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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두 가지 중 한 요소이다. 나머지 하나인
빛의 중요성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어둠이 주는 안도감의 정체
에 대해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이는 없다. 그런 미지는 인간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상상의 존재에 대한 공포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 두려움과
미지의 안도감을 가진 은밀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어둠, 그 안에서 그들이 있
었다.
「실패지? 자신있어 하던 것이 꿈결같이 느껴지는 군, 그래.」
남자는 경멸어린 어조에 비웃음을 심어 키득거렸다. 촛불에 일렁이는 그의
그림자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불행히도…. 강했어. 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쫓길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었지.」
「그대가 용사라고 불리는 이를 너무 얕본 것이겠지. 그녀는 적어도 대륙의
몸부림에서 튀어나온 존재 중 하나야. 그래…. 〈그〉의 흔적을 용사 주위에
서 발견할 수 있었나?」
묻는 남자의 음성에는 좀전의 키득임은 조각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숨어 격
동하는 긴장의 숨소리가 주위를 가득히 메웠다. 세인들이 용사라고 부르는 사
람조차 가벼운 담론 소재일 뿐, 그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이는 오직 〈그〉 밖
에 없었다.
「아니, 없었어. 그녀도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한 모양이던데…. 역시 죽은 것
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여인이 그가 안도의 중얼거림을 토해내는 것을
거들었다.
「그래요. 아직도 〈그〉의 신위는 잊을 수가 없어요. 신과 겨룰 정도라니….
하지만 어째서 〈그〉는 마지막까지 그런 힘을 쓰지 않은 것일까요?」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리는 자신의 힘에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것이 아
닐까? 뭐 어쨌든 가장 위험한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는 것 같
아. 이제는 남은 둘만 남았군.」
말끔하게 면도된 턱을 쓰다듬으며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앞에는
한 청년이 부복해 있었다. 주위의 시선이 서서히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끼
는지 어눌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 여인은 한심스럽다는 어
조로 입을 열었다.
「전 설마 노르벨까지 실패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아하하하하하하핫!」
「웃음으로 얼버무릴 생각말아요.」
푸른 머리에 갈색 눈동자, 이지적인 외모와는 달리 그의 웃음은 헤프기 그지
없었다. 흑색 건틀릿의 둔탁한 꿀밤을 한대 맞은 청년은 두 손을 모아쥐고 울
상을 지었다.
「〈엘로고라토의 전령〉이 막 지나간 여운으로 바람이 남았는지 사막에 남아
있어야할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고요.」
「게으름 피운 것이 아니고?」
「설마요, 에레나! 절 의심하는 겁니까? 아하하하하하하핫!」
남자와 여인은 어색하게 웃어제끼는 청년을 바라보며 함께 중얼거렸다. 절망
적이기까지한 한탄이었다.
「그 설마로군….」
수당이 없다는 말에 노르벨이 풀이 죽어 돌아간 뒤, 어두운 갑옷으로 몸을 감
싼 여인은 침침한 안색을 띄고 있는 남녀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가 없다면 용사 정도야 시간문제가 아닌가. 다들 왜 그렇게 걱정스러
운 표정이지?」
「법칙을 깨는 존재가 한 명 더 나타난 것 같아서요.」
여인은 그 싸늘하지만 정겨운 말투에 한없이 차가울 것 같은 금속을 뒤집어쓴
얼굴을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무거운 금속체가 움직이면서도 철컥이는 마찰
음이 없는 부드러운 움직임이 그나마 에레나의 유일한 여성스러움이랄까. 흑가
면은 가볍게 다리를 옮겨 빈 의자에 앉았다.
「한 명이 더?」
짜증이 깊게 베인 귀찮아하는 그녀의 시니컬한 음성을 들으며 남자는 거칠게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아마도 〈불꽃의 춤을 추는 이〉만큼이나 법칙에 위배되는 녀석이야.」
「호오…. 〈그〉와 동급이라고?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도 나타난 건가? 그
런데도 이렇게 조용히 있어도 되는거야?」
지나치는 듯한 어조였지만 에레나는 숨이 막힐만큼 놀라고 있었다. 〈그〉와
같은 존재를 다시 상대해야 하다니, 끔찍하군. 가면으로 어떻게 변색됐을지 모
를 얼굴을 가린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물끄러미 불꽃에 시선을 던지고 있
던 남자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게 말이야, 학자야.」
「뭐?」
「학자라고요, 에레나. 그는 학자에요.」
「뭐야!? 그럼 별 거 아니잖아.」
「쉽게 말하는 군. 그저 학자인 자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향력은 현재까지의 어떤 누구보다도 광대하다. 게다가 이번
그자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아스틴네글로드와 접촉하는 것도 번개불이
떨어진 것처럼 끝내버렸다. 마치 견고했던 성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야. 녀석을 죽인다고 해도, 그의 책은 이미 사본이 만들어지기 시작
했으니…. 빌어먹을! 정말 마땅찮은 녀석이야.」
머리를 감싸쥐고 이를 갈아대는 것이 어지간히 고민인 모양이었다. 여인이 그
의 큰 손을 잡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아니에요. 그 책은 그가 초월적인 지식과 학문을 지니고 있다는 증명적
인 서적 밖에는 되지 않은, 단지 소설책에 지나지 않아요. 실제로 세상을 바꿀
만한 지식은 마땅찮은 그의 머리 속에서 나오지 않았잖아요? 그는 아마도 현실
을 바꿈으로써 그것을 내보일 생각인 것 같았어요.」
「녀석의 모국이 어디지?」
「엘시크에요.」
「최악인 동시에 그의 학문을 증명할 수 있는 최고의 실험장이로군. 하지만 잘
됐어.」
엘시크에서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을 노인을 떠올리며 남자는 싸늘한 미소
를 지었다. 여인 역시 같은 인물을 떠올렸던 모양이지만 남자와는 달리 껄끄러
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음…. 그럼 난 이제 돌아가도 되겠지? 다음부터는 왠만하면 자기 부하를
쓰라고! 괜히 바쁜 사람을 부르지 말고.」
암흑을 더욱 검게 물들이던 검은 갑옷이 서서히 사라져가자, 남자는 여인을 돌
아보며 말했다.
「저렇게 말해도 부르면 꼭 온단 말야…. 안 그래?」
여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