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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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차가운 계절이었지만 그렇다고 햇빛이 서늘해진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쌓여있던 눈도 벨루온의 분주한 사람들의 왕래에 이리저리 차여 자취를 감췄다. 

「네에!? 시즈 님께서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에 앉는 것을 거절하셨다고요? 어 

째서!?」 

「그거야, 내가 알겠나?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지.」 

피브드닌은 곁의 나무와 머리를 번갈아 부여잡으며 발광에 가까운 몸부림으로 

흥분 상태를 알려주는 장신의 사내에게서 민망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헤에…. 보를레스,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이라니?」 

마침 점심 무렵이여서 네메이나는 벨루온에서 유명한 고급 음식점이 아닐까하 

는 생각으로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의문을 토했다. 하지만 그녀를 힐끗 

바라본 보를레스는 무정하게도(?) 호기심과 식욕에 찬 한 소녀의 시선을 무시 

했다. 결국 몇 번의 물음 끝에 〈어째서 - !?〉라는 절규의 대답만 듣게된 네 

메이나는 뾰로퉁한 표정으로 식식거렸고 보다못한 헤모가 끼어들어 대신 대답 

했다. 

「아스틴네글로드는 아스틴에서 가장 권위있는 학문 연구기관이야. 원탁은 그

중에서도 제일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앉아 회의하는 홀의 테이블을 말하는 거 

지. 한 마디로 아스틴 최고의 학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상징이야. 유레민트와

토루반도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에 앉아있는 분들이지.」 

네메이나는 몇 일전까지만 해도 함께 여행했던 이들이 뭔가 거창한 신분이었 

다는 것에 조금이지만 당황했다.

「하긴…. 그 때 그 기세는 뭔가 있는 놈 같았어.」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처음 시즈 일행 

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낮고 고요하게 숲 안에 퍼지던 목소리, 은은한 미소 

… 소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 후로 보 

았던 시즈의 행태가 머리 속을 가득히 메웠던 것이다. 

아침에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비틀거리다가 우물에 빠지고, 음식을 먹으며 걷 

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넘어지는 상황에서도 손 

에 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지 필사적으로 사수했었지. 게스츰하게 눈을 뜬 네메 

이나는 찹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뛰어난 학자들은 죄다 그런가?」 

??세의 소녀가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그 고민대상인 시즈는 잡다한 생각- 물 

론 자신의 일행 또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은 잊은 채 독 

서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귀족적인 예풍에 대해 자유로운 생각을 갖고 있었던

모양인지 아니면 그들 또한 국왕의 알현이 얼마나 고된 작업인지 이해하기 때문 

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고민했던 아스틴 국왕 알현은 지나칠 수 있었다. 네글로 

드의 학자 중에서도 〈또 다른 고향〉과 시즈의 존재를 아는 이들이 매우 적었 

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쨌든 시즈는 귀빈자격으로 왕궁을 활보하며 원 

하는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목표했던 고문의 마법서를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스틴 궁정

마법사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만이 고대어문의 서적들이 보관된 서실을 열람할 

수 있었고, 타국적의 사람들은 설사 왕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실망한 시즈는 일찍이 포기하고 네글로드의 도서관에 틀어박혔 

다. 

「좀 비켜주지 않겠어?」 

「예. …….」 

「이봐, 언제 비킬거야?」 

서서히 한기가 풍기는 음성에 놀란 시즈가 아쉬운 듯 책에서 눈길을 떼며 고 

개를 들었다.

고급스런 비단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소년은 기가 막힌 듯이 시선을 내리깔 

았다. 어디서 놀던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난뱅이티가 풀풀 나는 허름한 옷 

차림을 걸친 시골귀족 청년은 그의 말을 당나귀가 홍당무 씹듯이 무시해버린

것도 모잘라 옷감만큼이나 허름한 눈빛으로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소이빨에 되새김질 되는 기분이 되어버린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몇 권의 책 

을 짜증스럽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언제 비킬거얏!」 

소란이 일자 주위에서는 몇몇 사람이 힐끗힐끗 곁눈질을 하며 지나갔고, 청 

년은 그제서야 생각이 돌아가는지 멀뚱히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시골 귀족청년의 정체에 호기심에 호기심이 일어난 소년은 멋적게 웃고 있는 

그를 째려보면서 슬쩍 청년이 읽고있던 책을 살폈다.

「맙소사! 〈인디움프스 몬스터생태학〉!?」 

「아아! 이거요? …저 쪽 책꽂이에서 찾아낸 건데, 서술방식과 풀이가 꽤 흥 

미로워요. 혹시 찾으시던 책인가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푸른 눈동자를 모두 들어내고 노려보는 소년에게

두려움을 느낀 시즈는 머뭇머뭇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홱하니 청년에게서 

책을 받아 펼쳐든 소년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트, 틀림없어! 몬스터의 종류에 따라 수 많은 종족관점으로 나누어 설명했 

을 뿐 아니라, 더욱이 고대어와 역사학을 바탕으로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어, 역사, 생물학을 통달하지 않은 자는 손도 대지 못한다는….」 

주위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며 눈썹을 찡그렸지만 그런 것은 이미 관심 밖이었 

다. 침을 꿀꺽 삼키며 소년은 검푸른 머리를 쓸어넘겼다. 긴장된 표정으로 책과 

시즈를 바라보던 그는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지?」 

「시즈라고 합니다. 시즈 세이서스.」 

「마땅찮은(시즈) 영광(세이서스)!? 기묘한 이름이네.」 

「아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앗!」 

어설프게 웃어대던 시즈는 그제야 일행에 대한 생각이 일었던 모양이다. 갑 

자기 호들갑을 떨며 몇 가지 책을 챙긴 그는 몇 번이나 넘어질 듯 기우뚱거 

리며 도서관을 나가버렸다. 

혼자 남아버린 소년은 허탈하게 손에 들린 책을 몇 번 더 펼쳐보다가 힘없이 

자신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누구지? 머릿 속에 청년의 허물없다 

못해 멍청하게 보이는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아니! 데미노머 전하, 왠일로 그렇게 힘이 없지?」 

친근하게 말을 걸며 어깨를 두들기는 갈색머리의 젊은 귀족은 소년이 어릴 

때부터 자주 어울렸던 형뻘의 친구였다. 소년은 자신보다 키가 한뼘은 큰 젊 

은 귀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로훗, 아아…. 아무 것도 아니야. 혹시 〈인디움프스 몬스터생태학〉을 취 

미처럼 읽을 수 있는 18살짜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릴지도 몰라.」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은 질문에 로훗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호탕하게 웃 

어댄 그는 소년의 어깨를 텅텅 소리가 나도록 치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나도 알고 있는 걸!」 

「정말이야!? 누구지? 어서 말해봐!」 

숨이 막히는대도 불구하고 소매를 늘어지도록 잡는 어린 왕자님을 가까스로

떼어내는데 성공한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전하잖아. 15살인데, 이미 역사학과 어학의 수준이 이미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도 놀라게 할 정도라며? 앞으로 3년만 있으면 그 정도는 그림책 훑듯이 

보지 않겠어?」 

데미노머는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버리는 것을 느꼈다. 축 쳐진 어깨를 늘어 

뜨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왕자는 심통난 노인네처럼 게슴츠레뜬 눈초리로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일그러진 시선을 선사했다. 로훗은 시녀들이 놀라 비 

키는 것을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붉어진 뺨을 긁적였다. 

「역시…. 너무 티나는 아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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