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 꿈을 여행하는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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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 씨는 괜찮을까요?」
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의 홀에서 뻗어올라온 한 쌍의 둥
근 첨탑에 물끄러미 시선을 향한 채 아릴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양팔에
는 붕대가 똘똘 말려이었고 흐릿하긴 하지만 천 사이로 피가 비쳐 위험한 상처를
입었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피가 묻었던 몸을 씻은 아릴은 맑은 청색이 약간이
나마 되돌아온 머리칼이 등을 타고 내려와 다소곳이 침대를 덮고있어 가히 천상
의 존재로 착각시킬 성결하고도 청순한 모습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어찌나 매혹적인지 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던 네메이나는 같은 여인으로써 자신이 초라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질
투가 나지는 않았다. 이미 아릴의 아름다움은 질투의 대상을 넘어서 단순히 감각
을 지나선 동경적인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녀와는 다른 의미로 한숨
을 깊게 내쉰 네메이나는 한껏 밝은 어조로 아릴를 토닥였다.
「당연하지. 아마 그 녀석을 해칠 마음을 먹은 사람은 골치 꽤나 썩을 걸.」
「그런데, 이건?」
「약이야.」
「저, 저기… 얼마 전에도 주지 않았어요?」
「응. 아릴이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기억력 좋네? 비몽사몽이었는데!? 먹기
싫어도 소용없어. 유레민트가 강제로 먹이라고 했거든.」
엘프들의 치료법은 죽지 않을 상처가 아니라면 대부분 약초를 활용하여 치료했
는데, 효과는 뛰어났지만 평상시라면 입조차 댈 수 없을만큼 약이 썼다. 그래서
환자들은 병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빈속에 술을 퍼먹은 것만큼 고통스런 속
쓰림을 쉴 새 없이 경험해야 했다. 유레민트의 치료법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붕대로 싸인 팔을 부들거리며 아릴은 입 안으로 목을 넘어가는 액체에 타는 듯
한 배를 부여잡으며 다짐했다.
팔을 부들거리는 것은 시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청광(靑光)이 내리치는 홀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다. 시선이 가는 방향대
로 주위에 둘러진 대리석원탁에서는 눈을 붉히며 시즈의 삐져나온 머리카락이라
도 찾으려는지 대륙의 내노라하는 7명의 학자들은 예리한 시선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명하시며 마땅찮은 시즈 세이서스, 그대의 말을 종합해보면 〈또
다른 고향〉은 그대가 쓴 소설이며 그 지식은 자신이 바탕이다!? 그렇다면 복잡
하게 여겨지는 소설에서의 이계물에 대한 설명은 무엇이오? 너무나 실재적인 설
명이라서 묻고 싶구려.」
「하하하하!!」
벌써 3시간을 넘게 말이 오고갔다. 피브드닌은 미리 예고한 것처럼 시즈를 곤
란하게 만들만한 질문을 수없이 던져댔는데, 마치 사랑을 뺏은 연적을 몰아붙이
는 듯한 기세였다. 다른 학자들은 그에게서 쏟아지는 질문과 그것에 일일히 반
박과 답변을 하는 시즈에게 혀를 내돌리느라 침만 꼴깍꼴깍 삼킬 뿐이었다.
크게 웃어재낀 홀의 주인공은 앞에 놓여진 컵을 들어 목을 축일만큼의 물만 삼
킨 후 말했다.
「소설에 현실성은 허구성 이상의 요소입니다. 아무리 허구가 멋지고 환상적이
라고 해도 그것의 뒷받침에 현실로서 이해할 수 있는 표현과 이론, 그리고 전개
방식이 아니라면 낙서에 불과할 따름이지요. 물론 배경과 사건에 전제된 현실투
영을 지나쳐서 말입니다. 하지만 문학과 철학을 비롯한 학문으로서의 글을 벗어
나, 개인의 허구적인 상상력을 책으로 묶어낸다면, 그것은 팔리기 때문이겠죠.
뭐 물론 팔리지 않을 수도 있긴 하지만…. 판매를 위해서 작자는 타인을 글로
끌어들이기 위한 많은 수단으로서의 기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허구를 진실
처럼 현혹시키는 기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있군요. 나, 아스틴네글로드 원탁의 7인 중 로우 베토리오가 묻겠소. 그
말대로라면 그대, 시즈는 독자를 현혹시켜 끌어들이기 위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
는 허구적 존재를 있는 양 설명했다는 것이오? 부품 하나하나로 나누어서…?」
흰 물감이 곱게 스며든 수염을 쓰다듬으며 흥미로워하며 자리에 앉는 노인과는
달리 벌떡 일어선 여인은 격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럼 저도 묻고 싶습니다. 이미 자신의 고명한 지식을 보여주신 〈마땅찮은 시
즈〉님은 글에 기재한 극한과 무한 급수와 같은 수학도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표현하신 겁니까? 원탁의 인 중 이메나 바르노가 묻고 싶군요.」
붉게 얼굴에 열을 올리는 이메나 바르노의 말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의 말대로라면 대륙의 대표적인 현자들은 한낱 매출을 위한 표현을 사용한 소설
가에게 우롱당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글로 표현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이해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현혹시키고 이해시키는 서술을 할 수 있습니다. 극한과 무한급수, 연속
과 미분의 관계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과 함께 입에서는 침음성을 내뿜었다. 나이가 많아봐
야 고작 스물이 되어보이는, 아직은 소년의 티가 남아있는 청년이 홀 안을 걸어
들어와 중앙의 의자에 앉았을 때 얼마나 기묘한 기분에 시달렸는가. 어떤 분야에
서 최고라고 불리는 이들이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받을 심정으로 만든 사람이 아
직 인생의 삼분지일(三分之一)도 겪지 못한 새파란 애송이라는 것을 깨닫고 토했
던 침음성에 이어서 두번째 침묵의 탄식이었다.
