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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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크의 수도, 제플론이 고결하고 귀족적인 색태를 풍기는 반면, 〈벨루온〉은 

서민적인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서민적이라고 해서 왕궁 대신 통나무 

집이 대신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니었고, 분위기에서 좀더 활발하면서도 소박한 멋 

이 다채롭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가? 삭막하니 짝이 없는 제플론보다야 벨루온이 훨씬 낫지 않나?」 

피브드닌이 마차의 창 밖으로 거리를 분주하게 활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가 

리키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거리에는 색색의 등이 걸려있었는데, 등불을 여러가지 색지에 감싸서 나무 위에 

걸어둔 것이었다. 낮이었지만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으니, 밤에는 얼마나 

멋질지 여행객을 비롯한 이방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의외로군요. 피브드닌이 성결스러운 제플론보다, 귀족들이 상스럽다고까지 비 

하시키고는 하는 벨루온 더 좋아한다니…」 

헤모의 눈에 피브드닌은 꽤나 고지식한 귀족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실제로 피브 

드닌은 매우 고지식하다는 것을 그와 함께 행동해본 이들은 쉽게 태도와 말투, 

생각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제플론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 분위기를 동경하기까지 했지. 지금 생 

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어쨌든 처음 가자마자 목을 죄는 듯한 분위기에 숨 

통이 막히더군. 너무 하나만 과도한 것이 잘못된 것은 문화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말하며 장년의 학자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회상하고는 부끄러운지 겸연 

쩍은 표정을 지었다. 

광장과 거리같은 좁은 거리에서 4두 마차를 타고 지나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귀 

족이나 상인이 아니면 잘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분수대를 지날 때는 사람들이 양 

옆을 메우고 신기한 듯 시즈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엘프인 유레민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동경에 차 있었는데, 이유는 아무리 아스틴이 마법에 대한 투자로 인하여 

엘프들과 교류가 빈번하고 학문과 마법의 교환으로 엘프들이 다른 곳보다 많이 

오간다지만 서민들의 눈 앞에 나타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고결한 자태로 백마를 멋들어지게 타고 있는 유레민트는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 

르고 꽃을 던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보여주었다. 

「유레민트 님…. 대단한 인기네요.」하고 시즈는 유레민트가 말에서 내려 어린 

소녀의 꽃을 받아들고 미소짓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는 이미 머리의 색이 약간 

흐르긴 했지만 흑발로 돌아와 있었고, 눈동자 또한 까만 빛깔로 순하디 순한 시 

선을 보였다. 옆에서 흑백이 확연한 시즈의 호기심찬 눈동자를 바라보던 토루반은 

이제는 피가 뚝뚝 떨어질 듯한 시뻘건 눈을 껌뻑이며 입을 열었다. 

「이 곳에서 엘프는 국가를 수호하는 기사적인 종족으로 대접받고 있으니까…. 

아스틴은 엘프에 생활에 관대할 뿐 아니라, 따로 그들이 살 수 있는 숲과 대지를 

분할해주기도 했지. 때문에 엘프들은 아스틴이 국가적으로 위험하거나, 무슨 곤 

란한 일이 생기면 현자나, 마법사를 동원해서 도와주곤 했어. 국가홍보 차원에서도 

순수와 조화의 종족인 엘프의 지원은 대단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아스틴은 그들을 

신성한 종족으로 숭배하고는 하지. 뭐, 귀족들이야 다용도 이용물 정도로 여기고 

있지만….」 

「그런 말해도 괜찮은 겁니까?」 

헤모가 당황한 얼굴로 창 밖을 힐끔거렸다. 귀가 좋은 유레민트는 모두 들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토루반은 우습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들도 아스틴의 귀족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여기는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 

로 인해서 엘프들은 이익을 보면 봤지, 손해를 보지는 않아. 그렇다고 귀족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데로 엘프를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이미 알고 있었던 피브드닌을 제외하고 마차 안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마차는 광장을 지나서 궁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국왕 폐하를 먼저 알현해야 합니까?」 

국왕 알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얼마나 막노동인지 엘시크를 떠나기 전, 

과분할 정도로 깨달은 시즈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헤트라임크가 억지로 

시켰던 예법훈련은 뼈가 녹아버릴 정도로 혹독했기 때문에 알현 자체가 두렵지는 

않았지만 지나친 격식은 그에게 상당한 부담요소였다. 

