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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고라토의 전령〉이 지나간 후 몰려온 구름은 몸의 일부분을 뿌리며 세상
을 하얗게 수놓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들뜬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너도나
도 거리를 오가며 발자국을 찍는 모습은 하루 전의 삭막한 분위기의 마을이라고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이토록 차가운데….」
시즈는 창에 턱을 괴고 앉아 간간이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았다. 조
금 전에 일어나서 일까.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 뼈 속까지 깊숙이 들어와 박
힌다.
「눈이 차가워. 그건 당연한 사실이지.」
「내 눈에는 지금 세상은 앙금이 가라앉은 과일주스처럼 보이네요. 네메이나, 당
신은 어떻죠?」
「호오…. 정말 눈이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지? 세상이 과일주스로 보인다니, 안 보
이는 것만 못하지만….」
그녀의 악의없는 비꼼에 시즈는 피식 웃어넘겼다. 그는 개미에게 힘껏 물어뜯겨도
피식거리며 웃기 때문에 네메이나는 자신의 말이 시즈에게 별다른 감흥을 안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뚱한 표정을 지으며 청년의 머리 너머를 바라보
며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후우…. 그래, 네 말이 맞아. 곱디고운 흰색의 비단이 대지를 덮어버린 것만 같
아.」
가끔씩 구름조각은 몸을 날려 아직은 초점을 잡지 못한 회백색 눈을 하고 있는 청
년의 머리와 얼굴에 부딪혔다. 단발마의 냉기만을 전해준 채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액체를 손끝으로 훔치며 시즈는 중얼댔다.
「하지만 눈은 차가워요. 모든 것을 받아드릴 것처럼 포근한 듯 하지만 너무나 차가워요. 그 포근함에 취한 것들은
곧 얼어붙어 버리겠죠.」
「그건 눈이 태양을 받아드리지 못해서야. 눈의 여신, 샤오우는 추악함에 물든 대지를 감싸안을 만큼 사랑하지만,
대지가 추악하게 변하도록 만든 모든 생물에게
힘을 주는 근원적인 힘, 태양을 증오하니까…. 모든 것을 감싸길 원하면서 그 근
원은 거부하다니, 재미있지? 어쨌든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생물들에게 사랑으로
느껴질 수 없어.」
안쓰러운 눈꽃이 아닐 수 없구나. 시즈는 현재 자신의 눈동자는 흐릿한 백지로 보
이는 설원과 같은 빛깔로 다른 이를 보고 있을 것 같았다. 겉으로는 받아드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받아드리지 않는….
〈당신은 겉으로는 동료를 믿는 것 같지만, 사실 아무도 믿지 않는군요.〉하고 아릴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
때, 나는 분명 어떻게 대답했지?
〈몰랐습니다.〉
그런지도 몰랐다. 나도 자신이 다른 이를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눈의 여
신, 샤오우도 자신이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끌어안고만 있다는 것을 알까? 시
즈는 입가에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비웃음이 서리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놀라워요, 네메이나. 전 네메이나가 그렇게 박식한 줄은 미쳐 눈치채지 못했어요.」
눈을 과장되게 뜨며 놀라는 그의 표정에 네메이나가 과연 속아줄지 알 수 없었지
만 칭찬에 의한 기쁨은 관찰력과 판단력을 흐리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한껏
키득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시즈를 밀치며 창틀로 몸을 쭈욱 내밀었
다. 입맛을 다시며 불길한 미소를 천진한 양 짓고 있는 것이 새로운 장난의 희생자
를발견한 것 같았다.
아마도 오백년쯤 도를 닦은 이무기가 용이 되기 전에 짓는 마지막 웃음도 그녀처
럼 능글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즈는 전혀 상관없을 생각을 하며 누군지 모를
희생자를 위해 묵상으로 조의를 표했다. 자신도 그 조의대상에 들어가게 되리란
생각은 꿈에도 못한 채….
「시즈, 잠깐만 손 좀 빌려줘.」
어리둥절하게 창틀로 끌려온 시즈는 네메이나가 자신의 팔을 붙잡아 올리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반항했다가는 더 참혹하면 참혹했지, 견디
기 쉬울 리 없는 장난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기에. 엄청난 힘으로 멀쩡한 창틀을
후려친 자신의 손이 아파왔지만 꾹 참고 견뎠다.
와르르르르. 지붕을 진동시키는 소리에 시즈의 안색은 백설로 마사지를 한 것처럼
창백해졌다. 그의 눈에는 희미하지만 폭포처럼 무엇인가 엄청난 기세로 떨어져내리
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흐으으아아악!」
「쿠왁!」
희생물들의 비명소리로 들어보건데, 앞의 경박한 비명소리는 피브드닌, 뒤의 간절
하지만 놀란 비명조차 힘찬 기세가 느껴지는 것은 드워프, 토루반이었다. 위에서
쏟아져내린 엄청난 눈덩이에 깔려버린 피브드닌은 물에 빠진 장님처럼 허우적거
리며 눈을 헤치고 나왔다. 하지만 토루반은 그러지못했다. 그야말로 어느 곳이 땅
이고 하늘인지 모른 채 팔다리를 뻗는 그를 묻은 눈이 약간씩 들썩이는 것을 본
피브드닌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동상이 걸리기 직전에 구출된 토루반은 아스틴 네글로드의 현자를 노리는 어쌔신
이 일행을 쫓고있다는 생각에 마을을 떠나서도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몇 일간 밤
잠을 설쳤다.
눈에 대한 공포증이 생겨버린 최초이자, 최후의 드워프로 후세에 기록된 토루반은
천천히 충혈된 눈 앞에 그 신성한 자태를 드러낸 아스틴의 왕궁이 너무나 반가웠다. 왕궁의 첨탑과 지붕에 기묘한
모양세로 얹혀있는 눈들은 마른침이 넘어갈 정도
로꺼림직했지만….
그가 감회에 젖은 눈으로 아스틴 네글로드의 서원과 학원, 회관들의 건물을 지
나치고 있을 때, 늙은 드워프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자객은 태평하게 낮잠에
빠져있었다. 그녀의 장난에 도저히 견디지 못한 남자들의 눈물어린 호소에 유레
민트가 네메이나에게 충고를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희생자들은 유레민트가 작은
악동을 한 마디로 길들여 준 것에 감사해하면서도 궁금해마지 않았다. 도대체
뭐라고 했을까?
네메이나가 잠꼬대처럼 중얼댄다.
「미인은 잠꾸러기…. 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