어둠이 깊게 깔린 채 굳은 모습으로 뻣뻣하게 일어서 토루반, 그는 다른 학자들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의지를 딛은 채 몸을 세웠다.
「화학이라고 표현된 연금술은 허구인가, 진실인가. 진실이라면 그대, 〈마땅찮
은 자〉는 글에 표현된 이론을 실험으로서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시즈는 자신이 과학을 공부했던 세계에 비하면, 아스틴이
아무리 대륙에서 제일가는 학문의 총괄 연구기관의 집합지라고 하더라도 실험기
구로 보나 재료로 보나 차이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정밀한 기구가 아
닌 고교실험기구로는 일어나는 오차가 있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었고, 아스틴에서
비슷한 예를 경험하게 된다면 간단히 오차가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불확실한 이론으로 증명을 피해버리자는 것이 시즈의 계산
이었다.
「이제는 우물 속의 7인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 하하하! 나 원탁의 7인 중 모
프크는 〈마땅찮은〉, 그대의 고명한 지식를 인정함과 동시에 감탄하오. 그대는
대륙의 현자들 앞에서 모르는 것을 안다고 속일만큼 세기적인 사기꾼으로 보이
는 않으니까. 앞으로 엘시크가 발전하는 것을 보면 그대의 가진 바가 얼마나 되
는지 알 수 있겠지.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소이다. 어린 나이, 작은 몸에 세
상을 뒤집을만한 지혜를 가진 자여, 그대는 그 앎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려하
오?」
푸른 빛을 받은 노인의 깔끔한 대머리는 섬뜩한 눈빛만큼이나 시린 그늘을 만들
고 있었다.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는 그 모습에서 시즈는 노인의 가벼운 어조와는
달리 베일듯한 예기를 느꼈다.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외모, 시골 귀족들이
입을만한 끝이 헤어진 옷차림새에서는 흐릿한 바람의 내음이 풍겼다. 빙그레 위
로 올라간 입꼬리에 현인들은 시선을 모았다.
「언제부터인가 계속 원해왔습니다. 항상, 원해왔던 것은 〈대신〉이 아닌 말이
었으니까요. 누구를 대신하는 것도 아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자신을
봐줄 세계를 찾아다녔지요.」
그래서 이 곳으로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나로만 봐줄 수 있는 곳. 세일피어
론아드로…. 순간이지만 홀 안에 있던 장년과 중년, 노년, 여인은 눈 앞에 서있
는 어린 청년이 그들 누구의 세월보다 오랜 시간 속에 비바랜 풍경화처럼 회색빛
잔영으로 느껴졌다.
시즈의 미소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부드럽게 퍼져가는 온화한 바람이 되어 있었
다. 현인들은 기분좋은 병에 전염된 듯 눈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었다.
「아스틴네글로드, 이 원탁에 그대의 자리를 하나 더 만들고 싶은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마땅찮은 시즈〉의 자리를.」
로우 베토리오의 말과 함께 그들 모두가 일어섰다는 것은 자신 만의 세계를 가
진 청년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시즈는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아스틴에 온 것은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을 완성해보고 싶어서 입
니다. 아직 자리를 갖을 생각은 없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은 아직 그가 소년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
여주었기 때문에 자부심이 강한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은 미소만 지을 뿐, 누
구도 그의 거절에 실망이나 화를 내는 이는 없었다.
로우 베토리오는 껄껄대고 크게 웃으며 걸어나와 시즈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자네의 세계을 만들 재료가 이 곳에 있다니 기쁘기만 하군. 바닥이 나도 좋으
니 얼마든지 퍼다주겠네.」
그의 느긋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는 시즈에 대한 청문회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글로드의 현자들은 걸어나와 악수를 청하며 싱글거릴 농
담과 덕담을 건넸다.
「그럼 〈또 다른 고향〉의 사본을 출판하는 것 정도는 아스틴에서 하지 않겠나
?」
「나쁘지 않겠군요.」
「책이 나오면 아마 아스틴 밖으로 나가지 못할 걸요. 학자들이 자네의 발꿈치
를 잡고 늘어질테니까요.」
「그것은 좀 곤란한데요…」
「이러지 말고 허기라도 채우러 갑시다. 그나저나 시즈 군, 술은 할줄 아나? 내
아껴뒀던 것 좀 꺼내주지.」
그들이 나이에 맞지 않게 히히덕거리며 홀 밖으로 걸어나갔다. 기분 좋은 웃음
이 얼굴 가득히 떠오른 가운데, 혼자 투덜거리는 이가 있었으니 열심히 발을 놀
리며 따라가는 드워프였다.
「왜 나와는 악수를 하지 않는 거지?」
시야 제한 범위에 걸린 것이 어찌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만 짧은
다리를 타고난 종족의 슬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