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200)

                                              -35-

「오랜만이로군, 용사여.」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어린 날의 소꼽친구처럼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눈웃음을

짓는 대신 시선은 긴장을 담은 채 상대의 빈틈을 찾느라 분주했고, 손에는 저 

마다의 무기가 굳게 쥐어져 상대를 노리고 있었다. 

「설마, 아직까지 암흑의 감옥 안에 갇혀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내 갑옷이 언제부터 죄인 가두는 감옥이 되었지? 의외로 곤란해 하는 군. 세일 

피어론아드의 유일한 용사, 샤르아릴이여…. 아직도 불꽃을 찾고 있는 모양이지? 

그가 없어서 나를 상대하기가 무서운가?」 

 창살을 연상시키는 흑가면에서 비웃음을 머금은 채 들러오는 물음에 청은발의

여인의 눈매가 새침하게 변했다. 남자들이 보았다면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달래 

주고 만 싶은 향긋함이 엿보이는 여인의 상큼한 아미도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 

는 콧웃음 이상의 자극을 줄 수는 없었다.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면 녹이 떨어질 듯한 흑동색 건틀렛에 들려있는 거대한 

검이 좌우로 천천히 옮겨가며 여인을 압박했다. 여인는 당장이라도 삐걱거리며

움직임이 멈춰버릴 듯한 물체가 얼마나 위험하고, 그 안에서 얼굴을 감춘 채 싸 

늘한 시선만을 보내고 있는 사람의 검술은 어느 정도로 강대한지 잘 알고 있었 

다. 찰나 하는 순간 놓쳐버리면 검은 갑옷이 치켜든 그레이트 소드는 무식한 무 

게를 자랑하며 여인의 미려한 몸을 신선한 피가 흐르는 고깃덩이 두조각으로 만 

들어 놓을 것이 분명했다. 

 첫눈으로 뒤덮인 대지를 박차고 흑색의 갑옷이 사자처럼 도약했다. 마치 어두 

운 밤의 한 조각이 번개가 되어 하늘로 솟구치듯 거칠고 신속한 동작이었다.

 샤르아릴이 헉 하고 놀라 숨을 들이켰고 갈기 대신 붉은 망토를 휘날리던 흑기 

사는 노도와 같은 기세로 그레이트 소드를 내리꽂았다. 

 파우우우웅 - 검풍에 애꿎은 눈바닥만 밀가루 분말이 되어 떠오르며 안개를 형 

성했다. 

「기름칠은 자주하는 모양이네요, 바스티나.」 

 고철덩이가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샤르아릴은 식은 땀이 등줄 

기를 소름끼치게 애무하는 것을 느꼈지만 억지로 참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고풍 

스럽게 기른 머리칼을 묶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바우우우우우! 갑옷만큼이나 둔탁하니 보이는 그레이트 소드의 ,잘리지 않는 대 

신 맞아 죽을 듯한 날이 그녀의 머리 위를 한뼘 사이로 지나쳤다. 기세 하나로도 

적을 주저앉게 있는중이니까… 실제로 피하며 주저앉아버린 용사를 쫓아 바늘같 

은 시선을 내리깔며 가면 안에서 바스티나라고 불린 이는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 

었다. 

「〈바스티너〉야. 남의 별칭을 바꿔서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어떻게 부르 

나 상관이야 없지만 헥갈리니까. 그리고 오늘은 피칠을 할 생각이니 걱정하지 않 

아도 좋아.」 

「미안하지만 그림 물감으로 피가 좋은지는 몰라도, 그랬다간 그 갑옷은 정말 고 

철 미술품이 되어버릴 걸요.」 

「네 머리칼로 다시 닦으면 되니까 괜찮아.」 

「누가 빌려주기나 한대요? 그 등에 걸친 걸레짝으로 닦지 그래요? 

「네 머리카락도 잠시 후면 걸레가 되어버릴 테니, 걱정마.」 

 검이 부딪혀 불꽃을 토해낸다면, 그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언어는 화산의 폭발을 

방불케할 정도로 폭렬적이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입에서 연기가 새어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바스티너의 그레이트 소드가 휘둘러질 때마다 샤르아릴의 몸은 폭풍 속을 버티 

는 여린 나무처럼 휘청거렸다. 그 상태로는 반격하는 것은 고사하고 방어조차 힘 

들었다. 게다가 바스티너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마법을 쓸 기회가 올 때까지 버틸 수 밖에 없었다. 

「힘들어보이는 군. 역시 그가 없어서인가?」 

「닥쳐욧!」 

 〈그〉를 거론할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역시 〈그〉를 아 

직까지 찾고 있군. 몇 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 

을 암시하는 것이었기에 바스티너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자신의 공세를 힘들지만 잘 흘려내는 샤르아릴에게 내적으로나마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물론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선은 다하고 있었다. 용사들의 절대적으 

로 강한 힘은 그들이 마법과 검술을 혼합, 화합하여 사용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었기에 바스티너는 끝없이 이어지는 원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검술을 펼쳐 마 

법을 시전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공격을 언제든지 거둬드 

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힘을 조절하는 그는 힘으로써 모두를 공격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전투방법으로서 최선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몰론 그의 스타일에는 맞지 않았지만, 위력면에 있어서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았 

다. 충분히 용사, 샤르아릴 정도는 제압할 수 있다고 여겼거늘 예상을 완전히 뒤 

엎어 버린 것이다. 마법마저 사용한다면 얼마나 강할 것인가. 

