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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엘로고라토의 전령〉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숲의 나무들도 알게 모르게
다가온 겨울의 기류에 잎을 하나씩 내려놓고 앙상한 가지는 피부를 찌르는 노래를
음밀하게 부르는 밤, 소녀의 천진함과 여인의 부드러움을 지닌 미소를 띄우며 아릴
은 춤을 추듯 시즈를 이끌었다.
「당신, 어지간히 경계심이 없군요? 내가 당신을 해칠 생각으로 불러냈는지도 모르
잖아요?」
「적어도 절 죽일 마음을 가진 이가 천족으로 오해받을 정도의 미인이라면 기억 속
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겁니다. 그리고 피브드닌이 들어간 이후로 제 일행이 없
었으니, 해칠 마음만 있었다면….」
허전해지는 팔의 공간을 느끼며 시즈는 말을 멈췄다. 부드럽게 감싸안았던 여인의
팔 대신 옷깃은 형체없는 바람에 나부꼈다. 걸음을 크게 딛으며 휘 - 돌아서서 아
릴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말을 틀렸어요. 당신은 겉으로는 동료를 믿는 것 같지만, 사실 아무도 믿
지 않는 군요. 만약 내가 눈이 멀어 자신의 동료가 어디 앉아있는지도 모르는 청
년을 해치려고 했다면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검사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
에요.」
「몰랐습니다.」
「그럴 거에요. 덩치가 커도 눈매가 가늘하니 빛을 발하는 것이 무서운 사람이었어
요. 당신과 내가 함께 나왔으니, 안절부절하며 오랫동안 따라만 두었던 맥주을
들이키고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김이 다 빠져 맛은 시원한 맹물보다 못하겠지만
말이죠.」
덩치가 크고 눈매가 작은 검사라면 보를레스겠지. 어벙한 문학청년같으면서도
대단한 검술을 지니고 있는 남자, 〈춤추는 칼〉의 실질적인 두목이었던 그의 행
동에는 언제나 평민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절도가 담겨있었다.
전령은 나뭇가지에 매달아둔 채 날아온 바람은 애꿎은 청년의 은빛 머리칼을 해
집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자라있던 걸까. 휘날리는 한올한올이 그의 물음을 부추
켰다.
「시즈의 눈, 과도한 마력을 사용한 댓가에 의한 부작용…. 맞죠?」
이미 소년을 지나 청년이 되어버린 그는 몸을 흠칫 떨었고, 아직 여인과 소녀의
경계에 서있는 아릴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응시했다.
몸을 움추린 시즈의 옷자락은 아직은 겨울 바람을 견딜 수 없는 어린 나뭇가지
처럼 나부꼈다.
「머리가 아픈거죠? 그렇죠?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그 만큼 위험한 것이랍니다.」
「아릴, 당신은 누구입니까? 무슨 이유로 내게 접근한 거죠?」
시즈는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녀가 모든 것을 아는 듯한 시선으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아 두려웠다. 숨기고 있는 나를 알아보는 이가 두렵다. 하
지만…. 참고 숨겨왔던 뇌의 격통은 한순간에 밀려왔고 그는 혼란에 쌓였다. 어느
새 소리없이 다가온 여인은 윤기를 잃어버린 채 누구에게나 비추는 달빛마저 거부
하는 은색의 실을 어루만졌다. 나긋한 꿈을 불러드릴 듯한 손길에 시즈는 피곤한
은회색 눈동자를 눈꺼플 사이로 조심스럽게 감췄다.
「이름을 부르며 누구냐고 묻다니, 술을 마시지 않고도 그대는 취하는 군요. 나
역시 그렇답니다. 시즈, 당신이 언젠가 빛을 찾으며 회색의 빛깔을 스쳐갈 것 같
다는 생각에 나는 그리움에 취한 것이겠죠.」
속삭임으로 작게 허공을 울린 그녀의 루비빛 입술에서는 천천히 물기가 묻어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를 묻기 전 그대를 알려줄 수 있나요.
그대의 이름이 아름답다면,
나를 부를 수 있는 그대의 입술에 입 맞출테니...
그대의 이름이 성스럽다면,
그리움에 한껏 취해 달려가 드릴게요.
그대여,
나의 사랑을 묻기 전에
당신을 보여주세요.
허공에 튕기는 물방울은 아픔을 이고 있는 청년의 머릿가도 두들겼다. 온갖 더
러움도 작게 물결치는 그 흐름에 휩싸이면 씻겨버릴 것 같은…, 그 향수(香水)
에 시즈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마를 움켜잡았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노래의 힘인가요?」
「음악은 고통을 잇게 해주는 힘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잠시 뿐이에요.」
「저는 마력을 가졌다는 노래가 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릴은 대답없이 시즈의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사락거리는 소리에 리듬을 맞추
듯 입을 열었다.
「역시 그대는 이상해요. 그런 고통을 아무도 모르게 숨기고 있다니….」
「아릴 씨는 눈치채지 않았습니까. 제 동료들 또한 알고 있을 겁니다.」
「시즈의 고통에 대해서 말할 수 있던 것은 알아챘기 때문이 아니에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지. 당신과 같은 고통에 눈물을 흘리던 사람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
지만 그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군요. 빛조차 받아드리지 않는 슬픈 눈동자를 뜨
고 있으면서….」
자신이 그녀에게 기대여 있다는 것에 시즈는 안도했다. 받쳐줄 것 없이 서있었
다면 여인의 말에 휘말려 슬픈 표정을 지어버렸을 것 같아서. 그는 아릴의 품에서
벗어나 어깨를 폈다.
「나는 빛을 거부하는 눈동자로 세상을 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나는 〈마땅찮은 시
즈〉니까요. 수 천년동안 잠을 자다가 깨어나 늙음을 이해하지 못한 어린 용의 덧
없는 불만이라고 할 지라도, 나는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어쩌면 수천년의 세월보다도 더 머나먼 공간을 뛰어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
만 과연 어린 용은 수 천년의 세월을 가졌던 걸까, 아니면 잃어버렸던 걸까. 그의
눈동자는 꼿꼿히 아릴를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가 바다처럼 촉촉한 미소를 띄
우는 것은 볼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강풍에 몸을 힘겹게 가누었지만 시즈는 싸늘한 바람의 내침 속에서
길을 알려주는 부드러움에 몸을 맡기며 여관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달빛이 휘날
리는 머리칼에 스며들어 황금빛 잔영을 남겼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아릴은 첫눈이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걸어가세요.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부드러운 흐름 속에서도
향할 곳을 잃지 않는 냉정함을 가진 이여.
영원을 혼자 여행하는 아픔에 괴로워 하는 이여,
당신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대의 아픔 속에서
꽃을 피우는 씨앗은 잠자고 있답니다.
당신의 부드러움에 취한 여행을 함께하며...
달을 보호하듯 무리진 빛의 장막은 밤을 감싸안은 여신이 목욕을 끝난 후의 포근
함을 나눠줄 것 따스한 물결에 쌓여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