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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만 아니었다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정원을 가로질러 거닐던 왕자는
문득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를 만났다. 평범한 사람에 비해 매우 짧은 그림자
를 드리운 상대는 드워프들의 전통적인 현자복장을 입고 있었다.
「토루반! 여행을 가셨다더니 돌아오셨군요?」
네글로드 원내에서도 시즈의 존재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를 맞이하러 엘
시크를 방문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오랜만이오. 그 동안 성과는 좀 있었소?」
여타의 귀족 학자와는 달리 토루반은 궁정의 예를 따르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렇다고 드워프의 이름난 현자를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왕족들은 고심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왕족들은 그를 한 왕자의 스승으로 삼아버렸다. 스승은
곧 어버이나 다름없으니 왕자의 스승인 토루반은 궁정의 자잘한 예식은 무시
좋은, 신분을 갖게 된 것이다.
아스틴의 왕족으로서는 절치부심한 끝에 찾은 해결책이었다.
「별다른 것은 없었어요.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총명한 왕자는 특별한 일이나, 고민이 아니면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
루반은 의아하면서도 기대가 섟인 심정으로 소년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미
간을 미세하게 찌푸린 왕자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
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또래의 남자 중에 제 학식을 웃도는 이가 있습니까?」
무슨 질문인가하고 궁금해하던 토루반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우핫핫핫!」
「우, 웃지 말아요!」
얼굴이 시뻘개진 채 소리치는 데미노머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웃
어대던 토루반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무슨 대단한 질문인가했더니…. 전하, 세상은 넓소이다. 당신의 학식이 나
이에 비해 이룬 성취가 크다는 것은 알지만, 그만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오.」
「인디움프스 몬스터생태학을 흘려보듯이 읽을 수 있단 말입니까?」
왕자가 주위의 칭찬공세에 물들어 그런 질문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토루반
은 갑자기 예까지 들면서 묻음에 이상함을 느꼈다.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 속
을 더듬어보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무리일거요. 하나도 아니고 3분야 이상의 학문이 현 최고급단계까지
이르지 않는 한은 읽을 수 없소. 왕자 전하 또한, 최고급단계에 이른 학문이
없잖소?」
「시즈 세이서스 라고 했습니다.」
「아, 글쎄! 시즈 세이서스고 뭐시고 간에…. 엣!? 뭐라고? 시즈 세이서스?」
데미노머가 침중한 얼굴로 내뱉은 한 마디는 호쾌하면서도 침착하기 그지 없
는 드워프의 현자를 망가뜨려 버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이 걱정될 정도로
부릅뜬 시선으로 반문하는 토루반이 의문의 청년을 알고 있는듯한 반응을 보이
자, 왕자는 눈을 반짝이며 재촉했다.
「토루반! 알고 계시군요? 그가 누구지요? 정말로 그 책을 가볍게 읽을만한 지
식을 지닌 것입니까?」
아침에 내린 서리가 아직 녹지 않은 채 뽀얗게 덮인 풀이 건조된 과자같은 소
리를 내며 소년의 발 밑에 깔렸다. 흥분하여 느껴지지 않던 바람이 차가움을
뿌리며 그들의 사이를 지나쳤다.
잠시 침묵이 내려깔렸던 정원에서 토루반은 왕자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아니오. 험험, 나는 모르는 사람이오.」
「토.루.반! 날 속일 생각 말아요!」
「알겠소. 말하지요. 내가 알고 있는 시즈 세이서스 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소.」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아시겠군요?」
「그건 왜 묻지요?」
「당연히 만나보려고 그럽니다.」
토루반은 흥분에 반짝이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이미 때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상점가에서 꼬치 노점상을 거의 점거하다시피 한 보를레스
와 네메이나를 모르는 척 피브드닌과 헤모는 담뱃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어라, 보를레스. 저거 시즈 맞지?」
보를레스가 돌아보니, 중요한 살덩이는 입 속으로 사라지고 작대기만 남아버린
네메이나의 꼬치가 가리키는 곳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는 인영이 하나 보였다.
「시, 시즈!!!」
착각인가 하고 달려간 보를레스를 시즈는 코를 한 손을 부여잡고는 미소를 지으
며 맞았다.
「아하하… 하….」
「지금 웃고 있을 때입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버럭 화를 내는 보를레스를 따라온 일행들은 코피를 흘리는 시즈를 어이없는 시
선으로 바라보며 기가 막힌 듯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거 참, 해맑게도 웃는 군.」 - 피브드닌
「자학적 취미를 의심해볼만 하겠어.」 - 네메이나
「어떻게 된거야?」
시즈는 그나마 질문다운 질문을 한 헤모에게 들고 있던 책을 건네며 보를레스가
쥐고있던 꼬치를 가로챘다. 순간, 일그러진 두 남자를 무시하고 꼬치구이를 물끄
러미 주시하던 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별 거 아니에요. 넘어졌는데 들고 있던 책에 코를 박았어요.」
보를레스는 흘깃 피브드닌을 끌어당겨 귀를 잡아늘리고는 섬뜩하도록 차가운 목
소리로 속삭였다.
「저 사람,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에 추천된 사람이 정말 맞소?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요.」
피브드닌는 유괴된 여자아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내가 추천하지 않았소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