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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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의 천사라고 믿어졌던 아릴의 고결한 아름다움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만 같 

았다. 숲 속의 빛깔이라 착각되던 청하한 빛깔 대신 유리실로 느껴질 것 같은 은 

발은 피로 엉켜 붉은 녹이 처덕거리는 수세미를 연상시켰다. 왼쪽 귀에서는 고막 

이 터졌는지 그들을 보는 순간까지 붉은 체액이 흘렀다. 눈동자는 언제인가 시즈 

가 경험했던 투명함이 옅게 깔린 회빛이 드리워 촛점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절 찾은 겁니까?」 

 〈당신을 찾아왔어요.〉라는 말에 시즈가 그녀를 부축하며 묻자, 여인은 긴장이 

풀려 포근한 품에 몸을 묻었다. 청년의 낡고 고루한 옷에서는 풍기는 바람의 냄 

새는 모든 이의 마음을 쓸어내리는 향기로운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이 흘린 바람의 냄새를 따라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릴은 피로에 한계를 느끼고 서서히 회백의 동그라미를 길 

게 드리운 유리빛 눈썹 아래로 감추었다. 

                                              * * *

「양팔이 모두 부러졌고, 왼쪽 고막이 완전히 터졌어요. 눈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 

지만 예전의 시즈 정도는 아니지만 시력 자체가 급격한 충격으로 약해졌어요. 그 

뿐이 아니에요. 턱도 돌 같은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금이 갔고, 이빨에 혀가

찍혀서 1cm만 더 혀를 내민 상태였다면 앞부분은 사라지고 없었을 거에요.」 

「참담하군. 고칠 수 있겠나?」 

「물론이에요. 엘프의 의술과 마법을 뭘로 보는 거에요?

 하지만 팔은 골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사용해서 신경이 많이 다쳤기 때문에 시 

간이 좀 필요할 것 같고, 눈도 시력이 감퇴한 이유는 겉에서의 충격이아니라서 저 

도 뭐라고 할 수가 없네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토루반과 유레민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말하는 것에는 조 

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유레민트와 네메이나 두 숙녀는 청순한 이미지의 새하얀

드레스로 몸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피와 상처로 목욕을 한 여인의 모습에 치마가

더러워지는 것도 잊은 듯 했다. 

「근데 아릴의 눈과 머리칼은 마치….」 

 네메이나는 피를 닦아낸 수건을 시녀에게 건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 구석 

에는 어둠 속에서 벽에 몸을 기댄 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외모는 너무나 평범했지만 그것은 그가 어둠 속에 녹아들게 만들어주는 바탕 

이 되어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시즈 군, 자네는 아릴 님과 전부터 아는 사이였소?」 

「그런 것 같습니다.」 

 시즈의 발언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숙소에서 음식이라고 불리지 못할 것들을 배 

속 가득히 채우고 와, 방금 전 화장실을 구토물로 채워버릴 뻔한 헤모조차도…. 

「헤모 사제께서도 놀라시는 것을 보니 제플론에 정착하기 전에 안면을 가졌던 모 

양이군.」 

 간호차 온 이들이 무책임하게 시즈와 환자의 관계를 유추하고 있을 때, 아릴은

주위가 시끄러워진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으음…. 시즈 씨?」 

「일어설 수 있습니까?」하는 시즈의 물음에 유레민트가 급히 대답했다. 

「내 몸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순수하기에 가장 조화로운 이여, 절 좀 일으 

켜주시겠어요」 

「전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약해요. 환자는 의사의 말을 듣는 것이 강 

해질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알아줘요.」 

 그녀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정도로 유레민트는 누군가를 달 

래는 것에 능숙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대는 아릴의 어깨를 살며시 잡 

아 일으킨 그녀는 아릴의 목 뒤로 투텁고 푹신한 쿠션을 받쳤다. 

「시즈 님과 둘만 있고 있다면 나가드리겠어요.」 

「괜찮아요. 여러분도 들어주셔야 해요. 시즈!?」 

「듣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애뜻함이 담긴 시선을 띄고 시즈는 소리없이 다가 

와있었다.

「아스틴은 위험해요.」 

「아릴 당신과 관계된 일인가요?」 

 정곡이라는 단어로 시즈의 발언이 아릴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지 설명은 

충분할 것이다. 그녀는은 눈 앞의 청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지만, 단순한 한

마디만으로도 그가 상당한 예측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흠칫 

한 그녀는경직된 움직임으로 허허롭지만 차가움과 예리함이 내포된 시즈의 시선을 피해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요. 우리와 관계된 일이죠. 내가 끝내지 못한 탓이에요. 당신은 왜 이제서야 

나타난 건가요,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나 작아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시즈  일행을 이해시키기는 힘들었지만 

가슴에 스며들만큼 애뜻함을 풍겼다. 하지만 냉정하 

게 고개를 저어버리는 시즈는 은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릴, 당신을 믿습니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알고 싶으니까요. 내 

가 알기를 원하는 것들이 바로 이 아스틴에 있습니다. 나는 아스틴의 현인들 앞에 

서서 〈마땅찮은 시즈〉를 표현해야 하고 〈또다른 고향〉을 찾아야 합니다.」 

 온화하면서도 또렷함이 함께 담긴 음성은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강한 의 

지를 분명히 표현하고 있었다. 약간씩 떨리는 시즈의 어깨를 피브드닌은 힘있게

어루만졌다. 

「시즈 군은 우리 앞에서 자신의 앎을 드러내겠지? 자네의 지식은 알고 있네만,

나는 대륙이 자네의 지식을 받아드릴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없네. 난 자네를 막겠 

어. 하지만, 잊지는 말게. 시즈 군, 그대가 그르다는 것은 아니야. 자신감을 갖 

도록 하게.」 

「허허…. 피브드닌, 병주고 약 주는 행동만큼 뻔뻔한 것이 없지. 걱정말게나, 시 

즈. 난 자네를 지지해. 대륙은 너무 안식에 빠져있어. 흐르지 않는 늪은 더 높은 

하늘이 비치지 않아. 걱정하지 마시게, 아릴… 시즈는 자네의 걱정을 살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 

 자신도 멋지게 시즈의 반대편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분위기를 잡아보고 싶은 토 

루반이었지만 종족의 전형적인 체형은 그 바램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마지막 남은 

엘프의 현자는 아무 말없이 미소만 띄웠다.

「아릴 양을 간호하려면 제가 필요할 거에요. 네메이나와 함께 하룻밤 남은 방을 

빌렸으면 해요. 허락해주시겠어요, 피브드닌?」 

「물론입니다.」 

「흠! 기왕이면 나도 여기서…」하고 헛기침을 섟어가며 멋적게 끼어들던 토루반을 

피브드닌은 씨익 웃으며 말을 끊었다. 

「이유없는 외박은 부부싸움의 원인이 될텐데요, 토루반. 당신의 코거는 소리에

시달릴 것도 걱정되지만 우선 사적인 이유로 저희집에서 토루반을 재웠다간 몇

일 내로 로쿠스 부인이 제 저택을 난장판된 투우장으로 만들어버리실 겁니다.」 

 왠만한 남성들이 그런 말을 들어다면 쑥스러워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토루반 

은 담담하게 후일을 기약할 따름이었다. 

「자네가 결혼했을 때를 두고 보도록 하지.」 

 다음 날, 따사로운 햇살이 머리를 한창 눌러댈 시간에 후일 〈대륙의 여진〉이 

라고 불리워질, 한권의 서적을 둘러싼 현자들의 담론은 막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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