〈오늘 죽여야만 한다!〉 

 강해진 적의 모습은 마음을 압박했다. 바스티너는 〈그〉를 떠올렸다. 압도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의 회상은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졌다. 그러나 신과도 대적할 수 있을 것 같던 이는 이제 

없다. 

〈끝낸다.〉 

「그는 죽었어.」 

「아니야! 아니라고!」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신 네가 죽었어. 전투 중에 쓸데없는 감정은 빈틈만 

벌려놓을 뿐이지.

 검은 번개가 어른거렸다.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용사의 왼손에 쥐어져있던 레이 

피어가 허공으로 조각난 몸체를 튕겨보낸다. 멍하니, 피가 터져나오는 손을 바라 

보는 샤르아릴의 옆구리로 그림자가 섬뜩하게 스며들었다. 바스티너의 검이 이제 

껏없던 예기가 스물스물 흘리며 상하로 힘차게 그어졌다. 

 쿠와우우우우 - 

 대지를 붕괴시킬 듯한 검격에 땅이 공포에 질린 신음을 토했다. 검은 갑옷의 주 

위에 쌓여있던 눈들은 검이 일으킬 바람에 떠올라 10m 밖으로 후퇴하는 모습은

정녕 인간이 아닌 무신처럼 보였다. 

「약간의 틈이 있었던가?」 

 마지막 검을 내지를 때, 갑자기 모든 힘을 모아서 움직임에 찰나의 틈이 생겼던 

것이다.

「멍청히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했으면서 여우처럼 잘도 빠져나갔군.」 

 칙칙한 음성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은 허공을 뒤덮었던 눈보라가 다시 가라앉으면 

서였다. 백설처럼 차갑지만 맑은 목소리는 청량한 맥주같으면서도 와인의 달콤함 

이 녹아있는 여성의 톤을 가지고 있었다. 

「노르벨, 거기 있지?」 

「아하핫, 알고 계셨습니까? 역시 암흑의 갑옷, 바스티너.」 

「알아주십시오… 하고 기척을 뿌려댄 주제에, 실수를 아부의 수단으로 만드는 것 

도 너만이 할 수 있는 장기겠지. 어때, 쫓을 수 있지?」 

 머쓱하니 머리를 긁적이며 나무 위에서 내려온 청년은 피식, 자신에 찬 얼굴로 웃 

었다. 

「아마도요. 그 상태에서 마법을 시전했으니, 지금쯤 상당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 

을 겁니다. 어쩌면 워프한 곳에서 머리를 휘어잡고 뒹굴고 있을지도 모르죠. 급박 

해서 워프하는 곳도 정확히 이미지시키지 못했을 테니, 가까운 곳에 떨어졌겠죠.

 그들의 공통점이 아니겠습니까?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불완전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말이 두렵다는 것을 모르는 구나. 넌 모른다. 〈불꽃의 춤을 

추는 자〉의 불완전한 공포를 경험한 나는 그들이 완전이라는 가능성이 남아두었 

다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지금 죽여야지요.」하고 노르벨은 잔영만 남기고 사라졌다. 혼자 남은 

바스티너는 검끝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핏방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흐아아악! 아파, 아파!」 

 〈엘로고라토의 전령〉들의 고향, 엘로고라토 사막. 그녀는 모래가 아름다운 머리칼 속으로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아픔을 호소하 

고 있었다. 몸을 뒤틀 때마다 양손에서 흐르는 피는 모래 위에 그림을 남겼다. 

 한동안을 뒤척거려서야 정신을 지탱할 수 있게 된 여인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비척이며 일어섰다. 상큼하니 빛을 내던 머리칼은 어느 새인가 짙은 회색 

으로 변해 윤기를 잃어버렸다.

「여,역시 아파. 하지만 이걸 견디지 않으면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어. 하지 

만, 하지만, 아윽! 어떻게 시즈는 머리가 새하얗게 될 아픔을 견딜 수 있었지?」 

 문듯 아픔 속에서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시즈에 대한 경의가 솟아올랐다. 시즈들 

이 향하고 있을 아스틴의 수도방향을 바라보던 시선은 불안함을 머금고 있었다. 

「알려줘야해. 아스틴은 그들의 집결지야. 〈바람의 노래하는 이〉가 존재함을 알 

면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해….」 

 옷자락을 찟어 양손을 대충 싸맨 아릴은 정신을 날려버릴 듯한 고통의 발원지를

부여잡은 채 흐늘거리는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