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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하, 꼭 그렇게 입고 올 필요가 있었소?」
토루반의 음성에는 골치아픔을 절실히 나타내는 떨림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자는 거리에서 10년은 굴러다닌 것 같은 거지꼴을 하고 있었던 것이
다.
「토루반…. 그대는 드워프 제일의 현자이지만, 역시 창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
는지 모르는 것이 있군요. 이래뵈도 난 유명인사란 말입니다. 유명인사는 어딜가
나 행동과 모습을 보이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이렇게 유명인사가
아닌 모습이 되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전하는 왕족이 아니시오. 일개 학자를 만나러 직접 나올 것보다 시종
을 보내어….」
「토루반! 그대가 그런 말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대는 왕족이 아니라 폐
하께서 내리신 령을 무시해버릴 때도 있잖습니까. 첫인상과 그대의 친구라는 점
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려볼 때, 시즈라는 사람도 도망가버릴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어요.」
토루반은 말문이 막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소년은 어느 집 굴뚝에서 묻히고
나왔을 숱뎅이가 안면에 골고루 발라졌는지 확인하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왜 저렇게 두리번거리죠? 미행을 눈치챈 것이 아닐까요?」
일행과 만난 후 음식점의 야외테이블에 앉아 주위를 한시도 쉬지 않고 두리번거
리는 시즈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왕자는 토루반에게 속삭였다.
「역시! 멍청한 것처럼 보이던 모습은 꾸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요, 토루
반?」
토루반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왕자를 내심 안쓰러워 혀를 찼다. 불쌍하게도 왕자
는 눈에 뭔가 씐 것이 틀림없어. 드워프의 현자는 어리숙한 소년 왕자보다 추적대
상의 행동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시즈는 예전부터 과자류에 대해서 광적으로 좋아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물
론 술도 그러했지만 적어도 자제하고자 하는 노력은 보이곤 했다. 하지만 과자에
대해서는 모기장 만큼의 헐렁한 경계심도 없었다. 현재 안절부절하며 주의산만한
경계는 눈치채지도 못한 미행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언제 과자를 노리고 달려들지
모르는 네메이나를 향한 것임이 확실했다.
「눈치챈 것은 아닐 거요. 눈치를 채면 또 어떻소? 언제까지 숨어있을 장적이오?」
「흠흠, 걱정 마세요. 신중을 기하는 것 뿐이니까.」
한편 품에 앉은 과자봉지를 사수하고자 약간은 흐릿한 검은 색 눈동자를 뒤굴뒤
굴 돌리던 시즈의 귀에 멀리서 아릿하면서도 섬뜩한 괴성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네메이나와 보를레스가 지르는 음식쟁탈의 울부짖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즈는 생
각에 빠졌다. 수도자처럼 고요히 눈을 감은 채 과자봉지를 만지작거리며 침묵의
늪에 빠져있던 그는 무언가결심한 듯 벌떡 일어났다.
「피브드닌! 전 먼저 숙소로 돌아가겠습니다. 가서 연구할 것이 조금 있거든요.」
연구대상이 바나나를 비롯한 여러가지 과일첨부의 건조 과자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피브드닌,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뜨고 감탄하며 끄덕였다.
「어디서든지 저렇게 학문을 우선시하니, 이름있는 학자로서 전혀 부담이 없군 그
래.」
나중, 그가 이 한 마디 때문에 평생도록 학자의 자세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무관
심한 학자였다는 혹평을 당하지만 그것은 오랜 후의 일이다. 떠밀 듯이 시즈를 보
낸 피브드닌은 헤모를 비롯한 일행들을 찾는 도중, 웬지 모르게 이상한 분위기의
두 인영을 발견했다. 그들은 매우 더러운 집시의 복장을 하고 골목 건물 귀퉁이에
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즈가 걸어가는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 시즈가 골목으로
사라지자 황급히 귀를 쫓는 것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문득 피브드닌의 머리 속에
애처로운 시선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아스틴은 위험해요.〉
나지막한 그 말은 분명히 시즈를 가르켰다. 순간, 그는 자신이 이미 달리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귀족의 자존심인 품위는 어디있는지 생각도 않고 피브드닌은 정신없이 달렸다. 하지만 곧 그는
벨루온이 거대하고도 복잡한 구조를 가진 사실에
저주를 던져야 했다.
한편 마음껏 과자 맛을 조사,연구할 생각에 마음이 부푼 시즈는 부지런히 네글로
드의 귀빈관을 향해 발을 옮겼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먹어치웠을 과자는 의외로
온전했다. 그 이유가 병석에 누워있는 아릴에게 나눠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일행이
안다면 얼마나 경악할까. 그가 아릴에 신경을 쓰는 것은 그녀의 절세적인 아름다
움 이전에 단손한 동질감이 앞서있었다. 눈이 멀었을 당시 자신의 증상에 대해 원
인을 날카롭게 파악하는 그녀에 대해 놀랐지만 더욱 놀란 거은 몇일 후 자신과 같
은 증세와 모습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였다. 그 때의 자신의 고통과 같은 아픔에
시달리는 여인, 그녀가 불러준 노래는 동질감 이상으로 시즈에게 동경에 가까운
감정까지 심어주었다.
아직은 아릴처럼 노래를 불러주기에는 부족하지만 당당하게 그녀 앞에서 부를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다짐을 하고 싱글거리며 걸음을 재촉하던 시즈는 왕궁에서부터
뒤를 밞아대는 몇몇의 인영들을 생각해내고 문득 멈춰섰다.
〈과자 때문에 잊고 있었ㄴ. 도대체 언제까지 쫓아올 생각이지? 바람에 살기가 섟
여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저기…. 그만 나오시죠?」하고 어색하게 들려오는 시즈의 어조에 토루반은 허탈
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 무슨 생쇼였단 말인가.
「슬슬 불러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모습을 드러내려던 토루반과 데미노머는 갑자기 들려온 한기 가득한 음성에 숨을
죽였다.
스르륵.
언제부터인가 그 곳에 서있던 사람들처럼 두 남녀는 모습을 들어냈다. 마치 물
속에 녹아있던 결정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작은 미행자들과는 달리
시즈는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힐끗, 토루반이 숨은 방향을 슬쩍 바라보았던 청년
은 더러운 로브를 걸친 두 집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게 용건이 있으신 모양이네요. 열심히 쫓아오셨으니 들어보지 않을 수가 없군
요.」
남녀 집시는 모두 키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 조금은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키
가 작은 시즈는 올려다봐야 했다. 드리워진 후드의 앞자락 때문에 보이는 것은 입
가에 새겨진 비웃는 듯한 붉은 미소 밖에는 없었지만 옷과는 달리 흠하나 없는 피부는 그들이 상당한 신분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었다.