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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자네! 아까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계단을 한걸음씩 내려가던 시즈는 헤모의 목소리만큼이나
굵직한 음성이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이런…. 허허, 상당히 경계심이 강하군. 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남자 장님을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어. 단지, 자네의 걸음걸이로 2층이나 되는 식당까지 내려가
는 것이 무리가 아닐까 판단되어 하는 소리지.」
희미하게 웃음기가 섟인 묵직한 음성의 언어를 이해한 시즈는 미간을 거칠게
찌푸렸다. 2층!? 현재 암벽타기를 하는 기분으로 발을 내딛고 있거늘 그게 무슨
날 벼락같은 소리인가. 2층이면 눈먼 시즈에게 끝없는 태산이요,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히말라야 산맥이었다. 푸르름과 설경을 순간순간 오가는 청년의 안색은
남자에게 인간의 몸에 대한 경의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할 수 없군. 내가 데려다주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시즈의 겨드랑이를 손으로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놀란 시즈가 뒤늦게 바둥거렸지만 다리가 허공을 헤매이는 것을 누굴 탓하리.
자신의 다리가 짧다는 것은 새롭게 이식한 그는 눈물을 머금고 저항을 포기했다.
아마도 힘이 상당한 것으로 볼 때, 남자는 주먹이나 검을 꽤나 쓸 줄 아는 사람
인듯 했다. 남자는 축 늘어진 시즈를 가볍게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즈의 다리가 달랑거리며 허공에서 춤을 췄다.
「남자가 이렇게 가벼워서야 어디에 쓰려는 건가? 남자는 자고로 무게가 있어야
지. 가벼운 남자는 내가 알기로 입이 물에 둥둥 떠다니는 학자들 밖에 없어. 그
엄청난 나불거림은 어떻게 입술에 구멍이 뚫리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간다니까.」
〈그럼 내 입은 물에 둥둥 뜨겠군.〉하고 중얼댄 시즈는 남자의 말투로 볼 때
학자들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괜히 〈나 학자인데
요.〉라고 말했다간 던져질지도 몰라 얌전히 대롱대는 시즈.
식당, 주점에서 술을 즐기고 있던 사람들은 어깨 사이로 머리를 반쯤 파묻은
채 운반되어 오는 자그마한 청년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핫핫핫! 이보게, 톰더. 자네 혹시 인형사로 취직했나?」
「어디서 그런 커다란 인형을 구한 거야? 우리 딸애가 보면 가지거 싶다고 조를
까봐 무서워지는 군.」
톰더는 쓴웃음을 지으며 볼에 불만을 가득히 부풀린 인형을 의자 위에 내려
놓았다.
「후훗, 정말로 끈만 달면 인형극이라도 할 수 있겠군요.」
「그 목소리는…. 아릴 씨? 아직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까?」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물씬 풍겨오는 술내음에 시즈는 질겁을 했다. 그는 술이
라면 물 다음으로 좋아하는 음료이긴 했지만 무조건적으로 음주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설마 인형이 되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
아릴은 취기가 섟인 숨을 한껏 내쉬면서도 발음은 또렷하게 말했다. 술에 상당
히 강한 모양이군. 두 사람을 대비해 본다면 눈의 촛점이 잡히지 않은 시즈가 오
히려 취한 사람으로 보였다. 멍하니 자신의 뒷편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즈의 눈동
자에 아릴은 살풋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세요. 전 왠만해서는 술에 취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수작 부릴 생각
말아요!」
그 때, 취한 걸음걸이로 비틀거리며 다가온 피브드닌이 술기운에 붉게 달아오
른 얼굴을 드리밀었다.
「이봐요, 아가씨. 장님에게 수작부리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이 취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히끅! 시즈 군, 이… 아스틴 네글로드, 원탁의 7인 중 하나인 고명하고
현명한 피브드닌이 생각할 때, 히끅!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여인을 유혹
하는 히끅! ,거엇은 무리가 있다고 보오.」
「피브드닌 님, 취하셨어요.」
사론이 당황하여 달려와 장년 주정뱅이의 옷깃을 잡아 끌었다. 얼굴에 발갛게 홍
조를 띈 그는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아릴을 열망에 찬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다
가 히죽이며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주륵주륵 끌고 가버렸다. 제 아무리 세계적
인 석학이자, 고명하고 현명한 피브드닌이었지만 그의 방어법은 어느 주정뱅이나
다름없는 테이블 잡고 늘어지기였고, 그 전통적인 방어법 또한 기사출신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애환이 깃든 비명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시즈는 과음에 대한 위험성을 절감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술에 대한 애완을 버릴지는 의문이었지만….
「역시 학자들은 술을 마시면 안돼. 주둥이에 술이 들어가니, 더욱 가벼워지잖
아.」
톰더는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었고, 시즈는 무의식 중에 동감을 표하는 자신에 대
해 화들짝 놀랐지만, 역시 그의 입술밀도에 대해서는 확실한 수가 없었다. 껄끄러
운 입맛을 다시며 시즈는 아릴이 앉아있으리라 생각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
다.
「아릴 씨는 여자의 몸으로 혼자 여행을 다닌다면서요? 감탄했습니다.」
「그 쪽이야말로 눈도 불편한데 〈엘로고라토의 전령〉을 뚫고 여행을 하다니
대단해요.」
「하하하, 함께 여행하는 이들이 믿음직스러우니까요.」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톰더가 눈썹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방금 전 주정뱅이 학자가 자네의 동료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자네가 그런
동료를 이끌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야.」
이마 위로 구슬땀이 또르르 흘러간다. 급기야 톰더는 시즈의 저력(?)에 감탄하며
술을 권하기까지 했다. 피브드닌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일은 시즈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런데…. 아릴 씨, 제를 기다렸다고 하셨는데….」
「아! 그럼 잠깐 나갈까요?」
아릴은 술에 취했다는 것이 거짓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 시즈를 일으켰다.
그녀가 팔짱을 끼자 코끝에 향긋한 내음이 걸렸다. 어리둥절하여 당황한 채 끌려
나가는 시즈의 뒤로 부러운 시선이 쏟아졌지만 본인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여인
의 빠른 걸음에 비틀거리며 끌려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