「아니야. 네글로드의 자만으로 몸을 둘둘 싼 학자들은 현재 〈또다른 고향〉이 

학문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가진 글이 아니라고 믿고 있으니까. 더욱이 네가 그것 

의 주인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을거야. 우선 원탁에서 코빠지게 우리를 기다리는 

나머지 4인의 탁자장식물을 만나본 후에도 알현은 늦지 않아.」 

토루반은 평소부터 인간 귀족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귀족 

학자들은 개방된 사상과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 국가운영을 해나가 

는 귀족들은 거의 소름끼칠 정도로 고지식하고 생각의 틀이 이미 규정되어 있어 

실이 지나갈 틈도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 인간들 안에서 개방적인 드워프 현자가 

자신의 지식을 펼쳐나가는 것조차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왕궁의 규모가 엄청나군요. 저 시설들에 쓰여진 건축기술과 수학 

활용의 깊이는 제플론으로는 상대가 되질 않는 것 같네요. 수도 간의 차이가 이 

토록 심하다니….」 

벨루온의 규모는 엄청났다. 마법을 기초로 발달된 수학과 건축술은 독특하고 참 

신한 디자인의 건축물들으로 왕궁 곳곳을 장식했고, 그것들은 건물의 주제, 또는 

연구항목에 대한 이미지를 알맞게 표현하고 있었다. 

「대단합니다. 벨루온이 최고라는 말의 또다른 수식어로 칭해지는 까닭을 눈에 

드러내놓은 것 같아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압도된 시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곳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그를 초청한 것이다. 모르는 척 얌전히 엘시크 산골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피브드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왕궁에 있는 것은 각 분야의 최종결정 기관이나, 회의기구 뿐이야. 실제 연구 

시설은 벨루온의 각 방위별로 나뉘어 일정한 범위의 연구단지를 형성하고 있지. 

아! 이제 다 온 모양이군.」 

마차는 둥근 돔같은 모양의 거대한 건물 앞에 멈춰섰다. 이미 통보를 받은 네글 

로드에서는 몇몇의 일부학자들와 시종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시즈들이 마차에 

서 내리자 수행원들과 보를레스가 일행의 호위하는 형태를 이루며 주위를 둘러쌌 

다. 

「어서 오십시오. 〈마땅찮은 시즈〉. 원탁을 놀라게 하신 분이 뵈어서 영광입니 

다.」 

늙그수레한 학자가 학문하는 이들의 상징인 학사모를 쓰고 보를레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시즈 일행 중, 현자들을 놀라게 할만한 학식을 갖출 수 있는 나이의 사 

람은 보를레스 밖에 없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피브드닌의 안색은 3일 쯤 

알몸으로 빙혼의 왕국에 다녀온 사람처럼 시퍼렇게 변했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특히 이름있는 무장이나, 학자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실례였다. 설사 

처음보는 사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학자께서 겸손이 심하시군요. 저 같은 수행원에게 예를 취하시다니.」하고 노 

인의 손을 잡아 두어번 흔든 그는 자연스럽게 시즈의 앞으로 상대를 이끌었다. 

귀족들간의 상당한 접촉이 없이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임기응변이었다. 덕분 

에 실례까지는 범하지 않게 된 학자는 안도와 함께 식은 땀이 등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옆을 힐끗 바라보니 피브드닌이 눈동자 속에 화산이 폭발하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제비뽑기에 걸

려 귀빈을 마중나오게 된 운명을 원망했다. 

「모두 지쳤으니 원탁의 장식물들을 보는 것은 내일로 미루도록 하지. 그들에게는 

내가 직접 말하겠네. 편히 쉬고 내일 보기로 하지.」 

토루반이 땅딸한 팔을 뻗어 시즈의 등을 두들겼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여행을 해온 그의 피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레민트와 피브드닌도 

저택으로 그만 귀가하겠다며 시즈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메이나는 나와 함께 가자.」하고 유레민트는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느라 정 

신없는 소녀를 잡아끌었다. 

「혹시 식사가 부실하거든 시즈 군, 내 저택으로 오게. 자네의 방향감각으로는 

무리라고 여겨지지만 말이야.」하는 피브드닌의 말은 뭔가를 암시하고 있었고 시 

즈는 그 날 식사가 절대로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귀빈들에게 식사가 

부실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피브드닌은 농담과는 거리가 있는 인 

물이었다. 

한 명씩 떠나가자, 흘러내리는 땀을 닦던 학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귀빈들의 숙 

소로 시즈, 보르레스, 헤모를 안내했다. 

「쉴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해는 벨루온의 첨탑 끝에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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