. 남자는 그 미소로 인해 크나큰 손실을 가져올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
만 드러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바로 〈그것〉 때문이겠지? 길고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미 일어났어야 할 흐름
…. 〈그〉로 인하여 흐름이 일어나게 되다면, 태동하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을 거
야.」
「우리가 역사의 시간을 억눌러 온 것도 벌써 몇 천년이 지났어요. 사실 세일피어론
아드 자체가 몸부림을 칠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존재를 태어나게 했다는 것
은 정말 놀라워요.」
그 때, 암흑 그 자체처럼 검은 갑옷이 구석에서 걸어나왔다. 겉보기에 발 옮기기도
힘들만큼 무겁고 투박해보였지만 착용한 사람은 새털처럼 사뿐하게 걸음을 떼고 놓
았다. 이미 앉아있던 두 사람이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가슴이 짓눌릴 것 같은
숨기운을 뿜어대던 가면에서는 최창살같은 틈새를 지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둘 다 오랜만이야. 나를 부르다니 의외이긴 해.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지?」
「물론이에요, 에레나. 그런 칙칙한 갑옷을 입고 아지랭이처럼 나타나는 것은 여전
하시네요. 당신같은 미인을 보지 못하는 정말 남자들이 안타까워요. 당신은 그 한가
지가 단점이라니까요.」
남자의 상대가 검지 손가락을 꼽아 탁자를 톡톡 건드리며 싱글거렸다. 남자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고 곧 투덜거렸다.
「요즘 몸매도 안되는 귀족영양들은 몸을 드러내보려고 가슴이 푹푹 파인 것을 입던
데, 진정 미인은 불곰의 털가죽보다도 두꺼운 쇠를 둘러치고 있으니 시대를 잘못 타
고난 것이 슬플 뿐이야.」
「왜 나타나자 놀려대는 거지? 내가 둘의 대화를 들은 것이 꺼림칙했던 모양이지.
그럼 되돌아 갈까?」
「그래도 저렇게 잘 토라지는 것은 여자라는 증거인 모양이야, 안 그런가?」
「하하! 그럼요.」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남자는 에레나의 짜증스런 말투와 광폭한 기세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묻은 입가에서 나오는 말은 절대로 수줍게 봐줄 수가 없었다.
「간단한 일이야. 〈그〉의 팔을 자르고 눈을 판 후 혀를 뽑아줬으면 해.」
웃음섟인 말은 에레나의 난폭한 기세를 섬뜩할 정도로 가볍게 눌러버렸다. 검은 갑
옷은 어둠에 동화된 듯 어두운 침묵을 삼켰다. 그녀 또한 〈그〉에 대해 잘 알고 있
었고, 얼마나 위대한 사람 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죽이는 것보다는 간단하죠?」
「그래, 간단한 편이군.」
자신은 더욱 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꺼림찍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의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역사를 만들어온 이들이고, 세일피어론아드
를 지탱해온 이들이었기 때문에….
「왜 아스틴으로 가려고 하지?」하고 토루반은 넌지시 질문과 시선을 동시에 던졌다
. 마치 탐색전이라도 하는 것 같은 눈초리에 시즈는 의아한 미소를 이었다. 하지만
한 차례 코웃음을 치며 토루반은 자신의 수염 투성이 얼굴이 비치는 연못에 손을 쉬
지 않고 첨벙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책의 이름,〈또 다른 고향〉이라고 쓰여진 마지막 페이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으로도 이미 증명은 충분하잖나? 난 네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아스틴으로 간다고 생
각되는데? 이름을 널리 알릴 생각으로 간다는 어이없는 대답을 하지 말아줬으면 좋
겠군. 네 놈이 그런 시덥잖은 이유에 휘말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시즈 또한 손을 참방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느끼는 것이었지만 토루반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자신에게 찬물
을 껴얹는 것처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피브드닌 또
한 고지식한 생각을 마땅찮았지만 지닌 지식은 단점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고 유레민
트도 범인과는 다른 한차원 높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중에
서도 토루반은 특별했다. 어디에나 놓여있는 돌덩이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
가 활화산의 불꽃처럼 자신의 존재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모습은 시즈는 물론, 중인
들에게서 경외스러울 정도였다.
「제 마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아스틴은 마법왕국이니까 제가 현재 연구하
는 학문인 마법에 대한 궁금증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죠.」
「나는 자네의 양아버지가 고명한 마법사인 헤트라임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 정도의 대마법사를 아버지로 두었다면 굳이 아스틴으로의 먼 여행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토루반은 어깨를 으쓱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를 취해보았지만 불행히도 작은
몸은 충분히 의미를 반영할만큼 큰 동작이 될 수가 없었다. 시즈의 눈에는 움찔! 하
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을 모르는 드워프의 현자는 드래곤이 욕정에 겨워 뜨거운 숨
을 내뿜는 것처럼 은밀하게 시즈의 귀에 속삭였다.
「네 녀석이 말하기를 꺼리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좋다. 불꽃의 땅과 보석에 맹세코
비밀을 지킬겠다. 알려다오.」
드워프에게있어 불꽃의 땅이라 불리는 화산지대는 삶의 터전이었다. 화산 주위에서
발견되는 유황은 그들의 생활에 이용되는 에너지였고, 땅의 압력으로 많은 보석이
생성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대장장이와 건물 건축사로 유명했지만 사
실 그들은 어떤 것보다도 천부적인 보석세공사였다. 어떤 것보다도 단단한 원석들에
서 드워프들은 가치가 있을 보석을 추출해내고 그것을 깍고 다듬으니, 쇠를 추출하
고 다루는 것이나, 건물을 정교히 세공하는 것 따위는 한국인들이 맹물에 김치넣고
불 때워 김치국 끓이는 만큼이나 쉬웠던 것이다.
그제서야 진지한 표정이 된 시즈는 손에 들고 있던 어떤 물체를 단도로 다듬어 물
에 넣고 씻으면서 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약속의 언어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다른 이들과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이 틀
리죠. 그 방식까지 묻지는 마세요. 헤모는 제가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으
로 오해하고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기대에 부흥하진 못합니다. 그런 제게 필
요한 것은 제가 마법을 창언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아스틴의 고대 마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죠. 물론 현재로서도 어느 정도의 마법은 쓸 수 있지만….」
「정말 세상을 바꿀 말만 하는 군. 마법의 방식이 틀리다니, 체계가 들리다는 것은
현재의 마법이론을 부정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약간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요. 자아…. 이제 다 됐어요. 다른 분들이 기다리겠네
요. 어서 가죠.」
손에 묻은 물기를 탁탁 털어낸 시즈와 토루반은 함께 가져온 물체를 조심스럽게 품
에 안고 일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오는 것을 헤모가 눈을 부릅뜨고 무서
운 기세로 반기며 소리쳤다.
「야채 씻으러 간 놈들이 왜 이렇게 늦어!?」
시즈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낼름 내밀고 끌고 있는 스프에 씻어온 야채를 덤
석덤석 잘라넣었다. 스프는 함께 끓게될 이들의 방문이 즐거운지 보글보글하며 즐거
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